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2월24일 강주영양 유괴살인사건 선고공판이 열리고 있다. 이 사건의 공범으로 구속된 3명이 무죄를 받았다. 이들은 당시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폭로했고,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신체검증을 실시해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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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고문 자백의혹 부산유괴사건
이례적 신체검증 뒤 무죄선고 하자
안기부 “돌출판결 잦다” 악의적 폄하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6. ‘돌출판결’과 안기부 보고서 이례적인 신체검증과 무죄 1994년 10월 부산에서 8살 난 강주영양이 유괴살해되었다. 부산 북부경찰서는 강양의 사촌언니 이아무개양과 친구 3명 등 4명을 범인으로 구속하면서 이 사건을 신세대들이 지존파(부자들을 증오한다며 연쇄살인)를 모방해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경찰의 발표가 있자, 공범으로 지목된 3명의 가족과 친구들이 경찰서를 찾아가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지존파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에 발생한 유괴살인사건의 범인을 신속하게 검거한 것을 치하하는 전화를 해오자, 포상에 눈이 어두워진 경찰은 수사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검찰도 한때 경찰 수사를 의심했지만, 구속기간까지 연장해가며 알리바이 주장을 깨기 위한 보강수사를 벌여 경찰이 발표한 4명 모두를 진범으로 단정해 기소했다. 11월21일 열린 첫 공판에서 피고인 중 이양을 제외한 3명이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했다고 재판부(부산지법 형사3부, 재판장 박태범)에 호소했다. 검찰은 피고인 중 남성 두 명에 대해 “옷을 완전히 벗기고 신체검사를 실시했으나 아무런 상처가 없다”는 부산구치소의 검사 결과를 제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두 피고인에 대한 신체검증을 실시했다. 사건 발생 40여일이 지났지만, 이들의 몸에는 고문의 상처가 뚜렷했다. 변호인과 검찰은 무려 98명의 증인을 내세웠는데, 증인 중에는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던 중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맞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1995년 2월24일 재판부는 무기징역이 구형된 사촌언니 이양에게는 “언니, 언니 하며 따르던 사촌동생을 유괴살해한 것은 인륜에 반하는 죄로 용서할 수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지만, 다른 3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안기부, 공명심 따른 돌출판결이라 비난 이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컸다. 이미 부산변협 인권위원회가 진상조사소위(위원장 문재인)의 조사를 바탕으로 고문 경찰 14명을 대검에 고발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도 불가피해졌다. 언론의 관심이 고조된 이날 판결에서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법정에서의 사진촬영을 허용했고, 또 판결이 “재판부 3인이 일치된 의견을 보인 것은 아니며 토론을 거친 투표 결과 2 대 1이 나왔다”고 합의 과정을 공개했다.
안기부는 이 사건에 대해 3월8일자로 뒤늦게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법원, 박태범 부장판사 경고 문제로 고심>이란 제목의 보고서는 앞부분에서 “1. 대법원은 o 박태범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지난 2.25 강주영 양 유괴살해 사건 관련 ○○○(24세) 등 3명에 대한 무죄를 선고함에 있어 o ‘합의 비공개’ 원칙을 무시하고, 사진촬영 허용은 물론 ‘2:1로 합의가 어려웠다’는 등 합의 과정을 공개하여 물의를 빚은 데 대해 o ‘합의의 비밀은 재판의 독립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어떠한 이유든 공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내부 방침을 결정하고 박태범 판사에 대한 경고 조치를 검토 중인바 2. 이에 대해 박태범 부장판사는 o ‘합의 공개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동 사건의 주심판사인 황규순(35세, 사시 32회, 경남 고성) 판사가 자신은 동인들에 대한 무죄 선고에 서명할 수 없다고 주장, 선고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o 주심판사 주장을 언론에 공개하는 조건으로 서명을 받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부득이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고 있어 고심 중이라 함”이라고 쓰고 있다. 합의과정 공개 논란 그런데 이 보고서는 정보보고의 신속성이란 면에서는 완전 뒷북을 치고 있었다. 3월8일자인 이 보고서에서 대법원은 “박 판사에 대한 경고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이미 대법원은 7일에 전국법원에 공문을 보내 “법원조직법 65조는 ‘심판의 합의는 공개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합의의 비밀은 재판의 독립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인 만큼 사건이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합의 내용을 공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사실은 7일자 주요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럼에도 안기부가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3. 