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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17 18:54 수정 : 2010.01.17 18:54

이 사건의 핵심 공소사실은 전부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기에 김근태는 법정에서 고문의 폭로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고문이라는 “이 사건의 본질을 구성하는 정치군부의 범죄 행위”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사진은 1988년 10월19일 국회 내무위 국정감사에서 경찰 고문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는 김근태씨. <한겨레> 자료사진

서성, 고문진술 듣고도 공소 사실 인정
경제학자 모리스 돕 서적도 “이적물” 판시
뒷날 안기부 보고서엔 ‘보신주의 판사’ 기록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5. 김근태 고문사건과 사법부 (4)

형량도 안기부 방침대로

1986년 3월6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서성 판사는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인정하고 김근태에게 안기부의 방침대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6년을 선고했다. <중앙일보>는 서성이 구두로 “변호인들은 경찰의 위법수사와 가혹행위를 들어 검찰의 공소권이 남용되었다고 주장하나 실정법과 판례는 공소권 남용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하급심인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수사과정의 가혹행위 문제는 증거능력의 문제이지 공소의 적법 여부 문제는 아닙니다”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서성은 공소장에 나온 “6차례의 집회·시위 주도 사실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과정에서 변호인들은 “같은 행위를 한 다른 관련자가 가벼운 구류처벌을 받거나 문제시되지 않았던 점”을 강조했다. 서성은 이에 대해 “같은 행위를 한 다른 관련자가 가벼운 구류처벌을 받거나 문제시되지 않았던 점은 인정되나 그것은 공소기술상 문제일 뿐, 유무죄에는 영향이 없”다고 주장했다. 판결이 내려지자 방청객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적군”, “창피하게 여기시오”라고 재판부를 비아냥거렸다. 김근태에 따르면 자신을 호송하느라 여러번 재판을 방청했던 교도관들도 “재판장이 대가 약하군”, “배짱이 없는 사람이야”, “너무 심하군”, “승진은 이제 떼논 당상이군” 등등 자기들끼리 한마디씩 했다고 한다.

서성 판사와 김근태의 헛된 기대

<중앙일보>는 “묵묵히 판결이유를 경청하고 있던 김 피고인은 예상했다는 듯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법정을 나섰다”고 썼다. 그러나 김근태는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서성에게 무언가 기대를 걸었던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 때문에 지글지글 부아가 끓어올라 3월 한달 내내 속이 메스꺼운 상태로 보냈다. 김근태는 회고록에서 “웃기는 얘기지만 사실 난 그랬다”며 “경기고등학교 4년인가 선배라는 이야기에 뭔가 기대를 건 적이 있었”다고 쑥스럽게 고백했다. 그는 “검사 또는 판사 그 개인들과 은근히 통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어떤 관계”에 취했고,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개인적 관계를 확대해서 재판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서성은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폭로하는 동안 그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지도 않았다. 이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변호인은 김근태에게 “사회적으로 일단 날카로운 쟁점이 되어 있는 사건의 경우에는 그 공판 절차가 비교적 민주적으로 수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결과에는 아직 변함이 없다”고 조언했다. 김근태는 “그래도 법관을, 법원을 믿으려고” 하면서 “이를 나로부터 변경시키겠다는 의욕”을 갖고 “은근히 설마설마”했다. 김근태는 뒤늦게 서성의 “작전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패대기쳐진 것”이라고 깨달았다. 서성은 “고문에 대한 광범한 분노를 잘 읽고, 형식 또는 절차는 주고 내용은 완전히 꿀꺽 먹어치운 것”이다.

슈퍼맨이 되지 못한 죄

이 사건의 핵심 공소사실은 전부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기에 김근태는 법정에서 고문의 폭로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고문이라는 “이 사건의 본질을 구성하는 정치군부의 범죄 행위”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수사과정의 가혹행위 문제는 증거능력의 문제”일 뿐이라고 본 서성은 자유심증주의를 내세우며 고문에 의한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삼았다. 김근태가 지적하듯이 “재판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고문자들을 적극적으로 두둔한 것이었고 고문이 계속될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서성 스스로 인정했듯이 이 사건은 “이을호, 문용식, 최민화 등 각 증인에 의하여 진정이 성립된 조서, 자술서를 검찰이 갖고 있지 않았다면 기소제기조차 가능하지 못했을” 사건이었다. (‘진정이 성립’되었다는 말은 본인이 검사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뜻이다.) 김근태는 감옥에서 판결문을 되씹으면서 고문당한 사람들이 “혼란과 공포 속에서 찍은 손도장”을 유일한 증거로 삼아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판사가 “누가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느냐. 원망하지 마라. 그것은 당신들 탓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에 대해 공소기각결정 대신 유죄를 때린 것은, 고문한 자들의 죄를 묻지 않고 고문에 굴복한 죄를 물은 것이다. 고문을 이긴 슈퍼맨이 되지 못한 죄였다.

