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8월 제6차 8·15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가한 한총련 학생들이 연세대에서 무더기로 연행되고 있다. 예상대로 법원은 한총련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했다. 10월28일의 110명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이들 중 절반에 가까운 51명에 대해 실형이 선고되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람은 59명에 그쳤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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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기각·위헌제청에 안기부 “판사 이념교육 필요”
단독판사에 시국사건 배당 관례 깨고 합의부에
실형선고율 ‘건국대 사건’때보다 높은 46% 기록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39. 법관들에 대한 이념교육 시도 (상) 한총련 사건과 안기부 1996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제6차 8·15통일대축전 행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한총련 사태는 여러 가지 신기록을 세웠다. 이 사건은 5공화국 최대의 공안사건인 건국대 사건의 연행자 수 1200여명의 5배에 가까운 5800여명의 연행자를 내고 진압되었다. 범청학련의 8·15행사는 6년째 계속돼온 연례행사였는데 유독 1996년의 행사에서 경찰은 공식행사가 끝난 뒤에도 봉쇄망을 풀지 않았다. 경찰이 학생들의 해산을 용납하지 않고 몰아붙인 것이다. 이에 사전영장이 발부되어 있던 한총련 주요 간부들을 포함한 참가 학생 수천명은 종합관, 과학관 등 건물에 들어가 준비되지 않은 농성에 들어갔다. 꼭 10년 전 건국대 사태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언론은 10년 전보다 한술 더 떠 ‘공안정국’, ‘공안검찰’에 이어 ‘공안언론’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섬뜩한 말을 퍼부어댔다. <조선일보>는 학생들을 ‘난동배’로 규정하면서 이들은 ‘대한민국의 학생’이 아니라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한 ‘북의 직계부대’이자 ‘조선노동당 재남 행동대원’이라고 규정했다. 수구언론의 성원에 힘입어 경찰청장 박일룡은 필요한 경우 시위대에 총기를 사용하겠다는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히기까지 했다. 총기까지 쓰겠다는데도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 등은 정부와 여당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면서 ‘세금을 내야 하나’라며 초강경 대응을 부추겼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1986년의 건국대 사건이나 그 10년 뒤의 한총련 사건에서 당국이 어떤 사전 계획을 갖고 학생들의 귀가를 허가하지 않아 초대형 사건으로 몰고 갔는지, 그 과정에서 안기부는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1996년 한총련 사태 이후 연행된 학생들의 사법처리를 둘러싸고 안기부가 사법부에 대해 유무형의 압력을 가한 몇 건의 보고서만을 찾을 수 있었다. 엄벌을 위하여 안기부는 당시 한총련 사태로 연행된 학생들의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되거나, 구속기소된 학생들이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데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안기부가 보기에 최근의 공안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극히 우려할 만한 일이었다. <법조계 일각, 판사 이념교육 필요성 지적>이라는 1996년 8월(일자 미상)의 안기부 보고서는 “지난 7. 12 서울지법 유원석 판사가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당시 전국연합 사무차장 박충열을 무죄로 석방하는 등 공안사범에 대한 관용판결이 빈발”하고 있고, “심지어 현직 판사가 국보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헌재에 위헌심판을 제청하는가 하면 최근 연대 사태 관련자에 대한 영장기각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개탄했다. 안기부는 그 사례로 “서울지법 박시환 판사는 지난 3. 5 국보법 19조(구속기간 연장)에 대해 위헌제청, 박범계 판사는 8·15 한총련 손평길 영장 기각”한 것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안기부는 “법조계 일각”이라는 이름을 빌려 “최근 공안사건 발생 등을 계기로 판사들에 대한 이념교육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원석 판사의 ‘관용판결’이란 안기부와 검찰이 박충렬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지 못해 구속 사유였던 간첩 혐의가 공소장에서 빠지게 되고, 별건인 재야단체 활동과 관련된 이적표현물 제작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 것을 말한다. 이 판결은 안기부의 수사권 남용에 제동을 건 역사적 판결이었다. 안기부는 박시환 판사가 국가보안법의 구속기간 연장에 대한 특례조항을 위헌이라고 제청한 것도 몹시 불쾌해했다. 그런데 안기부에게 박범계 판사가 8·15 축전에 참가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와 연세대로 들어가려다 경찰과 충돌하여 연행된 손평길의 구속영장을 농성학생들의 진압과 대규모 사법처리를 앞둔 상황에서 기각한 것은 몹시 불길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안기부의 보고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경찰은 손평길에 대한 영장을 다시 청구했으나 서울지법 민사 40단독 손차준 판사는 17일 “손평길씨가 붙잡힐 때 쇠파이프를 들고 있던 점은 인정되지만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는 수사기관의 소명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기각했다. 안기부뿐 아니라 정부·여당은 법원에 의해 영장이 기각된 것에 격앙했다. <한겨레신문>은 여당인 신한국당이 8월17일 “소명자료 부족을 이유로 한 서울지법의 시위학생 구속영장 기각에 대해 ‘법원도 시야와 시각을 국가안위 차원에 맞춰야 한다’고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간섭이라는 논란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문까지 한 것은 여권의 경직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면서, “1980년대 공안정국을 연상시키는 여권의 이런 강성기류는 청와대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손평길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던 박범계 판사는 몇 주 동안 “아들 잘 크고 있느냐”는 식의 ‘안부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박 판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출동한 경찰은 주변 사람들에게 박 판사의 사상을 캐묻고 다녔다. 무더기 연행, 무더기 사법처리 공안당국은 연세대 사태와 관련하여 8월 20일 진압 작전 당일 3499명 등 총 5848명을 연행하여 이 중 462명을 구속하고, 3341명을 불구속 입건, 373명을 즉심에 회부, 1672명을 훈방했다. 구속자 462명은 진압 이전에 구속된 사람이 93명, 진압 당시 연행된 3499명 중 구속자 369명이었다. 진압작전 전날인 8월19일 국무총리 이수성은 단순가담자에 대해서는 최대한 관대하게 처분할 방침이라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수구언론은 ‘이번 사태에 단순가담자는 없다’고 못박았다. “최근 연대 사태 관련자에 대한 영장기각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우려한 안기부가 미리 손을 쓴 탓인지 무더기 구속영장은 대부분 통과되었다. 서울지검 공안검사들은 시위 사진 300여장을 들고 영장발부를 담당하는 당직판사를 찾아가 수사 결과를 설명했다. 이런 노력 탓에 연행 직후 검찰이 청구한 371명의 구속영장 중 단 2건만이 기각되어 영장기각률은 0.539%에 그쳤다. 한총련 사건 전체를 보면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람 470명 중 464명이 발부되어 기각률은 1.28%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1996년 상반기 전국 법원의 영장기각률 7.5%나 서울지법 관내 기각률 10.4%에 비하면 극히 이례적으로 낮은 수치였다. 아직 한총련 학생들이 연세대에서 농성을 하고 있을 때 “서울지법 고위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청구만 하면 법원이 으레 영장을 발부하리라는 수사기관의 기대는 잘못된 것”이라며 “소명자료가 부족하거나 검·경찰이 엉성하게 수사해 영장을 올리면 기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했다. 농성진압 이전만 해도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던 40명 중 2명의 영장이 기각되어 기각률은 5%에 달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대거 연행되고 청와대의 초강경 방침이 천명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경찰이 총기 사용을 공공연히 말하고, 공보처가 발행하는 국정신문에, 공권력에 도전하면 사형으로 다스린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는 경색된 분위기 속에 법원 역시 태도를 바꾸어 검찰의 청구대로 영장을 발부해 준 것이다. 이상한 배당, 무더기 실형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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