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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24 22:51 수정 : 2010.01.24 22:54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한 피해자 권인숙(오른쪽)씨가 1988년 5월 가해자 문귀동 경장에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 판결을 듣고 담당 조영래(왼쪽) 변호사와 함께 법정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인천 5·3사건’ 수배자 정보캐려 경찰 고문 자행
검찰, 외압에 수사결과 뒤집어 문귀동 비호
김수환 추기경 옥중 권인숙씨에 위로편지 보내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6.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인간에 대한 예의 (1)

사건의 발단, 인천 5·3 사태

처음으로 고문을 제대로 폭로했던 김근태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채 석 달이 안 되어 세상을 뒤흔든 고문 문제가 또다시 발생했다.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권인숙이라는 학생 출신의 여성 노동자가 문귀동이라는 경찰관에게 성고문을 당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처리 과정은 제5공화국이라는 체제의 최고 엘리트가 모인 검찰과 법원에 일말의 도덕성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참담한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부천서 사건은 그 시절, 정치적 양심이라는 것의 한 조각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광주와는 또다른 각도에서 이 정권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된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4반세기가 지나 이 글을 쓰는 오늘에도 그날 어느 서점에서 변호인들이 작성한 유인물을 보며 분노와 수치심에 덜덜 떨었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안기부가 만든 민한당을 대신하여 신민당이 출현하면서 직선제 개헌은 정치권 최대의 쟁점으로 등장했다. 신민당은 2·12 총선 1돌을 맞이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신민당은 3월8일 헌법개정추진위원회 서울시 지부 현판식이라는 형식을 빌려 새로운 명목의 장외투쟁을 시작했다. 현판식은 건물 밖에 간판을 거는 것이니 옥외 집회가 될 수밖에 없고, 각 지부가 저마다 현판식을 하도록 하였으니 자연스럽게 전국 릴레이 집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1986년 봄은 ‘현판식’ 정국이라 일컬을 만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전국을 돌며 개최된 릴레이 옥외집회의 피날레로 예정된 것은 5월3일의 인천지부 현판식이었다.

각지의 현판식은 신민당이 주도한 행사였지만, 여기에는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세력까지 적극 참여했다. 그런데 급진적인 민중운동 세력과 신민당 간에 묘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민중운동은 이념적으로 대단히 급진화되었을 때였다. 특히 4월28일에는 “반전반핵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김세진, 이재호 등 서울대생 두 명이 분신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전두환은 4월30일 신민당 총재 이민우와 회담을 하고 여야가 합의하면 임기 중에 개헌을 할 수 있다면서 신민당이 재야나 민중운동 세력과 선을 그을 것을 요구했다. 이민우도 과격한 좌익학생운동을 단호히 다스려줄 것을 주문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런 상황은 5월3일의 인천지부 현판식을 그 이전의 현판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만들었다. 전국 순회 집회로 분위기가 달아오른 상태에서, 민중운동 세력은 ‘인천을 해방구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인천으로 총집결하여 “미제 축출” “파쇼 타도”를 외치며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신민당은 각성하라” 등의 구호도 함께 외쳤고, 신민당의 현판식은 무산되고 말았다. 지금은 저 멀리 가버린 경기도 지사 김문수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은 화염병이 허공을 가른 ‘5·3 사태’의 핵심 지도부였다.


도마뱀만도 못한 권력

‘5·3 사태’의 파장은 심각했다. 전두환 정권은 사건 관련자 319명을 연행하여 129명을 구속했고 37명을 수배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도 정권이 눈에 불을 켜고 ‘위장취업자’ 등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통장의 신고로 6월4일 경찰에 연행되었다. 권인숙의 죄목은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고치는 등 공문서 위조를 했다는 것이었지만, 경찰의 주된 관심은 권인숙으로부터 5·3 사건 수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는 것이었다. 이때 문귀동이라는 자가 권인숙에게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몹쓸 짓을 했다.

