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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14 17:51 수정 : 2010.03.14 18:51

1983년 5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오송회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9명의 피고인 중 6명이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1심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25년 뒤 2008년 11월25일 광주고등법원은 오송회 사건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진은 무죄 선고를 받고 만세를 외치는 ‘오송회 사건’ 관련자들. 광주/연합뉴스

기소된 9명 중 6명 선고유예로 석방
이보환 재판장 그뒤 형사사건 배제
전두환 질책에 항소심서 다시 구속
26년뒤 재심서 무죄…결국 법원 사과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2 암흑시대의 빛나는 판결들 (중)

법대 위에서 한 사죄

1983년 5월 전주지방법원(재판장 부장판사 이보환, 배석 김능환, 임종윤)의 한 법정에서는 뜻밖의 판결이 나왔다. 이른바 ‘오송회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9명의 피고인 중 6명이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것이다.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1심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당시 오송회 관련자들의 구명을 위해 애썼던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군사정권 시대에 이렇듯 정의롭고 용기 있는 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놀랐고 또 경의를 표했다”고 회고했다.

2008년 11월25일 광주고등법원 형사1부(재판장 이한주 부장판사)는 오송회 사건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한주 부장판사는 판결을 마치고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여러분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며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또 피고인들 앞에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겠다”며 “법대(法臺) 위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소신으로 판사직에 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무죄 판결에 피고인과 가족들이 만세를 불러 법정의 경위들이 이를 제지하자 재판장은 “말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선고유예는 유죄이기에 무죄와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더구나 이광웅(4년), 박정석(3년), 전성원(1년) 등에게는 1심에서도 적지 않은 형이 선고되었다. 피고인들은 억울했다. 2심에 가면 징역을 받은 사람은 형이 깎이고, 선고유예를 받은 사람은 혹시 무죄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피고인들은 항소했다. 두 달 후 광주고법에서 항소심 판결이 있자, 김정남의 표현에 의하면 법정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주범’ 이광웅은 7년, 박정석 5년, 전성원 3년으로 형량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선고유예를 받았던 6명이 모두 법정구속된 것이다. 가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고, 문규현 신부는 의자 뒤에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1심보다 2심에서 형량이 낮아지는 것이 관례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것일까?


빨갱이를 무죄로 하는 것은 안 된다

당시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있었던 박철언에 따르면 1심 판결이 있자, “안기부와 검찰은 물론이거니와 법원도 발칵 뒤집어졌다”고 한다. 대법원장 유태흥은 “전주지법원장과 담당 이보환 부장판사를 즉각 서울로 호출”했고, “이 부장판사는 옷 벗을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보환은 박철언과 서울법대 동기였는데, 박철언은 “소신판결을 했다고 중도에 의원면직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손을 썼다. 그는 “전주지법원장과 이보환 부장판사가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유태흥 대법원장을 찾아가” “대통령의 노기도 상당히 수그러들었으니 이 부장 문제를 이쯤에서 조용히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며 대법원장의 걱정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덕분에 이보환에 대한 징계 분위기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철언의 표현을 빌리면 “일이 조금 어색하게 된 것”은 청와대에서 7월5일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들을 만찬에 초청했을 때였다. 여기서 전두환이 “사회불안, 정치불안 요소에는 과감히 대처하겠다면서 ‘오송회 사건’을 예로 들며 ‘빨갱이를 무죄로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철언도 유태흥도 모두 머쓱해져 서로 쳐다보았는데, 다행히 이보환은 별다른 불이익을 입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오송회 사건의 항소심은 이 만찬이 있고 약 3주 후인 7월28일에 열렸다.

반국가단체 만들기 ‘참 쉽죠잉’

