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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14 20:36 수정 : 2009.12.14 20:36

안기부는 1984년 퇴임한 김중서 대법원 판사의 자리에 김형기 형사지법원장을 앉히기 위해 그와 경합중이던 정기승 민사지법원장에 대한 흠집내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정기승 역시 김형기 못지 않게 정권에 협조적인 인물이었고, 이런 이유로 1988년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는 수모를 겪었다. 사진은 1988년 7월 그의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됐다는 소식에 환호하는 시민들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정치감각 뛰어난 후순위 후보 적극 밀어
2차례 ‘무죄판결’ 엎고 최종 상고 기각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모두 유죄 확정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1. 송씨 일가 간첩사건과 사법부(7)

예정된 유죄 확정

1984년 11월27일 대법원 형사2부(재판장 이정우, 주심 김형기, 배석 정태균·신정철)는 송씨 일가 사건 피고인과 변호인들의 상고를 기각, 마침내 유례없는 핑퐁재판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미 재상고심 무죄판결 때 대법원이 안기부에 “다음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할 예정”이라고 해명한 것처럼 판결의 결과는 예상된 것이었다. 유죄를 확정지은 재재상고심의 주심 김형기 대법원판사가 1984년 7월20일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법원판사에 선임된 것은 송씨 일가 사건의 ‘정책적’ 처리와 무관하지 않다.

대법원에서의 재판은 13명의 판사 중 대법원장을 제외하고 4명씩 1개의 부(部)를 형성하여 진행되었다. 송씨 일가 사건의 상고심은 대법원 제1부(주심 이일규), 재상고심은 제3부(주심 김덕주)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사건이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가게 되면 제2부에서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침 제2부 소속의 김중서 대법원판사가 정년퇴임하게 되어 인사 요인이 발생한 것이다. 송씨 일가 사건이 무죄로 확정될 경우, 앞으로 간첩 수사는 불가능하다며 전전긍긍해 온 안기부로서는 두 차례의 무죄판결을 뒤엎고 과감히 유죄판결을 확정해 줄 새로운 대법원 주심 판사가 필요했다. 5공화국 성립 이후 실질적으로 첫 번째 대법원판사 인사에서 지난 3년간의 행적이 판단 기준이 됨은 당연한 일이었다.

안기부가 바라는 대법원판사의 기준


신임 대법원판사의 선임을 약 석 달 정도 앞두고 1984년 4월9일 안기부는 <김중서 대법원판사 정년퇴직 예정에 따른 후임 판사 경합설 등 관련동향보고>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법원 내에서는 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이 예상되는 가운데 후임자로 등장되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배후 영향력자들을 수시 접촉, 지원해줄 것을 은밀히 당부하고 있다는 바, 후임 거론자 별 법원 내 여론 다음과 같음”이라고 한 뒤, 유력한 후보자로 거론되는 박우동 법원행정처 차장, 김형기 서울형사지법원장, 정기승 서울민사지법원장 등 세 사람에 대한 인물평과 학력, 경력 등을 소개했다.

안기부 보고서에 처음 거론된 사람은 대법원판사 0순위라 불리는 보직인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있던 박우동 판사였다. 박우동 판사는 퇴임 후 간행한 회고록에서 간첩 사건(강희철 사건)의 수사와 재판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안기부의 입장에서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박우동 판사에 대해 보고서는 “본명은 학구적(민사법)이고 우수하나 다소 비판 성향의 소유자로 대법원판사로 임명될 시 이일규 판사와 유사한 야적 성격으로 정책적 사건에 다소 비협조할 것이라는 평”이라면서, 그가 “독선적이고 깐깐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송씨 일가 사건이 안기부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일규 대법원판사와 비슷한 성격으로, “정책적 사건”의 처리에 “비협조”적일 것이라는 평가는 안기부 입장에서는 충분한 비토 사유가 되고도 남았다. 당시 대법원장은 대법원판사를 제청할 때 대법원장이 1명을 선정하여 제청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 후보를 추천하여 청와대의 낙점을 받았다. 안기부의 보고서에서 부정적으로 거론된 박우동판사가 송씨 일가 사건을 다루게 될 대법원판사 후보 복수 추천에서 배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형기냐 정기승이냐

