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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07 18:38 수정 : 2010.03.08 10:03

안기부가 조작한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18년간 복역했던 박동운씨가 1998년 8·15 특사 때 풀려나 인사를 하고 있다. 1981년 11월 박씨를 사형 판결했던 재판장은 석 달 뒤, 고문으로 자백한 고숙종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왼쪽 작은 사진은 당시 재판을 맡았던 김헌무 서울지법 부장판사. <한겨레> 자료사진

김헌무 판사, ‘윤노파’ 사건 살인 피의자에
수사기관의 고문을 문제삼아 첫 무죄 선고
반면 ‘진도간첩단’ 조작사건 주범엔 사형 판결
공안사건에도 증거능력 배척까진 긴시간 걸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1 암흑시대의 빛나는 판결들 (상)

공안사건과 일반 형사사건 사이의 거리

회한과 오욕의 암흑시대에도 아주 드물게 좋은 판결들이 있었다. 유신과 5공 시절에 사법부에 벼락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래도 사법부에서 가끔씩 정말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꼭 지적해야 할 사실은 오로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용기 있는 판결을 내린 법관의 대부분은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80년대에 가장 많은 소신판결을 내린 것으로 손꼽혔던 이회창 전 대법원판사도 판결과 관련하여 외부의 압력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렇기에 그 시절 정치권력이나 사법부 상층부의 눈치를 보느라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내린 판사들이 더 원망스러운 것이다. 이 당시 보석같이 빛나는 판결을 내린 법관들 중에는 지금은 아주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이런 판결들은 공안사건에서 뒤늦게나마 무죄판결이 나오는 길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공안사건과 일반 형사사건을 가릴 것 없이 만연되어 있었던 수사기관의 고문은 일반 형사사건에서부터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사법부가 수사기관의 고문을 문제 삼아 피고인에게 무죄를 내린 대표적인 예는 1981년 8월4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발생한 윤경화 노파 일가족 살해사건의 고숙종 피고인에 대해 1982년 2월1일 서울형사지방법원 제14부(재판장 김헌무 부장판사)가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고문이 없어지는 대장정이 시작되는 획기적인 판결이었다. 그런데 딱 석 달 전인 1981년 11월3일 김헌무 부장판사는 이른바 ‘진도 간첩단 사건’의 주범 박동운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바 있다.

박동운 사형과 고숙종 무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국정원과거사위의 조작의혹 간첩사건 조사 당시, 국정원 쪽 조사관이 초기 기록검토만으로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인정한 것은 바로 박동운 일가 간첩사건 딱 한 건이었다. 이 사건은 국정원과거사위에서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조작사건으로 진실규명되었고, 2009년 11월1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도 무죄를 받았다. 그만큼 엉성한 조작사건인데도 1심에서 사형판결이 떨어진 것이다.

1심의 내용은 황당했다. 안기부는 박동운이 자귀로 무전기 등 간첩행위의 자료를 파괴했다고 주장하면서, 날은 없어지고 자루만 남았다며 나무막대기 하나를 유력한 물증으로 제시했다. 박동운이 증거인멸죄로 기소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것을 증거로 사형을 내릴 수 있을까? 공판조서를 보아도 박동운 등 피고인들은 안기부에서 당한 고문의 상처가 남아 있다며 재판부에 신체감정을 신청하기도 했지만, 재판부는 뚜렷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했다. 재판부는 그야말로 바짓가랑이를 걷어 보이게 하지 않은 죄를 범한 것이다. 80년대 초반은 대단히 험한 때였지만, 송씨 일가 사건에서 보듯이 웬만한 간첩 사건에서 사형판결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김헌무 부장판사는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조작간첩 문제를 다루는 인권변호사나 활동가들은 박동운에 대한 사형판결에 대해 “뭐 이따위 판결이 다 있냐”고 입을 모았다.

윤경화 노파 일가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된 고숙종씨는 경찰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꼽추가 된 몸으로 법정에 섰다. 경찰과 검찰은 고숙종씨가 쇼를 하는 것이고, 원래 디스크를 앓아서 허리가 굽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고숙종씨가 당한 고문피해를 상세히 기술한 뒤, “피고인이 검찰에서 한 자백의 임의성은 인정되나 그 검찰에서의 자백은 현장의 객관적 상황과 모순”되고, “진술의 일관성이 없는 점 등에 비추어 진술에 신빙성이 없어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고숙종씨는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도 모두 무죄를 받았고, 고문피해에 대한 민사소송에서도 고문을 받은 사실이 인정되어 손해배상을 받았다.