오송회 사건이란 그 시절의 공안사건이 대부분 그렇듯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다. 우선 명칭부터가 그랬다. 전북도경에서는 처음에 사건 핵심 5명을 이리 남성고 출신으로 알고 ‘오성회’ 사건으로 불렀는데, 그중 한 명이 다른 학교 출신이라 이름을 부랴부랴 ‘오송회’로 바꿨다. ‘오송’이란 말도 다섯 그루 소나무라고도 하고, 소나무 밑에서 교사 5명이 모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선생님들이 출옥한 뒤 누군가가 오송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오송은 그들이 즐겨 찾던 군산 제일고 뒷산이 아니라 사건을 조작한 자들의 흑심 속에 있었던 것이다. 백일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걸리면 아기 이름을 따 ‘아람회’가 되고, 금강에 놀러 갔던 사람들이 걸리면 ‘금강회’가 되던 시절이었다. 반국가단체란 원래 이북을 적국으로 규정할 수 없기에 만들어진 개념인데, 이제 2인 이상이면 ‘단체’가 되니, 반국가단체 만들기 ‘참 쉽죠잉’인 세상이 온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4·19는 지워져 갔다. 교사였던 사건 관련자들은 자기들끼리라도 위령제를 지내자며 뒷산에 올라갔다. 그들은 22년 전의 4·19와 2년 전의 광주를 떠올리며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정의로웠는가”라고 서로 물었고, “일상적 삶과 가족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부끄럽다”고 술잔을 찧었다. 국어교사 이광웅은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의 필사본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제자가 그 복사본을 빌려갔다가 버스에 두고 내렸다. 신고정신 투철한 안내양은 이를 경찰에 갖고 갔고, 경찰은 문학소양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어느 교수에게 감정을 맡겼다. 그 교수라는 자는 해방 후 오장환이 인민이 주인이 되어 새 나라를 만들자고 쓴 시를 고정간첩이 쓴 것이 분명하다고 감정했다. 교복을 입은 제자들까지 70여 명이 줄줄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며 4·19위령제는 반국가단체 ‘오송회’의 결성식으로 둔갑했다. 처음에는 제발 살려달라고 빌던 선생님들은 제발 죽여 달라고 빌 만큼 모진 고문을 40여일간 당하고 수사관들이 부르는 대로 ‘자백’했다.

목숨을 걸고

오송회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주범’ 이광웅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사건으로 모진 마음고생을 해야 했던 그는 이미 1992년 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에게 한 주전자씩 물 먹이며, 그의 몸을 전기로 지지며 만들어 낸 ‘범죄사실’들이 ‘공범’들을 감옥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 터무니없는 조작사건으로 그가 재직하던 학교의 교장과 교감이 파면당하고, 교육감 이하 전북교위 간부들까지 줄줄이 징계를 당했다니 마음고생이 오죽했을까?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무시무시한 대공분실에 불려와 수사를 받고, 검찰 쪽 증인으로까지 법정에 서야 했던 제자들에 대한 미안함은 암이 되어 그의 몸을 갉아먹었다. 이 연재물의 데스크를 보는 김의겸 <한겨레> 문화부장도 오송회 선생님들의 제자로 이 사건에 대한 가슴시린 칼럼을 썼다.(‘오송회 교사를 ‘고발’한 제자들’, <한겨레> 2008년 12월 1일치)

이광웅이 온몸으로 쓴 시의 제목이 ‘목숨을 걸고’이다. 그 험한 시대는 ‘들잠’이란 별명을 가진, 사람 좋은 이광웅에게 목숨을 걸라고 했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아직도 이런 판사가 있습니까

이보환은 친구를 잘 둔 덕에 화를 면했지만, 여러 해 동안 형사사건을 맡지 못했다. 오송회 사건 1심 판결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지만, 무고한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결이기도 했다. 1심 판결은 1심에서 이만큼 해 놓으면 고법과 대법에서 알아서 마무리해 줄 것을 기대한, 당시 말로 ‘고민 많이 한 판결’이었는지 모른다.

2심 재판장이었던 이재화는 1년 만에 서울고법으로 영전한 뒤, 대전지법원장, 서울가정법원장, 대구고법원장을 거쳐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지냈다. 1심의 배석이었던 김능환 판사가 대법관이 될 때 인사청문회에서 이종걸 의원은 주심판사나 재판장이 이 사건으로 불이익을 입지는 않았는가 물었다. 김능환은 자신이나 주심판사는 특별한 불이익을 입지는 않았지만, 이보환 부장판사는 “객관적으로 볼 때 불이익을 입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보환이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승진한 것을 보면 불이익을 입은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다그쳤다.

5공 시절 의미 있는 판결로 인사상의 불이익을 입은 법관의 대표적인 예가 부림사건 이호철(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가 바로 부산지법에서 진주지원으로 좌천된 서석구 판사이다. 당시 대법원장 유태흥이 부산지법원장 김달식을 불러 “아직도 그런 판사가 있느냐”고 호통을 친 일은 유명하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서석구는 곧 옷을 벗었고, 한때 대구경실련 대표를 지내는 등 시민운동에 몸담았으나, 요즘은 촛불시위에 나오면 일당 5만원, 유모차 끌고 나오면 10만원이라는 강연을 하고, 김대중 대통령 국장 및 현충원 안장 취소를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 엠비시 피디수첩과 강기갑 의원에 대한 판결로 사법부 문제가 시끄러워졌을 때에는 “사법부의 독립을 파괴하는 범죄를 저지른 대법원장과 좌파 판사들의 퇴진을 위한 국민저항을 강력히 호소”하기도 했다. 서석구는 젊은 날 자신의 양심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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