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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07 18:55 수정 : 2009.12.07 18:55

1984년 8월24일 열린 송씨일가 사건 선고공판에서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 김석수 판사는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안기부와 만나고, 밥 먹고, 골프 친 것과 유죄판결 사이의 ‘인과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사진은 2002년 9월 총리 취임식장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김 전 판사. <한겨레> 자료사진

“새로운 증거 찾으면 대법원 유죄 확정”
항고 땐 ‘유죄’길 튼 ‘보충설시’ 의혹 사
검찰·재판부·안기부 수사단 ‘골프 회동’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0. 송씨 일가 간첩사건과 사법부 (6)

대법원에서 다시 무죄판결

오병선 판사로부터 재항소심에서 유죄를 받아낸 안기부는 대법원의 재상고심을 담당할 재판부(재판장 정태균, 주심 김덕주, 배석 윤일영·오성환)가 결정되자 <간첩 송지섭사건 상고심 재판부 구성 상황보고>를 올렸고, 공판일자가 결정되자 <간첩 송지섭 사건 파기 환송 후 상고심 공판 예정보고>를 작성했다. 뒤의 보고서에는 참고사항으로 “본 사건 담당 재판부 주심 대법관 김덕주(51)는 신원특이점이 없고, 과거 업무사건에 대해는 대체로 원심판결을 인정하는 등 비교적 온건하다는 세평”이라는 서술과 함께 그의 신원기록이 첨부되어 있었다. 안기부는 유죄판결이 나올 것을 낙관한 듯 재상고심 선고가 나오기까지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도 않았고, 김덕주 판사 등 재판부의 동향 파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1984년 4월24일 믿었던 김덕주 대법원 판사는 “83.8.23 상고심에서 이일규 대법관이 검사작성 피의자 신문조서는 임의성 없어 증거능력이 없고 장기 불법구속(75-116일)으로 인한 강압에 의한 자백이라고 판결, 파기 환송한 것은 옳은 판단이며 하급심을 기속한다”며 무죄취지로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당황한 안기부는 바로 법원 및 검찰의 동향을 파악해 다음날 <간첩 송지섭 사건 상고심 공판상황 보고>를 올렸다. 대검 공안부는 “담당 재판부인 주심 김덕주 대법관이 선임 이일규 대법관의 판결에 기속, 판결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앞으로 “검찰의 명예를 걸고 공판관리에 만전을 기할 방침”을 취했다. 대법원이 적극적으로 해명한 내용은 안기부에게 나름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대법원 측(비서실장 가재환)에서는 이일규 대법관의 체면유지 등 대내 사정에 의하여 대법원장의 사전 양해 하에 정책적으로 파기한 것”으로 “다음 상고심에서는 유죄를 선고할 예정이니 관계기관의 큰 오해 없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기부도 이에 수긍한 듯 “대법원의 의도를 면밀 파악 대처하면서 검찰로 하여금 공판 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협조하고 당부에서는 보강증거 제공(2심) 등 필요로 되는 방식을 강구”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유죄로 가는 길, ‘보충설시’

뒤에 대법원장을 지낸 김덕주 판사의 판결문에는 ‘보충설시’가 붙어 있어 이후의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올 여지를 남겼다. ‘보충설시’는 “하급심이 상급심의 판결에서 파기이유로 설시한 위와 같은 전제사실을 증거능력이 있다고 하기 위하여는 임의성이 없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자백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그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증거가 불충분함에도 원심이 유죄로 인정한 것은 위법이다”라며 “자백의 임의성이 없다고 의심하게 된 사유와 결과 사이에 적극적으로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이 인정되면 유죄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우 복잡한 듯 보이지만, 불법 장기 구금이나 고문(자백의 임의성이 없다고 의심하게 된 사유)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백의 내용은 고문이나 불법구금과 상관없이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되면 유죄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고등법원이 사실관계의 판단에서 이런 내용을 판결문에 담아 다시 대법원으로 사건을 보내면 대법원에서 유죄로 확정 판결할 수 있다는 뜻을 제시한 것이다. 이 때문에 변호인들은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이 ‘보충설시’가 ‘타협’이나 ‘함정’이라고 비판한다. 안기부 역시 날짜 미상의 <간첩 송지섭 사건 상고심 공판상황보고>에서 ‘보충설시’ 내용을 요약한 후 “이후 2심에서는 대법원에서 주장하는 방향으로 재판(판결문설시)하면 상고심 유죄판결 가능”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안기부는 대법원에서 다시 무죄판결이 나왔음에도 이일규 판사의 첫 번째 무죄판결 때와는 달리 김덕주 판사를 미행하거나 뒷조사를 하지는 않았다.