안기부가 1984년 4월9일자 보고서에서 두 번째로 거론한 인물은 실제로 대법원판사로 임명된 김형기 서울형사지법원장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유태흥 대법원장의 후광으로 차기 대법원판사 보임에 가장 유리하다는 평”이라며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정책적인 사건 처리에 무난할 것으로 적임자”라는 평을 받고 있으나 “민사법에 다소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흠”이며, 성향에 대한 ‘세평’은 “온건, 대인관계 원만하다는 평”을 받는다고 했다. 또다른 후보자 정기승 서울민사지법원장에 대해서는 “연령이나 경력면에서 서열1위로서 차기 대법원판사에는 최적임자이나 충남 공주 출신으로서 제이피(JP·김종필) 계열이라는 오해가 다소 불이익하다는 평”이며 “그 이외에도 유태흥 대법원장의 후광으로 좋은 자리인 민사지법원장직에 너무 오래(3년간) 있었다는 것이 감점 요인으로 대두”하고 있으며 “민사법에는 정통하나 형사소송에 다소 실력 부족이라는 것이 흠”이고, ‘세평’으로는 “온건, 업무에 치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언론에 신임 대법원판사의 내정 보도가 나오기 3일 전인 7월13일자의 <유태흥 대법원장, 각하 알현 예정 동향보고> 보고서에서는 유태흥 대법원장이 정년퇴임한 김중서 대법원판사의 “후임자 임명 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각하를 알현할 예정”이라며 김형기 형사지법원장과 정기승 민사지법원장이 추천될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알현’이라는 봉건적인 말을 보면 당시 안기부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보고서는 두 사람이 “다 같이 국가관이 투철하고 직무에 성실하여 능력이 있는 자들로 누가 되더라도 손색이 없다”면서도, “정기승은 김형기보다 지법원장을 먼저 지냈고 고법부장 판사도 먼저 됐기 때문에 서열상 1위로 당연히 정기승이 먼저 대법원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여론”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김형기에 대해서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정책적인 사건 또는 안보사건 처리를 누구보다도 잘해낼 것”이라고 ‘정책적인 사건’의 처리를 앞두고 있는 안기부가 그를 선호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경합자 흠집내기

이 두 편의 보고서를 보면, 안기부가 미는 후보의 경쟁자들을 안기부가 어떻게 흠집 내는지 잘 알 수 있다. 안기부로서는 안기부가 선호하는 김형기에 비해 서열과 경력이 앞서는 정기승을 2순위로 돌리기 위해서는 정보의 왜곡이 필요했다. 안기부가 지적한 후보자들의 단점은 모두 사실이 아니거나 왜곡된 것이다.

안기부 보고서는 정기승이 “유태흥 대법원장의 후광으로 좋은 자리인 민사지법원장직에 너무 오래(3년간) 있었다는 것이 감점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정기승은 민사지법원장이었고, 김형기는 형사지법원장이었는데, 두 사람은 1981년 4월21일 같은 날 임명되었으니, 정기승만 좋은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1980년 이후에는 “서울형사지방법원이 그 규모가 훨씬 큰 서울민사지방법원보다 상서열의 지위”에 있었다. 또 정기승이 1988년 6월 이른바 2차 사법파동 이후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지명되어 국회에 임명동의안이 제출되었을 때, 캐스팅보트를 쥔 김종필의 비협조로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것을 보면 꼭 제이피 계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안기부가 보고서에서 김형기에 대해서는 “민사법에 다소 실력이 부족”하고, 정기승에 대해서는 “민사법에는 정통하나 형사소송에 다소 실력이 부족”하다고 기술한 것은 안기부의 오만이 극에 달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형사소송에 다소 실력이 부족하다”는 정기승은 김형기의 후임으로 형사지법원장에 임명되었는데, 형사소송에 실력이 부족한 사람을 형사지방법원장에 임명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또 “민사법에 다소 실력이 부족하다”는 김형기는 일찍이 1959년 <민법총칙>을 저술한 바 있고 서울민사지법에서도 1975년부터 2년간 부장판사로 재직했다. 안기부 보고서가 실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한 사람들은 30년 가까이 법관으로 재직하여 대법원판사로 거론되는 사람들이고, 또 세명 모두 대법원판사가 되었고, 대법원장 선임 때 모두 물망에 오른 최고 엘리트들이었다. 안기부 조정관에게 “다소 실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김형기의 대법원판사 임명

김중서 대법원판사의 정년퇴임이 6월29일이었고 후임 논의가 이미 4월 초에 상당히 진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 판사의 퇴임 이후 보름 동안 후임자 제청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법원 내에서 0순위로 꼽히는 법원행정처 차장 박우동과 서열과 경력이 앞서는 정기승을 제치고 안기부가 가장 선호하는 김형기가 복수추천에서 1순위로 올라가도록 대법원장 등 사법부 수뇌부를 설득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정기승 역시 충분히 정권에 협조적인 사람이었고, 또 대법원장에 지명되었다가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는 초유의 일을 겪은 이유도 형사지법원장 재직 시 시국사건을 정권의 요구대로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기부는 왜 정기승 대신 김형기를 적극 밀었던 것일까? 김형기는 1977년 이후 형사지법 부장판사-서울고법 형사3부 부장판사-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형사지법원장을 거쳐 대법원판사로 임명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고시 1기 후배인 정기승보다 고법부장 승진이 5년이나 늦었던 김형기가 정기승보다 앞서 대법원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이후 5공정권과 협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석부장판사에서 형사지법원장으로 수직 상승한 것은 김형기뿐이다. 법원장 시절, 김형기는 본란 22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기부의 학생시위 주동자 엄벌 방침에 적극 호응했다.

김형기가 7월20일 대법원판사에 임명되자, 안기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사건에 대한 보고자료를 만들었고, 8월3일 수사단장과 정형근 법률보좌관이 “유죄판결 유도”를 위해 김형기의 집으로 찾아갔다. 사건이 공식적으로 김형기에게 배당된 것은 50여일 후인 9월20일이었다. 11월27일 김형기는 안기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송치 후 2년 4개월 만에 전원 유죄확정”을 시켜주었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그렇게 유죄가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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