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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4.04 18:34 수정 : 2010.04.04 18:57

1985년 7월15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의 첫 공판은 80년대 최대의 법정소란이었다. 피고인들이 법정에 들어서자 일부 방청객들은 박수를 쳤고, 피고인들은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우리는 재판을 거부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사진은 당시 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체포된 대학생들. <한겨레> 자료사진

법정서 야유·구호·노래 등 일상화
담당재판부가 사건재배당 간청도
‘미 문화원 사건’ 피고인 재판거부에
전두환, 당시 김석휘 법무장관 경질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5. 법정소란

재판거부로 법무장관과 서울대 총장 전격 경질

사법부가 정권의 압력으로 제구실을 못함에 따라 법원의 권위는 크게 실추됐다. 1985년부터는 피고인들이 재판을 거부하고, 피고인과 방청객들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법관에게 야유를 보내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사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학생운동이 이념적으로 급진화된 것은 법정소란 사태를 불러오는 주된 요인이었다. 민정당사 점거사건이나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과 같은 대형 사건에서 수십 명이 한꺼번에 재판을 받게 되자, 학생들은 너나없이 법정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며 재판을 거부했다.

1985년 7월15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의 첫 공판(재판장 이재훈, 배석 서명수, 강일원)은 80년대 최대의 법정소란이었다. 피고인들이 법정에 들어서자 일부 방청객들은 박수를 쳤고, 피고인들은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우리는 재판을 거부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변호인들도 피고인들을 제대로 접견하지 못했다면서 방어권 행사를 위해 공판에 응할 수 없다고 버텼다. 첫 공판은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신문도 하지 못하고 끝났다.

미문화원 사건 법정소란의 불똥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마침 법무부 장관 김석휘는 외국출장을 앞두고 청와대에 가 출국신고를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지나가는 말로 “미문화원 사건 공판은 잘 진행되느냐?”고 물었고, 상황보고를 받지 못한 김석휘는 특이사항이 없다고 답변한 뒤 출장격려금까지 받고 청와대를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후에 법정소란 상황을 보고받은 전두환이 격분해 다음날 김석휘를 전격 해임했다. 한편, 구속 학생에 대하여 무기정학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내린 서울대 총장 이현재도 전격 경질되었다.


법무장관의 경질에는 미문화원 사건을 둘러싼 검찰과 안기부의 갈등이 작용했다. 안기부는 학생들이 사용한 ‘민중’이란 용어에 대해 “특정 계층의 연합 개념으로 이른바 계급투쟁의 전제 개념에 해당되기 때문에 관련자들 모두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검찰은 주동자인 함운경에게만 이를 적용해 기소했다는 것이다. 또 김석휘는 국회에서 삼민투가 사용한 민중이라는 용어가 좌경적 계급용어인지 감상적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 계속 검토해야 한다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강경한 안기부가 온건한 법무장관을 못마땅해 하던 차에 법정소란이 발생하자 전두환이 안기부를 확실히 밀어준 것이다.

안기부의 공판 대책 보고

법정소란이 법무장관의 경질로까지 비화하자 법원과 안기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안기부의 <농성사건 공판 대책보고>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법원은 민정당 난입농성 사건 공판에 이어 다시 “극렬한 법정 내 소란”이 발생하자 이를 “향후 법정의 존엄성과 질서 유지의 분수령적 계기”라고 판단하고, “대법원장의 진두지휘 하에 법원행정처장, 대법원 비서실장, 서울형사지법원장,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등이 수시 대책회의”를 했다. 법원은 “법정은 법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기본 방침 아래 “어떠한 경우에도 법정의 권위와 질서 유지를 위해, 자체적으로 강경 대처, 원만한 공판을 진행할 방침”을 세우고 “가급적 공판 진행절차, 조치계획 등은 법원 및 재판부에 맡겨달라는 입장”을 취했다. 안기부는 서울형사법원장이 “상부에 1회 공판 중간보고 시 피고인 및 방청객 등 계속 소란 자행 시는 부득이 경찰권 개입요청도 불사하겠다는 소신”을 개진했다고 덧붙였다.

안기부 보고서는 이어 이재훈 재판장에 대해 자세한 신원사항과 함께 ‘법조계 평판’이란 항목으로 “온순단정, 국가관 확고, 방침 결정 시 강력하게 추진하는 성격 소유자”라고 기술했다. 보고서는 “금번 재판에 대한 자세 및 태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미문화원 농성사건 공판이야말로 향후 법원의 권위가 법정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느냐의 시금석 재판으로 인식

△법정경찰권 소송지휘권의 소신 있는 행사로 강력한 법정질서 유지 표명

△1회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 및 방청인의 소요, 소란으로 휴정 후, 형사지법원장, 수석부장판사에게 강력대처 방침을 개진하였으나 오히려 상사들이 금회 공판만은 인내하도록 만류하는 입장이었다 함

또한 2회 공판기일을 애초 방침과 달리 2주 후로 지정한 것에 이렇게 분석했다.

