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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17일 부천서 성고문사건으로 기소된 문귀동씨의 첫 공판에서 법정에 들어가지 못한 방청 신청자들이 법정 밖에서 공판을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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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 장세동 만난뒤 결과 뒤집어
김경회 검사장 “치욕적 사건” 회고
재정신청엔 “이유 없다” 기각했던 법원
안기부 압력받고 권양엔 실형 선고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7.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인간에 대한 예의 (2) 김경회 검사장의 고백 인천지검장으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김경회는 회고록 <나 이제 자유인 되어>에서 이 사건의 결론이 어떻게 어이없이 뒤집히게 되었는가에 대해 자세히 밝혔다. 말기 암을 선고받고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작성된 그의 회고록은 보기 드물도록 솔직하게 자신의 검사생활 중 “가장 치욕스럽고도 부끄러운 사건”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부천서 사건은 “정권의 존립과 직결되는 사건”이었다. 인천지검은 나름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했지만 “경찰은 물론 모든 공안기관”이 인천지검의 수사를 “사시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문귀동을 구속하려던 김경회 검사장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인천지검 특수부장 김수장은 당시 정권 실세의 한 사람인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의 사시 동기였다. 박철언은 청와대와 안기부에서 주로 근무했지만, 친정은 역시 검찰이었다. 김경회와 상의한 김수장은 7월9일 박철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박철언은 자신이 뒷받침할 테니 소신껏 수사하라고 김수장을 격려했다. 박철언은 다음날 김경회에게도 전화를 걸어 검찰총장에게 원칙대로 사건이 처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김경회에 따르면 박철언의 전화를 받자마자 법무부 검찰국장 김두희가 전화를 걸어왔다. 법무장관 김성기가 아침 간부회의에서 “나의 직을 걸고 명령하니 원칙대로 파헤치라”고 호언했다는 것이다. 김경회는 “어제까지와의 태도와는 판이한 이 현상이 정부 권력의 취약성 때문인가, 아니면 줏대 없는 검찰권의 방황이라 할 것인가”라는 느낌이 들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김경회는 김수장에게 박철언에게 도움을 청한 사실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다짐하면서 “수사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불태웠다”고 회고했다. 성고문의 ‘성’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 실세 박철언의 지원으로 탄력을 받았던 인천지검의 수사는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수사발표 전날인 7월15일 오전, 김경회는 검찰총장 서동권에게 불려갔다. 안기부장 장세동이 주도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마치고 온 서동권은 “안기부에서는 발표문과 대통령에 대한 보고문서 등에 성고문의 ‘성’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김경회는 기가 막혀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고 한다. 문귀동을 구속해야 한다던 인천지검의 수사결론이 뒤집힌 것에 대해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은 이 시나리오는 “전직 대통령의 결정이겠지요”라고 훗날 진술한 바 있다. 5공비리 청문회 등에서 전두환을 온 몸을 내던져 보호했던 장세동이 그렇게 얘기했다면, 그것은 전두환의 결정이었음에 틀림없다. 실세 박철언은 5공 시절에는 경찰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면서, 그 이유를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경찰 출신인 것에서 찾았다. 5공화국판 ‘형님 정치’였던 것이다. 수사결과 발표가 있던 7월16일 아침,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가 간부회의가 열리고 있는 검사장실로 들어와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김경회도 회의를 마치고 “혼자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소리 없이 울었다”고 썼다. 김경회가 한 최대의 저항은 검사장이 직접 수사결과를 발표하라는 대검의 지시를 거부한 일이다. 그 때문에 오후 4시로 예정되었던 수사결과 발표는 6시30분으로 미뤄졌고, 발표는 특수부장 김수장이 대신하게 되었다. 언론사에는 검사장이 직접 한다고 했기 때문에 티비 화면에는 김수장의 얼굴 밑에 김경회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고 한다. 김경회는 김수장에게 “평생에 못할 짓을 내가 시킨 꼴”이 되었다고 미안해했다. 다음날 검찰총장은 전화를 걸어 인천과 서울의 일부 검사들이 어제 발표에 대해 이견과 불만을 내는 소리가 공안기관에 감지되니 부하들 입단속을 시키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김경회는 “지금 이 마당에 검사장이 입단속이나 시킬 형편인가? 