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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인민혁명당’ 41명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64년 9월10일 <동아일보>는 인혁당 사건 담당검사인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전원이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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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법무참모 출신 신직수 검찰총장
서울지검 공안부 집단사표 반발도 무시
중앙정보부 송치의견 그대로 베껴 기소
검찰 수뇌부 ‘정치 권력의 시녀’ 시대로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7. 인혁당 사건과 공안검사들의 항명파동(상)
꼿꼿했던 검찰이…
최근 정치검찰 논란이 뜨겁다. 이 연재는 중정-안기부가 사법부에 가한 압력을 주로 다루었지만, 검찰에 대한 압력 역시 중요한 사례 몇 건은 꼭 다뤄야 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처럼 검찰이 신뢰를 잃고 조롱과 야유의 대상이 된 나라는 없다.
대한민국 검찰이 처음부터 저 지경은 아니었다. 초대 서울지검장 최대교는 이승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현직 상공장관 임영신을 독직 혐의로 기소했다. 2대 검찰총장 김익진은 이승만의 부당한 압력에 고분고분 응하지 않다가 서울고검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서울지검장 이태희는 이승만을 상대로 이 말도 안 되는 인사에 대해 인사처분 무효확인소송을 냈다가 부산지검장으로 좌천되었다. 1960년 4월혁명 뒤 이태희가 검찰총장으로, 최대교가 서울고검장으로 복귀해 검찰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넘어가던 1963년 12월, 박정희는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인 36살의 중앙정보부 차장 신직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신직수의 동기들은 잘해야 부장검사에 올랐을 때였다. 신직수는 무려 7년간 검찰총장으로 자리에 있었는데, 그의 재임 기간은 검찰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시기였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었다.
공안검사들의 양심적 기소 거부
1964년 9월10일 각 신문은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과 김병리, 장원찬 등 인혁당 사건 담당검사 3명이 상부의 기소 강행 방침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항명파동’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우리의 공안부 네 검사는 보안법 관계 사실에 대하여는 추호의 용서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반공의식이 넘치는 공안검사들이 중정이 야심만만하게 발표한 대규모 조직사건의 기소를 집단적으로 거부하고 나섰을까?
19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중정은 구속 22명, 불구속 12명, 미체포 13명 등 모두 47명의 피의자를 서울지검으로 송치했다. 피의사실의 핵심은 이들이 남파간첩 김모(최초발표문에는 김영춘, 송치의견서에는 김모)의 지령에 의해 반국가단체 인민혁명당을 창당해,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을 통해 ‘학생운동과 배후의 빨갱이’라는 도식을 처음 선보인 군사정권은 위기상황이면 이 카드를 늘 빼들었다.
방대한 기록을 넘겨받은 공안검사들은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수사는 난관에 봉착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중정에서의 진술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공소제기를 할 수 없지만, 중정이 떠들썩하게 발표한 사건을 기소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용훈 부장검사는 “이토록 중대한 사건을 증거도 없이, 또 검찰에 송치도 하기 전에 전 국민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발표부터 해버린 중앙정보부가 원망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공정한 수사, 부당한 압력
이용훈은 서울지검장 서주연에게 기소하기 어렵다는 것이 공안부 의견이라고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서주연은 기소도 못하면 대대적으로 발표한 정부의 위신이 뭐가 되느냐며 “어떻게든지 해보아야 할 것 아니오?”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용훈도 공안부 검사 네 명이 “국가안보적 견지에서 사건 수사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전심전력을 다하여 수사”했는데, “어떻게든지 해보라는 말씀은 증거가 없어도 기소하라는 말씀”이냐고 따졌다. 이용훈이 지검장이 검찰총장에게 보고할 수 없다면 자신이 직접 보고하겠다고 하자, 서주연은 애원조로 다시 어떻게든 해보라고 당부했다. 구속 만기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8월31일 이용훈은 검찰총장 신직수에게 “공소제기를 하여도 유죄를 받을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수사 결과를 보고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직수는 몇 달 전까지 중앙정보부에 차장으로 있던 몸이었다.
다음날 그는 법무부에서 장관 민복기, 차관 권오병, 담당 국장, 대검 차장, 서울지검장 등 고위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다시 한 번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권오병이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정보부에서 받아낸 피의자들의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요? 정보부에서 자백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공소제기를 해도 되지 않겠소?”라고 강하게 말했다. 이용훈도 흥분해 “차관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차관님께서는 대학에서 형사소송법을 강의하시면서 학생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가르치십니까?”라고 받아쳤다.
