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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07 18:24 수정 : 2010.02.07 18:53

김영삼 정권 시절 안기부 1차장을 지내고 국회의원이 된 정형근 당시 신한국당 의원은 1996년 “현재 법원은 국보법에 대한 인식도가 다소 미흡한 소장법관들이 판결하고 있어, 좌익사범 척결에 어려움이 대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안기부의 사법부 영향력 회복 기도는 1997년 말 정권교체로 좌절됐으나, 최근 수구세력의 사법부 장악 움직임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8. 오래된 소원 - 공안판사제

※ 최근 한나라당과 수구언론발 ‘사법개혁’ 주장이 요란하다. 연재의 순서를 조금 바꾸어, 현재와 유사한 논란이 벌어졌던 90년대 중반의 상황을 먼저 다루기로 한다.

운동권 출신 법관의 출현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운동진영에 급진적 사회변혁 대신 체제 내의 개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학내시위나 조직사건으로 실형을 살았거나, ‘위장취업’을 해서 노동현장에 갔던 사람들 중에 뒤늦게 고시를 통과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산 이정우가 1990년 외무고시에 처음으로 합격하고 이어 고시 3과에 모두 합격하여 화제가 되었고, 같은 해 사법시험에 <깃발> 사건으로 실형을 산 이흥구가 처음으로 합격했다. 시위와 관련하여 유기정학을 받은 바 있는 ‘위장취업자’ 원희룡은 1992년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하기도 했다. 운동권 출신의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1993년 대략 20명, 1996년에는 100명 선을 넘어서 더는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운동권 출신들이 처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을 때만 해도 보수언론은 이들의 새로운 선택을 반겼다. 이흥구의 합격에 대하여 <중앙일보>는 사설을 통해 “지난날에는 필기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도 면접시험에서 전력이 문제가 되어 불합격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항간의 말들을 생각할 때 면접시험까지 거친 이번 최종합격이 사회의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1990년대 운동권출신 법조계 약진
‘소신판결’ ‘사법부 독립’ 일렁이자
체제수호 약화 이유 판사임용 배제

문제 판사는 공안사건 못 맡도록

이흥구는 연수원을 마치고 1993년 3월1일자로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에 무사히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2년여 후 안기부의 보고서에 등장한다. <문제 성향 판사의 형사부 보직 배제 필요>라는 1995년 7월25일자 안기부 보고서는 “최근 서울지법 이흥구 판사의 김일성 전기 판매자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등 문제 성향 판사의 좌익사범 관용조치가 빈발”하고 있다면서, “체제도전세력에 대한 검찰의 대응을 곤란케 함은 물론 국민 대공경각심을 해이”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안기부는 “운동권 출신 예비 법조인(9명)의 법조계 진출 시 관용조치 증가가 명약관화”하기 때문에, “법원과 협조, 문제성향의 현직 판사와 예비 법조인들에 대한 형사부 보직 배제를 유도해 나감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위 보고서가 문제 삼은 사건의 결정문에서 이흥구 판사는 “국민들이 우리의 사회체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김일성의 정통성을 인정하거나 혁명노선에 동조하는 책에 대해 국민들은 오히려 비판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경찰은 이흥구 판사에 의해 기각된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했는데, 국가보안법 전력자가 아닌 서울지법 형사22부 박재완 판사는 그 영장을 다시 기각했다.

운동권 전력자 임용 배제

안기부는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중인 9명이 “형사부 보직”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원조사를 대폭 강화했다. <한겨레신문>은 안기부가 임용예정자의 취미, 애인, 차종, 재산상황, 서울에 사는 고교동창 이름, 결혼계획 등을 묻는 전화를 여기저기 걸었고, “그 사람이 판(검)사로서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느냐”고 탐문하는 등 “관례를 벗어나는 질문”을 했다고 보도했다. 안기부는 질문내용에 항의하는 지망자에게는 “당신이 그렇게 불쾌하게 여긴다면 그런 태도도 보고서에 그대로 써서 올리겠다”고 위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음 날짜 신문에는 “당국은 과거에도 실형을 받은 사람은 임용한 선례가 없다며 임용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는 불길한 예측기사가 실렸다.

실제로 법무부는 1996년 2월23일 검사직을 지망한 연수원 25기 수료자 가운데 시국사건 실형 전과가 있는 천낙붕, 최승수와, 면접 때 “그동안 검찰은 권력에 아부하는 등 정치지향성이 많았다”고 지적한 천삼현 등 3명을 임용에서 떨어뜨렸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이번에 검사직을 지망한 수료자들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편에 속할 뿐 아니라 임용에서 제외될 만한 다른 특별한 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검사임용 거부처분 취소소송’을 냈으나, 1997년 6월20일 서울고법 특별9부는 “이유 없다”며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1996년도 사법시험에서는 시위 전력자 오기형씨가 3차 시험에서 탈락했다. 사면과 복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1997년 서울고법의 판결 이후, 대법원은 공공연하게 학생운동 전력자들의 판사임용을 거부했다. 1998년 1월5일 열린 대법관들의 간담회는 “우리 사회의 최후보루인 법원에 급진적인 사상이 어울리지 않으며,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공정한 재판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학생운동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경력이 있는 사법연수원생들의 법관 임용을 허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법원행정처는 사법연수원 27기생으로 법관을 지망하려는 학생운동 전력자 4명을 불러 “법원에 지원하더라도 임용하지 않을 방침”임을 통보했다. 이후 학생운동으로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들이 사법연수원 성적과 관계없이 판검사 임용에서 탈락하는 것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형을 산 적이 없는 운동권 출신을 걸러낼 방법은 없었고, 80년대의 시대정신을 간직한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사법부의 독립성 회복에 대한 반발