수챗구멍에 목을 묻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아무리 보안을 당부한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막는 격이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문귀동의 기소유예처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대해 김경회는 “사실과 동떨어진 엉터리 발표를 해놓고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인지 최종 불기소 결정론을 놓고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는 검찰조직을 보며 “거대한 정신병동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썼다. 문귀동에 대해 기소유예처분을 내리자, 장관이 간부들에게 나눠 주라며 격려금 200만 원을 보내왔다고 한다. 재정신청도 기각 검찰이 문귀동을 기소유예처분하자 조영래 등 변호인들은 9월1일 이에 불복하여 재정신청서를 제출했다. 재정신청에는 무려 166명의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이철환)는 10월31일 “권인숙의 일방적인 진술만으로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다”며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의자 문귀동은 직무에 집착한 나머지 무리한 수사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으로 이미 파면되고 비등한 여론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기소유예 처분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사법부도 적극적으로 성고문 은폐에 가담한 것이다. 이 기막힌 결정에 대해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탄식했다. 조금 길지만 꼭 되새겨야 할 말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 상속권을 팔아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법관 개개인들만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그러나 적어도 사법부로서는 이 사태의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도 전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용기가 없는 사법부, 스스로의 사명을 스스로 저버린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말하거니와 이 재정신청 기각 결정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법부의 존립 근거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 사태의 위험성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모든 법관들이 깊이 통찰하고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건곤일척의 몸부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될,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역사적 순간이 도래하였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안기부, 우리들의 딸 권양에게 실형을 주다 전두환 정권은 어떻게든 권인숙을 묶어두어야 했다. 어쩌면 이미 결론이 나있는 재판에서 변호인들, 특히 조영래 변호사는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가 집필한 변론요지서는 학살과 고문이 자행되던 불행한 시대가 낳은 다시 읽기 힘든 명문이었다. 변론요지서는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로 시작했다. “눈물 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권양의 투쟁’”을 실제로 조영래는 눈물을 쏟아가면서 변호했고, 변론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계속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12월 4일의 선고공판에서 재판부(인천지법 형사2부: 재판장 윤규한)는 “비록 목적이 근로자의 권익보호를 위한 심정에서 위장 취업했다고 하나 남의 주민등록증을 훔쳐 사진을 갈아붙이고 기타 인적사항을 도용해 이력서를 작성한 행위는 그 방법에 있어 지나치다”며 실형 1년6월을 선고했다. 문귀동은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권인숙은 공문서위조혐의로 실형을 살게 된 것이다. <조영래 평전>에 의하면 “당시 재판을 맡았던 인천지방법원 합의부가 당초에 집행유예 처분을 내림으로써 권인숙을 즉시 석방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선고 직전에 실형 1년6월로 조정하였다”고 한다. 이는 “재판장과 주심판사가 나머지 배석판사와 상의 없이 결정한 형량”이었으며 “재판부의 한 사람은 선고를 내리기 직전에 정부의 압력이 있었다고 후일 사석에서 고백했다”는 것이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확인한 바로는 당시 안기부 인천분실 대공과장이 재판부에 권인숙이 실형을 언도받도록 강력히 조정하였음을 입증하는 보고서가 국정원에 남아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사람은 참 가지가지다. 문귀동 같은 자가 있는가 하면, 문귀동을 써먹어 출세하려던 자가 있고, 문귀동의 죄악을 덮어버려야 정권이 산다고 생각한 자가 있고, 문귀동을 잡아넣는 것이 오히려 체제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자도 있다. 검찰과 사법부가 성고문 은폐의 공범이 될 때, 기꺼이 협력한 자도 있고, 부끄러워한 자도 있고, 분해서 눈물을 흘린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인숙의 고통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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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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