자백의 임의성 인정되나, 신빙성 없어

고숙종씨가 무죄를 받은 데 이어 1982년 7월9일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부(재판장 양기준)는 여대생 박상은양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된 정재파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자백의 임의성은 인정하나 신빙성은 없다”고 판시했고,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검찰 쪽의 항소와 상고를 각각 기각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된 고숙종씨와 정재파씨에 대한 무죄판결에 대해 <법원사>는 “단순히 살인 혐의자에 대한 무죄선고라는 의미를 떠나 종래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는 수사관행에 쐐기를 박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고숙종씨나 정재파씨가 무죄판결을 받은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 두 사건에서 무죄판결의 근거가 된 논리가 공안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이 두 사건에서 피고인과 변호인 쪽의 대응 역시 남달랐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숙종씨의 경우 본인은 서울음대 출신이었고, 남편은 당시 검찰의 사무직 간부였다.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도 고문을 받아 살인범으로 몰린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 정도 배경이 있었기에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여 무죄판결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재파씨의 경우도 부친이 대기업 간부이고, 가까운 친척이 유력 언론사의 간부였기에 당시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변호인들이 접견만 40여차례, 현장조사만 6차례 하는 등 이 사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낳게 한 씁쓸한 측면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이들이 무죄판결을 받으며 확립되기 시작한 원칙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공안사범들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사족을 하나 단다면 정재파의 무죄를 끌어낸 변갑규, 윤태방, 나정욱 변호사는 당대 최고의 유능한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 덕에 요정 주인의 외화밀반출 사건을 맡았다가 3년간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본란 2009년 9월29일치 참조).

김헌무 판사의 야릇한 운명

박동운의 사형과 고숙종의 무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똑같이 고문에 의해 사건이 조작되었는데, 똑같은 재판장이 한 사건은 사형을, 한 사건은 무죄를 내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헌무 판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한 법관이었다. 그는 1980년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었을 때 부장판사의 신분으로 사회정화위원회에 파견되어 근무한 바 있다. 이때 그는 장인인 임항준 대법원판사의 사표를 받아내는 곤욕을 치렀다.

그는 고숙종씨 판결로 일반 형사사건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을 최초로 배척한 데 이어 1987년 2월10일 재일동포 심한식씨에 대한 간첩사건 항소심에서 징역 7년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희생된 뒤에 나온 것이지만, 안기부의 <간첩 심한식에 대한 항소심, 간첩혐의 무죄선고 경위 등 확인보고>라는 보고서를 보면 김 부장판사가 박종철군 사건 이전인 1월7일 검찰에 간첩부분 무죄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김헌무 판사는 이 사건에 대해 “피고인이 북한 공작지도원의 지령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없고 검찰 조사의 임의성 및 신빙성이 없고, 피고인이 34일간 불법구속되었으며, 검찰 조사 시 보안사 수사관이 입회했고, 피고인과 북한 지도원이 회합했다는 초밥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이유로 심한식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보고서는 법원이 “피고인 주장만을 믿고 고문사실 인정”이라고 불만을 터뜨렸지만, 5공화국 시절에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가벼이 볼 일은 아니다. 김헌무는 2002년 중앙선관위원회 위원이 되었는데 그 당시 인사청문회에서 이 판결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께서 ‘간첩이 무슨 증거가 있다고 무죄판결을 하느냐, 아직도 이런 판사가 있느냐, 이런 판사가 어떻게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되었느냐,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은 뭐 하느냐’ 이런 식으로 기관장모임에서 말씀하시는 통에 신문에는 일체 나오지 않았습니다마는 사법부가 한번 발칵 뒤집혔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사건으로 인해서 법관을 그만두는 것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역시 운이 좋아 가지고 법원장까지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김헌무 부장판사는 3월2일에는 납북귀환어부 강종배 피고인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영장 없이 87일간의 장기 불법 구금상태에서 이루어진 피고인 진술에는 임의성 및 신빙성을 인정키 어렵다”며 간첩죄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판결들은 그 스스로가 박동운씨에 대한 사형판결을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것일 수도 있고, 그가 국보위에까지 근무했던 경북고 출신의 티케이(TK) 본류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김헌무는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 9월 “열린우리당을 벼락부자로 만든 4·15 총선의 특징은 진보의 가면을 쓴 친북·좌경·반대세력의 대대적인 국회진출이었다”고 주장하는 보수 쪽 원로 시국선언에 서명하여 중앙선관위원의 정치개입이라는 논란을 낳았고, 2007년에는 중앙선관위가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선거법 위반이라고 결정하는 데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하는 등 확실한 보수인사였다. 김헌무가 박동운씨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정말 어이없는 판결이지만, 그 후 그가 고숙종씨의 무죄판결에 이어, 심한식, 강종배씨 등의 간첩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것은 대단히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관련 영상] <한홍구의 한국현대사> 박정희와 유신 그리고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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