기소하든지 사표 쓰든지
법무부에서 돌아온 서울지검장 서주연은 다시 여운상 차장과 이용훈과 공안부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 등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이용훈에 따르면 서주연은 “빨갱이 사건은 일반 사건과는 다르게 취급해야 하는 것이오. 이 사건에 대한 공소제기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절대적인 명령이므로 당신들은 기소를 하든지, 아니면 옷을 벗고 물러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시오. 기소를 해서 무죄가 되더라도 검사들에겐 책임을 안 지운다는데 왜들 그러는 거요? 여러분들이 기소를 안 한다면 나는 검사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어요. 당신들도 사표를 써가지고 있어요!”라고 발언했다. 이용훈이 “이런 심한 말은 내 평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공안부의 막내인 장원찬 검사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용훈과 김병리도 흥분해서 모두 사표를 쓰겠다고 큰 목소리로 말하고 검사장실을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한다.
다음날 검찰총장과 검사장이 이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설득했고, 수사팀 내에서는 최대현이 중정에서 제시한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라 반공법 위반으로 혐의를 바꿔 기소하자고 제안했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검사장은 상부의 명령이라며 구속 만기일 이틀 전인 9월3일까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조건 기소하라는 최후통보 명령을 내렸다. 공안검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검사장은 “당신네들이 정 기소를 안 하겠다면 검사장이나 차장 이름으로 기소하겠으니 기소장이라도 작성해 달라”고 사정했으나,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등은 끝내 사표를 제출했다. 원래 공안부 전원이 사표를 내기로 했지만, 김형욱이 “나의 심복처럼 움직이던” 검사라고 회고록에 쓴 최대현은 마지막 순간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최대현은 김형욱으로부터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재판 결과야 어떻게 나든 간에 단 한 명이라도 기소는 해야 할 것 아니오! 중앙정보부를 어떻게 보는 거요?”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대검은 서울지검 차장검사 여운상의 명의로 기소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여운상 역시 기소장 작성과 서명을 거부했다. 여운상은 인혁당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차장보로 근무했었기에, 그마저 서명을 거부한 것은 정보부로서는 뼈아픈 일이었다. 검찰 고위층은 당황해 서울지검의 다른 검사들에게 기소장을 작성하라고 부탁했으나,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면 검사장님이나 차장검사님이 직접 기소하시죠”라며 빈정거릴 뿐이었다. 서주연은 그날 밤 당직인 정명래를 시켜 급히 공소장을 작성하게 했다. 피의자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정명래는 중정의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껴 공소장을 완성했으니,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참 편하게 적용한 것이다. 김형욱은 어려운 상황에서 인혁당 관계자를 기소한 정명래를 중앙정보부 5국 부국장으로 기용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김형욱은 “혼란한 상황일수록 부하를 채용하는 기준이 능력 위주에서 충성심 위주로 바꿔진다”고 덧붙였다.
항명파동으로 번져
검찰은 인혁당 관련자들을 천신만고 끝에 구속 만기일 저녁에 간신히 기소했다. 그러나 이용훈, 장원찬, 김병리 검사가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각 신문의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되면서 국회에서 논란이 됐다. 1964년 9월9일 국회는 법무부 장관 민복기를 불러 “인혁당 사건은 6·3계엄사태를 합리화하기 위한 조작이 아니냐”, “항간에서는 이번 인민혁명당 사건을 정치적인 쇼라 부른다”, “애국적인 학생데모의 주동자들을 솔직히 말해서 때려잡기 위해서 이 악랄한 사건이 인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여론이 구구”하다면서 기소 경위를 추궁했다. 민복기는 “사건이 중대하고 여러 가지 의심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라고 해서 기소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렇게 파장이 커지고 국회에서 중앙정보부 폐지론까지 제기되자 정보부장 김형욱은 사건의 재수사를 지시했다. 재수사는 과거 중앙정보부에 파견근무를 하는 동안 김형욱 밑에서 일하기도 했던 한옥신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맡았다. 한옥신은 중정, 검찰 관계자들과 함께 수차례에 걸쳐 합동회의를 하기도 했지만, 중앙정보부가 요구하는 대로 기소하기는 어렵다고 난색을 보였다. 결국 사건이 기소된 지 1개월 11일 만인 1964년 10월16일, 검찰은 26명 중 14명에 대해서는 공소를 취하해 석방하고 12명은 애초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구성죄를 적용한 공소장을 변경해, 반공법 제4조 1항(찬양·고무) 위반 혐의로 재기소하기에 이른다. 검찰 스스로 처음 기소가 무리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다. 법무장관 민복기는 사표를 내고 근 한 달간 출근도 하지 않던 이용훈을 불러 이제 모든 문제가 풀렸으니 그대로 그 자리에서 전과 같이 일해달라고 위로했다. 이용훈도 장관의 따뜻한 말에 그동안 쌓이고 쌓인 울분과 억울함이 풀리며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고 한다. 이용훈은 그길로 서울지검으로 출근했지만, 새로운 인사파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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