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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28 18:57 수정 : 2009.12.28 18:57

김근태씨 고문사건과 관련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현장검증이 실시된 1990년 12월10일 김씨의 부인 인재근씨(맨 오른쪽) 등 재야인사들이 대공분실 입구에서 ‘고문경찰관 처벌하라’는 플래카드를 압수하려는 사복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김근태는 검찰청 복도에서 기적적으로 아내 인재근을 만나 고문을 폭로한 그 힘으로 검찰에서 묵비권을 고집하며 버틸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재판부, 안기부 공판대책 따라 진행
기일·선고내용·보도지침까지 세세히
거센 고문 논란엔 ‘운동권 전술’ 몰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3. 김근태 고문사건과 사법부 (2)

묵비권의 대가

안기부는 김근태의 신체감정 및 증거보전 신청을 기각하여 잠시 숨을 돌렸지만, 사회에서는 고문 문제가 점점 이슈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민청련 정책실장 이을호, 전학련 삼민투위원장 허인회, 백범사상연구회장 정진관 등 여기저기서 고문 과 조작 시비가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안기부나 경찰은 고문 시비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이었던 박처원(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사건과 이근안 도피사건의 배후책임자)은 김근태의 고문이 사회문제가 되자 “전희찬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정형근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 김원치 검사 등과 함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대책회의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김씨에 대한 면회, 접견 금지 및 상처 조기 치유방안 등을 논의했다”고 1999년 이근안 사건으로 조사받을 당시 검찰에서 진술했다.

김근태는 검찰청 복도에서 기적적으로 아내 인재근을 만나 고문을 폭로한 그 힘으로 검찰에서 묵비권을 고집하며 버틸 수 있었다. 묵비권의 대가는 참으로 비쌌다. 김오수 판사가 증거보전 신청을 기각할 때의 이유도 묵비권 행사였고, 검찰에 의한 가족면회 금지의 이유도 묵비권 행사 때문이었다. 1심 재판장 서성 판사에 의한 면회금지 결정에도 진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죄증을 인멸할 상당한 우려가 있다는 것이 핑계였다. 김근태는 변호인 접견도 1차 공판을 열흘 앞둔 12월9일에 가서야 할 수 있었고, 가족면회는 1차 공판을 마친 뒤에야 할 수 있었다. 서성 판사의 면회금지 조치는 김근태를,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차단해버린 야비한 조치였다.

묵비권의 또다른 대가는 민청련 간부들에 대한 전면적 구속과 지명수배였다. 1985년 10월 초순 최민화, 김희상, 김종복 등 민청련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된 것이다. 경찰에서의 신문조서는 본인이 법정에서 부인하면 증거능력이 없지만, 검찰에서의 신문조서는 본인이 법정에서 부인해도 증거능력이 있다. 그런데 김근태가 뻗대면서 ‘가당치 않게’ 묵비권을 행사하자, 검찰은 ‘증거의 왕’인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 간부들을 대거 구속하여 그들의 신문조서를 김근태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삼으려 했다. 검찰이 김근태에게 묵비권을 고수하면 오히려 큰 불이익을 입게 될 것이라고 거듭했던 협박이 현실화한 것이다.

‘고문 및 용공조작시비에 대한 대응논리’


바깥에서 끊임없이 고문조작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1985년 11월 안기부는 <최근의 학원 좌경 폭력 소요 배후사건 수사과정 시비에 대한 진상>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김근태 등의 고문 주장이 모두 이들의 구명과 정치투쟁 가속화를 위해 재야 운동권세력들이 허위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날짜 미상의 또다른 보고서는 제목 자체가 <허구적 주장의 배경>이었다. 이 보고서는 김근태가 “고문 주장과는 달리 일절의 흔적이 없고 얼굴색도 건강, 보행 및 거동도 정상”이라며, 변호인이 제기한 증거보전 신청을 김오수 판사에게 ‘강력 조정’해 기각 결정토록 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술했다.

국정원 존안 문서에는 안기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최근의 학원 좌경 폭력 소요 배후사건 수사과정 시비에 대한 진상>과 서울지검 공안부가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고문 및 용공조작시비에 대한 대응논리>라는 두 편의 보고서가 남아 있다. 이 두 보고서는 서로 다른 두 기관에서 각각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목차에서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작성했거나 거의 베껴 썼다 싶을 정도로 유사하다. 아마도 안기부가 작성한 보고서를 서울지검에서 조금 수정하여 유관기관에 배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안기부의 보고서는 검찰 명의의 보고서에 비해 사건의 ‘진상’을 “김근태는 검찰수사 시 자신에게 불리한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였으므로, 가혹행위나 진술강요조차 없었음이 자명하고 경찰 수사과정에서도 폭행,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 사례는 일체 없었으며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임. 왜냐하면 경찰수사 시의 자백은 본인이 공판정에서 부인하면 증거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가혹행위를 하여 자백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임”이라고 하여 좀더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보고서들 역시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에 따라 검찰수사 과정에서 동 사실의 진부를 조사하였으나 고문의 흔적을 일체 발견할 수 없고, 얼굴색도 건강할 뿐만 아니라 보행이나 거동에 고문의 의심을 가질 만한 여지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며, “동인은 자신의 죄상을 은폐하고, 처벌을 면해보려는 군색한 방편으로 검사의 신문에서조차 시종일관 묵비하는 등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 가족이나 변호인들을 만날 때 수사기관에서의 고문 사실을 왜곡 주장할 가능성이 있음”이라고 결론지었다.