안기부 등이 운동권 전력이 있는 판사들을 문제 삼은 것은 80년대에 비해 법원이 민주화되고 사법부의 독립성이 조금이나마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1988년 소장 판사들의 사법부 독립 요구로 세칭 2차 사법파동이 일어난 이후, 정치권력이 사법부의 인사나 판결에 개입하는 데에는 상당한 제약이 생겼다. <한겨레신문>도 1992년에 이미 “이일규 대법원장 이래 재판과 관련한 압력은 없어졌다”고 단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은 정치권력대로, 안기부는 안기부대로 사법부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했던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성향의 판사들에 대한 인사조처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1996년 3월의 신규 법관 임용에서 실형을 산 시위전력자들이 탈락한 데 이어 “공안검사 울리는 두 명의 판사” 또는 “공안검사들의 천적”이라고 신문에 소개되었던 판사들이 인사조처를 당했다. 유원석 판사는 1997년 2월18일 갑자기 사표를 냈고, 박시환 판사도 2월 말의 정기인사에서 서울지법 형사단독에 임명된 지 1년 만에 이례적으로 서울지법 민사단독으로 발령이 났다. 두 판사의 인사는 국회에서 “소신 있는 판결과 관련된 편파적, 불공정 인사”로 문제가 되었다.

안기부 끊임없이 영향력 행사 기도
정형근, 공안사건 전담재판부 주장
최근 법원 장악 움직임 또 노골화

오래된 소원 - 공안판사제

안기부는 이 무렵 “법원의 공안판사제 신설 검토 필요”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이 보고서에서 안기부는 “체제수호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사법부의 경우, 소장판사들 간 신세대적 자유주의 사고 유입, 운동권 출신 판사 임용, 사법부의 연소화 등으로 체제수호 의지가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안기부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20~30대 판사가 70%”가 되고 영장실질심사 등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장치가 상당한 수준에서 도입된 상태에서 “북한은 물론 좌익세력들의 조직, 투쟁전략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 형사부에 사건을 맡겼다가는 “체제도전세력들에게 수시불구속, 무죄선고 등 관대한 처분”이 속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 대안으로 안기부는 “법원에 기존 민사, 형사, 가사부와 별도 공안부를 신설”할 것을 제안했다. “국가관이 투철하고 전문지식을 보유한 판사들로 하여금 공안사건을 전담”케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원에 공안사건을 전담하는 판사나 재판부를 두자는 발상은 안기부의 이 보고서에서 처음 선보인 것은 아니다. 1996년 10월1일 서울지법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신한국당 의원 정형근은 “특허, 교통, 선거 등 전문화 시대에 맞춰 법원도 전담재판부를 설치해서 의료사고, 지적재산권, 국제거래, 해상사건 전담재판부가 설치·운영 중”이라며, “공안사건의 경우 일반인이 판단할 수 없는 고도의 위험성에 대한 판단으로 어느 사건 못지않은 전문성이 필요하나 현재 법원은 국보법에 대한 인식도가 다소 미흡한 소장법관들이 판결하고 있어, 공안사건의 특수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일반형사사건과 같은 기준으로 처리하고 있어 좌익사범 척결에 어려움이 대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따라서 그 해소방안으로 공안사건 전담재판부를 설치하거나 단독판사가 아닌 합의부에서 재판하는 방안을 검토할 용의가 없는지” 물었다.

과거 5공화국 시절 사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안기부는 1988년 제2차 사법파동 이후 사법부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 갔다. 안기부 등 수구 세력은 1996년 한총련 사태 등을 발판으로 다시 사법부에 대한 음습한 영향력의 회복을 꾀했다. 그런 기도는 안기부와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법관들로 따로 검찰처럼 공안부를 만들자는 데에서 절정에 달했다. 안기부는 이렇게 하면 배당 규칙을 둘러싼 시비나 여러 가지 잡음은 아예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기부의 이런 기도는 그해 말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선택함으로써 실현될 수 없었다.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법원을 장악하려는 수구세력의 그 오랜 소원이 지금 다시 꿈틀대고 있다. 20대 청년시절 진보당 사건 무죄판결에 불만을 품고 법원에 난입했던 그 부류의 사람들은 이제 70~80대 어르신 ‘용팔이’가 되어 마음에 안 드는 판사의 집 앞에서 시위를 한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어디로일까? 80년대일까? 50년대일까? 역사의 퇴행을 가져올 수구의 만용을 막아설 보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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