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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02 18:08 수정 : 2010.05.02 18:08

구상진 전 서울지검 검사. 1981년 연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대해 구상진 검사는 사건의 수괴로 지목된 장신환은 불기소로, 나머지 피고인들도 최소한 내란죄로는 기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한 반발은 구상진 검사 개인에 그쳤고, 그의 행동은 엉뚱하고 감상적인 돌출행동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단순 학내서클에 “내란죄 적용하라”
공안부 검사 구상진 “기소할 수 없다”
사표 내자 보복 이어져…구속 검토까지
정형근 검사 대타 나섰지만 2심서 무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9. 연세대생 내란음모사건과 안보수사조정권

황당한 내란죄 적용과 구상진 검사의 반발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검찰은 지금의 기세등등한 검찰과는 달리 안기부에 의해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1981년의 연세대생 내란음모사건은 검찰이 안기부에 의해 완전히 찌그러져 있던 시절 안기부에 맞섰던 젊은 검사가 퇴출되어버린 우울한 삽화였다. 1981년 3월 하순 연세대생 정신화, 김치걸, 이성하, 장신환 등이 유인물 사건과 관련하여 검거되었다. 안기부는 이들 학생들이 광주항쟁 소식이 궁금해 이북 방송을 들은 것을 밝혀냈다. 안기부는 또 장신환이 1979년의 남민전 사건과 관련이 있자 쾌재를 불렀다. 무언가 그림이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광주항쟁 이후 대학가에서 전두환 정권 타도의 움직임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기부는 그림이 필요하던 차였다. 이렇게 해서 학내의 단순 유인물 사건이 안기부에 의해 이북과 남민전과 연결된 내란선전선동사건으로 둔갑한 것이다. 안기부는 이 사건에 국가보안법 외에 내란죄를 적용하여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했다. 사건을 담당한 사람은 구상진 검사였다. 구상진 검사는 기록을 검토하고 학생들을 심문하고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보아도 단순한 학내 서클 모임이었지 무슨 거창한 내란음모조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대법원은 내란죄의 구성요건의 하나로 목적달성의 수단으로 폭동이 행해져야 하고, 이로 인하여 한 지방의 평온이 깨져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사건은 내란죄를 적용하기 어려웠다. 만약 이런 종류의 사건을 내란음모로 처벌하면 앞으로 유사한 사건은 모두 내란음모로 처벌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질 판이었다. 또 구상진 검사는 남민전 사건은 유신 시대의 일로, 5공화국이라는 새 시대가 열린 마당에 뒤늦게 이를 문제 삼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구상진 검사는 사건의 수괴로 지목된 장신환은 불기소로, 나머지 피고인들도 최소한 내란죄로는 기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보수사조정권이라는 벽

구상진의 상식은 대통령령인 ‘정보 및 보안업무기획·조정규정’에 근거한 안보수사조정권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1963년 12월14일 전문 개정된 <중앙정보부법>은 정보부 직무의 하나로 “정보 및 보안업무의 조정·감독”을 들고 있다. 검찰이 막강한 이유는 기소독점권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보수사조정권은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중대하게 침범하곤 했다. 안보수사조정권의 핵심은 두 가지로 하나는 안기부가 송치한 사건의 피의자 신병처리는 안기부장의 ‘조정’을 받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안기부가 제시한 송치 의견과 다르게 기소하거나 불기소 할 때는 안기부장과 ‘협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말이 좋아 ‘조정’이고 ‘협의’지 실은 허락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안기부가 처리한 사건의 경우 피의자를 석방하거나 죄목을 변경하는 일을 독자적으로 할 수 없었다. 대통령령에 불과한 안보수사조정권이 형사소송법에 보장된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짓밟은 것이다. 사법경찰관리 부서인 안기부는 당연히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아야 하지만, 1961년의 중앙정보부법은 중앙정보부가 행하는 수사는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아니 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은 1963년 삭제되었지만, 중정-안기부의 버릇을 버려놓았다.

사표 쓰고 잠적한 구상진 검사

구상진 검사는 서울지검장 김석휘의 결재를 받아 1981년 5월16일 안기부장에게 공안사범 처분 협의 공문을 보냈다. 그는 “장신환을 불기소(기소유예) 처분하고자 협의하오니 조속히 회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안기부로서는 이 사건에서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연대 학생 용공불순사건 항소심 관련 검사 접촉 상황보고>라는 문건에 따르면 안기부는 이 사건을 “최근 대학생들의 좌경화 의식성향에 대한 사례를 제시한 사건”으로 전두환에게 보고했고, “당시 대통령 각하께서 동사건 내용을 국무위원 및 국회의원에게 전파하여 대학생 좌경 의식화 성향을 주지시키고 그 대책을 강구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의 수괴가 불기소된다는 것은 안기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등 피의사건 피의자 장신환 등 4명 담당 검사 관련상황>이라는 문서는 당시 안기부와 구상진 검사 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안기부는 구상진이 김치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상진이 “너의 행위를 잘했다고 해야 할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 의문이다”라고 언동했다고 규탄했다. 구상진이 안기부의 담당 수사관에게 “새 시대에서는 구시대의 많은 오류를 범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며 장신환을 불기소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안기부의 담당 과장이 전화로 그를 구속기소하도록 종용했으나, 구상진은 이에 불응하고 안기부장에게 공안사범 처분 협의 공문을 보냈다. 안기부에 기소유예 처분 의견문을 발송하고 ‘협의’를 요구한 구상진 검사는 안팎으로 공격을 받았다. 구상진 검사는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았고 “서울지검에 빨갱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검찰은 정보 및 공안사범 처리에 있어서 안기부의 의견이 다를 때 안기부의 의견대로 협의·조정되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안기부는 구속만료일이 다 되도록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구상진 검사의 협의요청을 그냥 묵살한 것이다. 안기부가 답을 안 한다면 구상진은 자신의 의견대로 장신환을 풀어주든지 아니면 안기부 의견대로 기소하든지 힘든 선택을 해야 했다. 결국 구속 만기를 하루 앞두고서 안기부장 대신 검찰총장이 “안기부 요구대로 내란죄로 기소하라”는 공문을 보내자 구상진은 사표를 쓰고 잠적했다.