‘보충설시’의 가르침을 따라

대법원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공은 다시 고등법원으로 넘어갔지만, 안기부는 여전히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1984년 5월15일 사건 담당 재판부가 서울고법 형사 1부(재판장 김석수, 배석 박상선, 유창석)로 결정되자, 안기부는 <간첩 송지섭 사건 공판 대책 자료>를 작성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안기부는 “검찰로 하여금 공판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협조하고 당부에서는 보강증거 제공 및 2단과 협조, 필요로 되는 방책을 강구”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검찰 공안부를 통해 재판부의 동향을 파악했다. 공안부는 “2심 재판부에 당부 존안 간첩통신문 자료를 보완 설명”하고, “(재상고심의 ‘보충설시’에 맞춰) 형식상 하자 없는 판결문의 설시를 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했다. 우선 “상급심이 파기환송 이유로 설시한 검사작성의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만한 새로운 증거수집이 곤란”했다. 이미 1년 넘게 안기부가 총력을 기울여 수사했는데 무슨 새로운 자료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검찰은 “고법 재판부(김석수 부장판사)에 당부 간첩지령 통신자료 등 정황증거를 제출, 간첩행위에 대한 실체를 인정받게 할 수는 있으나 하급심은 상급심의 판결에 기속된다는 대원칙 하에서 사실상 불가하다”라는 뜻을 보였다. 이 보고서는 오병선 판사에 대한 고등법원 주변의 부정적인 여론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상황 하에서 새로 담당한 김석수 부장판사가 어떠한 법적논리로 재판을 하게 될 것인지 의문시”된다고 우려했다.

안기부는 두 가지 공판 대책을 세웠다. 먼저 안기부 수사관과 검거간첩 등을 증인으로 내세워 주요 피의자들의 간첩 호출부호가 안기부에 보존되어 있는 통신지령카드와 일치한다는 것을 ‘새로운 증거’로 제시했다. 또 서울구치소 교도관을 증인으로 신청해 “검사의 피고인 구치소 신문 시 입회한 사실이 있는데 조사는 문답식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으며 검사가 피고인들에게 폭행, 협박한 사실과 조사 당시 안기부 수사관이 참여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하게 했다. 이는 검찰 자백의 임의성을 의심하게 만든 사안과 자백 내용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음을 입증하려는 시도였다. 안기부는 대법원장 비서실장이 다음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하겠다고 밝혔음에도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위 <공판대책 자료>를 보면 “파기 환송 시 대법원 측에서 언급한 바 있는 차후 유죄 판결 보장설을 뒷받침하는 대법원과 고법의 ‘공작 차원’에서의 작업 여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대책 강구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의 전망이 희박할 경우”에는 “당부 부장, 법무부장관 등 장관급의 고위층에게 대법원장과 협조, ‘정책적인 차원’에서 유죄판결을 유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안기부, 담당 재판부 직접 접촉

공판 날짜가 다가오자 안기부는 담당 재판부를 직접 찾아가기 시작했다. 주로 법원 상층부에 압력을 넣는 식으로 행동해 온 안기부로서는 몹시 초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송지섭 사건 2차 파기환송 후 공판대책 진행상황 보고>라는 보고서에는 안기부가 어떤 방식으로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담당 재판부를 접촉했는지가 일자별로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7월10일 첫 공판을 앞두고 안기부 수사단장과 담당 과장, 그리고 정형근 법률보좌관은 담당 재판부를 방문하여 “송지섭 사건 배경 및 간첩수사의 애로점 등을 설명”하고 “유죄 판결 유도”를 했다. 첫 공판이 끝난 뒤인 7월13일에는 담당 과장 등이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다시 찾아 “보강 증거 등 공판대책 협의, 유죄판결 유도” 등을 했다. 놀라운 것은 아직 고등법원에서의 공판이 두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음에도, 안기부는 대법원의 재재상고심에서 사건을 맡게 될 대법원 판사 김형기에게 보고하기 위한 <송지섭 사건 공판상황 및 대책자료>를 작성하여 8월3일에 집으로 찾아가는 등 접촉을 시작했다는 점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안기부의 수사단장은 8월4일에는 고등법원 재판장 김석수 판사의 집으로 찾아가 같은 자료를 전달하고 유죄판결을 유도했다. 8월9일 3회 공판이 끝난 뒤인 8월12일에는 수사단장이 김석수 부장판사와 점심을 같이 했고, 13일에는 안기부 수사단장과 담당 과장, 검찰 측에서 이건개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담당 임휘윤 검사가 재판부와 점심을 같이했다. 그리고 구형 공판 전날인 8월15일에는 안기부의 수사단장, 담당 과장, 정형근 법률보좌관, 검찰 측에서 이건개 부장 등 3명, 법원 측의 두 배석판사가 골프를 쳤다.

유죄, 또 유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8월24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 김석수 판사는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신 피고인들의 형량은 한층 낮아져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단 사건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송지섭만이 간첩사건 최저형량인 7년을 넘겼을 뿐, 나머지는 모두 최저형량에 못 미치는 낮은 형을 받았다. 김석수 판사는 안기부 수사관이나 교도관들의 증언을 받아들여 검사 심문에 안기부 수사관이 직접 참여한 사실이 없고, 부인하면 안기부에 돌려보내겠다고 검사가 협박하지도 않았으며, 피고인들이 조서를 열람하고 서명 날인했다는 이유로, 자백의 임의성이 없다고 의심하게 된 사유와 자백 내용 사이에 적극적으로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죄의 근거로 삼았다. 안기부와 만나고, 밥 먹고, 골프 친 것과 유죄판결 사이의 ‘인과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법관의 판단에서 법과 양심과 안기부는 각각 어떤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었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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