‘좌경세력’의 단계별 처리계획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1985년 11월 안기부는 김근태 등이 정치적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대응논리를 개발한 후, 12월에는 6단계에 걸친 장기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문제권 단계별 처리계획>을 세웠다. 안기부는 보고서의 목적을 “제5공화국 후반기 정국 안정 도모는 물론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 등 국제행사의 성공적 수행과 88 평화적 정권교체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민민련(민통련) 등에 대한 단계별 소탕 처리 계획을 수립 시행”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1985년 12월1일부터 1986년 2월28일까지 민청련 관련 수사 종결, 홍보 계획, 조직 완전척결, 공판대책 강구 등의 시행 계획이 담긴 1단계, ‘민민련 등 문제권 관련 조사 착수’, 홍보 계획, 예상 상황 적극 대처, 공판대책 강구 등의 시행 계획이 담긴 2단계 처리 계획을 비롯하여 비상조치 발동까지 이어지는 총 6단계의 처리 계획을 담고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민청련은 “관련자 전원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엄단”되어야 했다. 안기부는 민민련 등 문제권의 경우 “전원 구속 엄단 조사, 문제단체 척결 및 문제권 소탕, 사안에 따라 국가보안법 적용 검토, 사회안정 풍토 정착”을 기본방침으로 관계기관대책회의 개최를 통해 대처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집행을 위해 안기부는 검찰과 법무부에 각각의 역할을 부여했다. 여기서 검찰에 부여한 역할을 살펴보면, ‘시행 계획 1. 수사종결’ 단계에서 “김근태 등 관련 구속자(7명) 관리 철저, 공소유지 만전”과 “묵비권 행사중인 김근태 공소사실 추가 보완” “반성문 제출한 최민화(부의장), 김희상(대변인) 및 이을호(정책실 부실장) 등 3명 계속 설득, 공소유지”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행 계획 2. 홍보 계획’ 단계에서는 대학가 방학 후인 86년 1월 중 보도문 초안을 작성해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 기자회견 형식으로 사건을 발표, ‘시행 계획 3. 조직 완전 척결’ 단계에서는 ‘잔존세력’이 “계속 불순활동 자행 시 의법 조치”해야 하고 ‘시행 계획 4. 공판대책 강구’ 단계에서는 법원과 협조하에 공판기일을 결정하고 ‘최고형’을 선고하도록 했다.

안기부의 공판대책

연출자 안기부가 재판부라는 광대에 부여한 역할은 좀 길지만 원문대로 볼 필요가 있다.

○ 관련자 전원 중형 선고, 엄단 조치 - 검찰, 사전 법원 협조 최고형 선고

○ 1심 공판, 최소한 개학 전 종료

- 피고인별 분리 심리

- 검찰, 법원과 협조 공판기일 결정

- 주 1회 이상 공판 개정

* 피고인 묵비권 행사, 방청객 소란 난동 등 사정 발생 시 주 2회 이상 공판기일 변경 조정

○ 공판정 내외 소란 및 불순행위 저지

- 공판정 내외 병력 배치, 경비 강화

- 공판정 주변 검문검색 강화, 문제인물 출입 차단

- 방청객 소란행위 시 형소법 제281조(법정 경찰권)에 의거 필요조치 강구

○ 공판정 출입자 통제 및 피고인 호송방법 결정

- 방청권 제한발부(가족 1매, 일반 방청권 20매 내), 학생, 문제인물 출입 엄격 통제

- 출정 거부 피고인 순화, 최단시간 내 출정

- 입퇴정 시 불순구호 제창 등 소란행위 강력 저지

- 피고인은 최단시간 내 입퇴정, 가족 및 학생 등과의 접촉 대화 차단

○ 공판정 내 대정부 비난발언 등 정치선전 강화 강력 저지

- 피고인, 변호인 등 공소사실 이외 발언 즉각 저지

* 필요 시 일시 휴정 등 공판절차 최대 활용, 탄력적 운용

- 정치성 색채 문제인물 증인신청 시 기각, 최소인원으로 조정

○ 공판상황, 사실보도에 국한

- 문공부, 사전 언론사 협조

- 사실보도에 국한 축소 보도

○ 유관기관 공조, 변호사 사전 순화

- 재판부 기피신청 예방

- 정치사건화 저지

○ 피고인, 변호인 등 재판부 기피신청 시 신속 대처

- 법원과 협조, 최단기일(16일) 내에 신속 처리

- 1심 구속만기일 임박 시에는 “급속을 요한다”는 이유로 신속 처리(형소법 22조)

재판은 꼭 이대로 진행되었다. 딱 하나 공판대책에서 어긋난 것은 “1심 공판, 최소한 개학 전 종료”라는 방침에 비해 1심이 끝난 것이 1986년 3월6일이었다는 점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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