대타로 등장한 정형근과 허위 조서

그러자 공소장 작성 및 기소 임무가 공안부의 정형근 검사에게 떨어졌고 시간에 쫓긴 정형근은 기록을 검토할 시간도 없이 밤 12시가 다 되어서 안기부 의견서를 베껴 겨우 공소장을 제출했다. 그러다 보니 내란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구상진이 피의자들을 상대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 내용과 공소장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형근은 공소장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검찰 진술조서를 작성하기 위해 장신환 등을 대상으로 뒤늦게 기만적인 방법으로 추가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장신환에 따르면 정형근은 학원관련사범의 정보보고를 위한 개인 참고자료로 몇 가지 물어본다며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해 놓고는 지장을 찍게 한 뒤 이를 검찰조서로 제출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장신환 등은 법정에서 허위와 기만으로 작성된 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했다. 각종 공안사건에서 조서의 임의성과 내용의 진정성을 놓고 다투는 것은 다반사이지만, 조서 성립 자체의 진정성을 놓고 다투는 경우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집요한 안기부의 보복

사표를 낸 구상진은 미국 유학을 준비했고, 정형근이 피의자 전원을 내란죄로 기소했지만, 안기부는 야인이 된 구상진을 주시하면서 그의 비위사실을 조사했다. 1981년 6월22일자로 작성된 <전 서울지검 구상진 비위내사 상황보고>에는 구상진의 신원배경 및 동향, 이 사건 관련 청탁 개입 여부 내사 사실을 밝힌 후 향후 계속 내사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안기부는 구상진이 장신환을 기소유예하려 하고, 나머지 피의자들에 대해 내란죄 적용을 뺀 것이 그가 어떤 청탁을 받은 것이라 의심했다. 안기부는 구상진이 피의자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외부 청탁 및 압력이 작용했는지 여부는 물론이고 “재직 시 취급사건 위요한 비위사실 또는 이권개입 및 청탁 등 직권 남용 사실”에다가 “기타 여자관계 등 취약자료 수집”까지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구상진 신원처리조정>이라는 7월15일자 보고서를 보면 안기부는 구상진에 관해 내무부에 “해외여행 및 이주 신원조사 시 당부에 통보”할 것을 요청한 데 이어 외무부에 “여권발급 및 기재사항 변경 신청”, “1981년 7월9일자로 구상진의 해외여행 통제”를 의뢰했다. 출국금지까지 시킨 것이다. 안기부 내에서는 비리사실을 조사해 구상진을 구속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사태가 거기까지 미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구상진의 집안 배경 때문일 것이다. 구상진의 이종사촌 형이 당시 대검 차장인 배명인(뒤에 법무장관, 안기부장 역임)과 하나회 핵심인 예비역 육군소장으로 민정당 국회의원인 배명국 형제였다. 이런 막강한 배경이 있었기에 구상진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안기부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내란죄를 뒤집어쓰고, 검찰에서 우여곡절 끝에 정형근에 의해 ‘허위’ 조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기소된 장신환 등은 1심에서 내란죄 유죄판결을 받았다. 서울형사지법 합의13부(재판장 신성택, 배석 전효숙, 유승정)는 판결문에서 검사의 논고가 “논리적 비약은 있으나 국가이익을 위하여 논고일체를 승인키로 한다”고 했다. 구상진은 뒤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심 판결에 대해 “법원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법적으로 당연한 일을 한다는 게 나 혼자 절벽을 들이받은 꼴이랄까? 나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건 아닌가 싶더라”고 회고했다. 2심은 다른 공소사실은 여전히 유죄판결을 내렸지만, 내란죄만큼은 무죄로 했다. 구상진이 갑자기 사표를 내고 사라지자 공안부장 김경회와 함께 구상진 검사를 찾아나섰던 임휘윤은 1년 뒤 송씨 일가 사건을 처리하면서 안기부에 일부 피의자의 불기소 처분을 건의했다가 안기부에서 불구속 기소하자는 의견을 밝히자 군소리 없이 바로 안기부 의견대로 이들을 불구속 기소했다.

1964년의 인혁당 사건에 대한 항명파동은 공안부 검사들이 집단적으로 했지만, 1981년 이 황당한 내란죄 적용에 대한 반발은 구상진 검사 개인에 그쳤고, 그의 행동은 공안부장 김경회에 의해 엉뚱하고 감상적인 돌출행동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7년의 세월, 검찰은 그만큼 변해버린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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