권인숙은 교도소 내에서 용기를 내어 그 끔찍한 일을 면회객들을 통해 밖으로 알렸다. 가족들이나 가족들이 선임한 공문서 위조 사건의 변호사는 권인숙에게 조용히 있으면 기소유예나 집행유예가 될 수 있다고 만류했으나, 권인숙은 또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라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전신인 정법회에서는 권인숙이라는 여성이 감옥에서 변호사와의 만남을 간절히 원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상수 변호사를 보냈다. 권인숙을 면회하고 온 이상수 변호사의 충격적인 얘기를 듣고 조영래, 홍성우 변호사 등이 한걸음에 달려갔다. 몇 년 전부터 이런저런 풍문으로 떠돌던 성고문의 실체는 이렇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한 달 만인 7월3일에는 권인숙이, 7월5일에는 조영래 등 변호사 9명이 문귀동을 정식으로 고발했다. 당시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으로 5공과 6공 시절 권력실세의 한 사람이었던 박철언에 따르면, 경찰, 검찰, 안기부 등 공안당국은 “권인숙이 허위사실을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급진 좌경 사상에 물든 나머지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마저 이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안기부 인천분실장이 7월10일에 올린 보고서에도 권인숙이 성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6월6일과 7일에 문귀동은 집에서 쉬고 있었고 조사한 일이 없다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잘못된 보고서를 토대로 안기부장 장세동은 7월11일 열린 안기부 확대 부서장 회의에서 “현 상태에서는 공권력 마비를 위한 공산 세력의 조작이다. 사실대로 수사하여 진위를 가려야 한다. 수사 결과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편 말에 더 귀 기울이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기로 했다. 이 사건의 본질이 “문귀동이라는 한 변태 성욕자가 우발적인 충동에 의해 저지른 단독 범행이 아니라 경찰관료 조직 내부의 의도적인 성고문 계획에 따른 자행된 조직범죄”였다는 점은 권력의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도마뱀은 꼬리라도 자르건만, 권력은 도덕성은 물론이고 도마뱀만한 판단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뒤집혀진 조사 결과

당시 인천지검장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김경회 변호사는 회고록에서 권인숙이 문귀동을 고발한 다음 날인 7월4일 법무부 장관 김성기가 “경찰에서 권인숙을 명예훼손과 무고로 맞고소하면 받아줘야 할 것 아니냐”며 신경질적인 전화를 했다고 밝혔다. 장관의 전화가 있고 두 시간이 채 안 돼 인천경찰국장 유길종 등이 찾아와 경찰에서 조사를 해보니 성고문이란 터무니없는 허위사실이라며, 상부의 지시로 경찰을 무력화하려는 권인숙을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들이 돌아간 후 경찰은 곧 고소장을 접수시켰다. 도둑이 매를 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김성기는 내무장관 정성모와 협의를 한 뒤 김경회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 법무부는 이 사건이 “초임 검사도 처리할 수 있는 50 대 50의 사건”인데 검사장 김경회가 신속히 수사하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양쪽의 고발을 받은 뒤 문귀동과 권인숙을 모두 무혐의 처리하라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처음 인천지검은 나름대로 의욕을 갖고 사건을 수사했다. 검찰은 경찰서 유치장과 인천교도소에서 권인숙으로부터 성고문 사실을 들은 수감자들과 경찰관 등 43명을 소환하여 진술을 받았다. 인천지검 검사 남충현은 변호인과 기자들에게 “나중에 결과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공정하게 수사를 했는지 알 것이다”라고 호언했다. 그런데 7월16일의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는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검찰은 권인숙이 조사받은 방은 안이 들여다보이는 곳이고 다른 경찰관들이 옆방에서 날씨가 더워 모두 문을 열어놓고 왔다 갔다 하는데 성고문이 있었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고, 단지 문귀동이 조사 중 티셔츠를 입은 가슴 부위를 몇 차례 쥐어박은 사실이 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검찰은 문귀동이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우발적인 과오를 저질렀지만 “그는 이미 파면처분을 받았고 지난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여 성실하게 근무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하여 문귀동을 기소유예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이 실제 조사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발표였다.

성, 혁명의 도구? 고문의 도구?

더구나 검찰은 수사 결과 발표문 말미에 ‘사건의 성격’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달아 기자들에게 배부했다. 이 보도자료는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서동권이 나중에 국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검찰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안기부와 문공부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권인숙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는 운동권”으로 매도되었고, 안기부는 운동권이 “성을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펄펄뛰었다. 보도자료는 이렇게 주장했다. “급진좌경사상에 의한 노학연계 투쟁을 전개해왔던 권인숙의 ‘성적 모욕’의 허위사실 주장은 운동권 세력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소위 의식화 투쟁의 일환으로서, 폭행 사실을 성 모욕행위로 날조,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구명과 아울러 일선 수사기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반체제 혁명투쟁을 사회 일반적으로 확산시켜 정부의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로 판단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앵무새 언론들도 준엄하게 운동권을 꾸짖었다. ‘성’은 혁명의 도구인가, 고문의 도구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논쟁이고 무엇이고 할 문제는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7월21일 ‘개헌보다 인권문제가 더 시급하다’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론은 논쟁 같지 않은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강론을 통해 권인숙의 고통스러운 폭로를 감싸 안은 김수환 추기경은 옥중의 권양에게 “무어라고 인사와 위로의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따뜻한 편지를 보냈다. 추기경의 강론은 진실을 감추려던 전두환 정권에게는 치명타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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