서성은 경제학과 출신의 김근태가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이 쓴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라는 영문 소책자를 갖고 있었던 것을 “국외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소지”했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수치스러운 속임수”였다. 너무 점잖은 게 탈인 김근태조차 이 대목에서는 “상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달라”며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서로 침을 퉤퉤 뱉고 돌아서는 편이 피차간에 차라리 솔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흥분했다. 변호인 쪽은 한국경제학회장, 서울상대 학장을 지낸 변형윤 교수를 증인으로 불러 이 책의 성격과 가치를 따졌다. 재판부는 변형윤의 증언 대신 내외문제연구소 연구원 김영학이라는 검찰 쪽 증인의 증언을 채택했다. 한국경제학계 태두의 의견을 배척하고, 모리스 돕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는 ‘듣보잡’의 ‘감정’을 채택한 것이다. 김근태는 경제학의 기본소양조차 없는 자의 “증언과 감정서를 증거로 하여 유죄를 인정하는 이 철면피의 뻔뻔스러움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겨져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고 엘리트라서 더 슬픈…

김근태도 운동권의 최고 엘리트였지만 서성도 법원에서 첫손에 꼽히는 엘리트였다. 서성은 고등고시가 사법시험으로 바뀐 뒤 제1회 사시에 수석합격한 수재형 법관이었다. 김근태는 서성이 뒤에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뜻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서도 “능력이 있고 충분한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정치군부의 요구와 기대대로 재판의 결과가 마무리된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며 “보다 공정한 재판 결과가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잘 모르는 일”이라고 토를 달았다. 서성과 김근태는 악연이라면 악연이 있었다. 서성은 1971년 11월 정보부가 조작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재판의 배석판사였다. 검거를 모면하여 이 사건에 ‘공소 외’란 접두어를 달고 등장하는 김근태는 이때부터 이 별명을 갖고 오랜 수배생활을 시작했다.

광주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한 서성은 1987년 3월의 간첩사건 판결로 인해 박우동 대법관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박우동은 <판사실에서 법정까지>란 회고록에서 수사기관과 1심 법정에서는 범행을 자백했지만, 고등법원에 와서 공소사실을 전부 부인하기 시작한 한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그는 고등법원에서 “단숨에 결심하고 항소를 기각”한 이 사건의 피고인이 너무 억울해 보여 원심을 파기하자고 했으나, 1심 법원에서의 자백 때문에 사실오인의 상고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다른 대법원 판사의 강력한 반대로 상고기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박우동은 법률상 “상고기각의 판결이 불가피하고 보니 항소심 재판에 부아가 치밀었다. 사형 다음의 중형을 선고한 판결에 그렇게 아무 감정도 고뇌의 흔적도 느낄 수 없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 재판장이라는 사람이 원망스러웠다”고 썼다. 2008년 6월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강희철씨의 조작간첩 사건이었다. 박우동은 재판장의 이름을 적시하지 않았는데, 판결문을 찾아보니 바로 서성 판사였다. 판결문은 충격적이었다. 무기징역 선고에 해당하는 항소기각의 이유는 달랑 원고지 1.6매 분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 판사 임명

1994년 7월 사시 1회가 처음으로 대법관에 진입하게 되었을 때, 사시 1회의 선두주자인 춘천지법원장 서성은 이임수 전주지법원장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때 안기부는 뜻밖에도 김근태 사건 당시 고군분투한 서성 대신 이임수를 지원했다. <법원, 대법관 인사에 소장파 영향력 우려>라는 제목의 1994년 7월2일자 보고서를 보면, 안기부는 서성을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만 치중해온 이기적인 성품”의 “보신주의적 인사”라고 폄하했다.

반면 안기부는 “확고한 국가관과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는 이임수가 소장파들로부터 “법원행정처 기조실장과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을 거치며 정부시책에 적극 협조하였다며 매도”당하고 있다면서 그를 비호했다. 그런데 이임수는 <한겨레>에서조차 “법원 내에서 정치를 해야 하는 기획조정실장을 3년 넘게 지내면서 잡음이 거의 나지 않아 처신에 아주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며 “약점이 너무 없는 것이 약점”이라는 우호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1994년 7월 대법관 인사의 특징은 “정치판사 시비 등 문제의 소지가 있는 판사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성은 대법관 선임에서 탈락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언론은 윤관 대법원장이 “가재환(송씨 일가 사건 당시 대법원장 비서실장), 서성 원장 등 출중한 능력으로 주목을 받아 온 법관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나, 결국 울면서 마속을 베는 심정으로 뜻을 꺾었다”고 보도했다.

가재환은 끝내 대법관이 되지 못했으나, 서성은 1997년 1월 다시 한번 고배를 마신 뒤, 그해 9월 마침내 대법관이 되었다. 안기부가 김근태 사건을 안기부의 공판대책 그대로 처리해 준 서성을 왜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만 치중해온 이기적인 성품”의 “보신주의적 인사”라고 폄하했는지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성으로서는 정말 뭣 주고 뺨 맞은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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