△피고인 변호인단이 피고인과의 충분한 접견 기회가 없어 변론 준비를 못하였다고 주장, 연기 신청을 해옴에 따라

△일단 변호인 등의 일부 주장을 받아들여 향후 강경대처방침 명분을 세우기 위한 조치이나

△앞으로는 애초 방침대로 매주 월요일 공판 진행, 8월 중으로 1심 공판 종결 복안임

재판장의 유례없는 훈계문

이재훈이 1차 공판에서 벌어진 법정소란으로 휴정했을 때 법원장 및 형사수석에게 강력대처 방침을 개진했던 사실을 확인한 안기부는 “재판부의 성향 및 자세는 전혀 문제점 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재훈은 법정소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방청객을 제한하고, 피고인을 분리심리하며 주 3회씩 공판을 진행해 빠른 시일 내에 재판절차를 끝내기로 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했다. 이재훈은 재판 진행과정 중 학생들이 ‘광주학살’을 자주 언급하자 이를 ‘광주사태’라 바꾸도록 훈시했는데, 변호인 중 한명이 앞으로 나와 손짓을 해가며 강력히 항의하자 어디다 삿대질이냐며 퇴정을 명했다. 7회 공판에서는 재판부의 잦은 제지에 피고인들이 항의하다가 12명 중 9명이 퇴정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재훈은 변호인의 반대 신문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사실심리의 종결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변호인들은 재판부가 실질적인 공개재판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재판부 기피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2일의 선고법정에서 이재훈은 극히 이례적으로 판결문 이외에 장문의 훈계문을 낭독했다. 훈계문은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언을 깬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 훈계문에 대해 <조선일보>조차 “자기 주관 및 사상을 지나치게 공표함으로써 이 사건을 대하는 재판부의 선입견과 예단을 스스로 드러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평했다. 재판이 끝난 뒤 안기부는 ‘미문화원 담당판사 격려 방안’을 모색했다. 안기부는 재판장과 배석 판사 등 3인의 판사에 대한 격려방안으로 해외여행 또는 격려금 지원 등을 검토했다. 꼭 이 격려방안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재훈 부장판사는 재판 종료 약 1년 뒤인 1986년 12월3일부터 23일까지 제도 시찰을 명목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꾸지람 듣는 법관들

<중앙일보>는 거리시위를 하다 구속 기소된 한 여학생이 “그 어렵다는 고시에 합격하시고 법대 위에 높게 앉아계신 판검사님들은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라며 “하루속히 참회하고 민주화 대열에 동참하라”라고 판사와 검사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광경을 보도했다. 주객이 뒤바뀐 법정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고 한다. 이 학생은 매우 점잖은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재판장에게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어떤 학생들은 분리대를 넘어 법대를 향해 돌진하기까지 했다. 방청객들도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에 동참했다. 부천서 사건 공판 때는 구속 학생의 어머니가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장에게 던졌다가 법정모욕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도 법정소란으로 구속되는 등 법정모욕으로 실형을 선고받거나 감치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만 갔다.

재판부의 재판 기피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탓에 법정소란은 민주화 이후 오히려 더 거칠게 일었다. 끊임없는 법정소란은 법관들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 주었다. 1988년 10월 서울형사지법 김종식 부장판사는 서울대 국사학과생 김학규의 공문서 변조사건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기 어렵다며 사건을 재배당할 것을 요구했다. 안기부의 <법조계 동향>이라는 1988년 10월24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9월21일 개최된 1차 공판에서 김학규는 법정에서 공판기일 통지서가 하루 전에 도착되어 가족이나 친구들이 방청치 못했다며 “이런 재판이 어디 있느냐”고 소란을 피웠다. 재판장인 김종식 부장판사는 이에 당황해 재판 진행을 중단하고 차기 공판기일을 추후에 지정하기로 했다. 김종식 부장판사는 정상학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찾아가 “동 사건 피고인으로부터 모욕당하는 등 계속 재판 진행하기 곤란하다”며 사건을 재배당해 줄 것을 간청했다. 정상학 수석부장판사는 “동 사건을 다른 합의부에 재배당할 수 없어 자신이 담당키로” 했다.

유신 이후 시국사건에서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담당 재판부를 기피하는 사례는 자주 있었지만, 재판부가 피고인을 회피해 사건이 재배당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안기부의 보고서는 “동 사건 담당 재판부 교체와 관련 일부 법관 및 일반 직원들 간”에 형성된 여론이라면서 “설령 관련 피고인들이 재판부를 골탕먹이려고 하더라도 재판장이 장악, 재판을 진행하여야 함에도 최근 일부 판사들이 민주화 바람에 편승, 피고인들에게 끌려가며 재판을 진행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종식 부장판사가 그 본보기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안기부는 “앞으로 어렵고 복잡한 사건이 계속 기소될 텐데 그렇게 허약하고 능력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재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그런 사건을 감내할 자신이 없으면 사표를 내야 마땅하지 않으냐는 등 비난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종식 부장판사는 다음 인사인 1990년에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로 전보됐기 때문에 당시에 바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지만, 1991년 8월 의원면직 형태로 법복을 벗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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