이와 관련, 법조계에서는 o그동안 지나친 돌출판결로 물의를 빚어왔던 박 판사가 자신의 공명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판사로서의 존엄성을 실추시켰다고 박 판사를 비난하고 있다 함”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안기부의 바람과는 달리 법조계나 언론은 합의 공개에 대해 꼭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국민일보>는 박 판사가 “재판부의 합의 내용을 공개하고 법정 촬영을 허용한 것”은 “사법사상 획기적인 조치”라며 이를 두고 대법원이 “발끈”한 것에 대해 “재야 법조계에서는 이것이 법원의 구태의연함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고 전했다. <중앙일보>도 합의 과정 공개는 “판결 결과가 최대한 신중한 합의를 거쳐 도달했다는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경우 평결 결과와 소수의견은 공개되고 있다. 소신판결인가, 돌출판결인가? 안기부 보고서가 악의적으로 비난한 박태범 판사의 돌출판결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사실 80, 90년대에 활동한 법관 중 박 판사만큼 시국사건과 일반사건 양쪽 모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법관도 없다. 박 판사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6월항쟁 직전인 1987년 6월3일 ‘보도지침’을 폭로한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이 적용된 김주언, 김태홍, 신홍범 등 3명에게 국가보안법 일부 무죄를 포함하여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로 석방한 때였다. 이때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집행유예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재판장의 ‘의연한 진행’이 돋보였다고 평가했지만, 이 재판도 약간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김정남의 회고록에 따르면, 처음에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신청한 4대 일간지 편집국장과 간부들, 문공부의 홍보정책실장 등 23명을 모두 증인으로 채택하는 등 “공정한 재판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부가 곧 증인채택 조치를 취소하는 등 ‘무엇인가 석연찮은 일’이 계속되었다. 판결 당일 박태범 판사는 “검찰, 변호인, 피고인 모두가 재판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진행되도록 노력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본 재판장 역시 최선을 다했으나 능력이 부족한 탓에 모든 재판절차를 뜻대로 진행하지는 못했다”며 심경을 토로한 뒤,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20여명의 취재기자를 포함해 전현직 언론인이 대부분이었던 방청석에서는 집행유예와 선고유예 판결이 나오자 “퇴정하려는 재판장을 향해 요란스럽지 않은, 그러나 힘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고무신이 날고, 야유와 소란이 상례화가 된 시국사건 재판도 “법관의 공정하고 성의 있는 자세에 따라 전혀 모습을 달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박태범 판사는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특히 엄격했다. 그는 1987년 1월 치료기구 납품 부정사건과 관련해 약식기소된 의대 교수 등을 정식재판에 회부했고, 1995년 2월에는 대출비리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된 조흥은행 간부 4명을 법정구속했다. 그는 부산지법에 있을 당시에 자식을 성폭행하는 등의 반인륜범죄, 공무원 범죄나 화이트칼라 범죄 등에 대해서는 구형량의 2~5배나 되는 중형을 선고했고, 검찰이 불구속 기소나 약식기소한 공무원이나 지도층 인사를 석 달 동안 30여건이나 정식재판에 회부했다. 이 때문에 구치소의 피고인들 중 죄질이 나쁜 자는 제발 박태범 판사에게 걸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강주영양 사건 이외에도 고문으로 억울하게 살인 혐의를 쓰고 사형이 구형된 서보원씨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때문에 <중앙일보>는 1994년 12월18일치에 “요즘 부산시민들 사이에는 ‘호랑이 판사’로 화제를 모으는 법관이 있다”며 한 면을 할애해 인터뷰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의 이런 “소신판결”에 대해 언론은 “재판부의 추상같은 엄정성을 밝힌 것으로 오랫동안 재판부가 정권에 끌려다녔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법원의 권위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세계일보>)고 소개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동아일보>)한다고 덧붙였다. 국가보안법 위헌심판 제청이 진짜 이유 특정 법관이 ‘돌출판결’로 주위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든 말든 그것은 안기부의 직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당시 안기부가 진짜 주목한 박 판사의 ‘돌출’ 행동은 이 보고서가 작성되기 채 두 달이 되기 전인 1995년 1월17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국제사회주의자들(IS) 소속의 피고인 4명을 직권보석으로 풀어주면서 국가보안법 제7조 1, 3, 5항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한 결정일 것이다. 박 판사는 “주관적이고 모호한 표현으로 해석 기관의 자의에 따라 행위자 내심의 의사가 범죄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서구의 여러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세계화의 시대에는 참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헌제청에 대해 보수 언론들조차 “문제의 조항 7조는 이미 1990년 4월 헌법재판소로부터 사실상 위헌이라고 할 수 있는 ‘한정합헌’ 판정을 받은 규정”으로 “재판부의 위헌제청 결정에 대해 법학자들과 변호사들은 대체로 공감하는 입장”이라고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안기부는 1994년 1월의 안기부법 개정에 따라 수사권이 대폭 축소된 상황에서 이의 회복을 위해 전방위 노력을 계속했는데, 박 판사가 국가보안법 위헌 논란에 다시 불을 지른 것이다. 안기부의 박태범 판사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서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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