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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1.09 18:38 수정 : 2009.11.09 18:49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은 암흑의 독재시절 사법부의 굴욕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1982년 국가안전기획부가 이 사건을 발표하면서 내놓은 ‘증거품’. <한겨레> 자료사진

숙청된 거물 공작원 ‘남파’ 조작
4개월 불법구금·고문 흔적 무시
조작 흔적 역력한 엉터리 공소장
‘유예’ 의견에도 안기부 기소결정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6. 송씨 일가 간첩사건과 사법부(2)

송충건을 찾아라

안기부는 송충건이라는 충청북도 출신의 월북자를 중심으로 북한이 지하당을 건설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송충건의 성은 송이고 충은 충청도이고 건은 지하당 건설이라고 풀이한 안기부는 충북 출신 월북자 중 송씨 성을 가진 22명과 연고자 324명을 내사한 결과, 한국전쟁 중 월북한 송창섭을 송충건으로 지목했다. 즉 이 사건은 송창섭 남파라는 확실한 정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충북 출신의 송씨 월북자라면 송창섭일 것이라는 추정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송창섭은 1960년 4월 남파되어 일본 유학 시절의 동창인 김영선 의원(장면 내각의 재무장관 역임)을 접촉한 적이 있는 인물인데, 김영선은 이 사실을 당국에 신고했다. 5·16 후 군사정권은 민주당 요인들이 간첩과 접촉했다며 이를 ‘용공 음모’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때 송창섭은 서울의 친척집에서 부인 한경희와 장녀 송기복 등을 만나고 갔다. 송창섭이 남파되었던 사실을 확인한 당국은 한경희 등에게 그를 만난 적이 있나 추궁했지만, 한경희는 완강히 부인했다. 그로부터 22년이 흐른 1982년 3월 2일, 안기부 충북지부는 중학교 미술교사인 송창섭의 장녀 송기복을 수업 중 연행했다. 송기복은 일주일 동안 고문을 받으면서도 아버지를 만난 사실을 부인했다. 송기복은 필자에게 정말로 자신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를 만난 사실이 완벽하게 지워졌었다고 회고했다. 월북자 가족으로 이 땅에 살기 위한 자기방어기제의 놀라운 작동이었다. 일단 풀려났던 송기복은 다른 친척이 송창섭을 만난 사실을 실토하자 하루 만에 다시 잡혀갔다. 해안선이 없는 충청북도는 그때까지 단 한 건의 간첩 침투도 없었던 곳이었다. 바꿔 얘기하면 안기부 충북지부는 한 번도 간첩을 잡아 본 적이 없었다. 경험은 없고 의욕은 앞섰던 탓일까, 충북지부의 수사는 별 진전 없이 두 달 가까운 시간만 흘러갔다.

조작, 또 조작

충북지부가 사건을 주물러 터뜨리고만 있자 본부가 나섰다. 4월 27일자로 피의자들과 관련 자료를 인계받은 안기부 본부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려갔다. 충북지부가 애초에 밑그림을 너무 크게 그린 탓인지 본부가 속도를 냈어도 두 달여가 흐른 뒤에야 사건은 검찰에 송치되었다. 송기복이 구속된 것이 7월 2일이니 처음 연행일로부터 꼭 넉 달 만이었다. 안기부가 검찰에 보낸 <인지동행보고>나 <피의자신문조서> 등 수사서류를 보면 최초 연행일자는 6월 15일로 되어 있다. 안기부는 불법구금을 감추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했다.

안기부는 송창섭의 가족들이 22년 전 송창섭을 만난 사실을 밝혀낸 것을 엄청난 성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송창섭을 만났을 당시는 국가보안법에 불고지죄가 생기기 전이었다. 남파된 가족을 만난 뒤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처벌할 법적 근거는 없었다. 불고지죄가 있었다 해도 22년이라는 세월은 살인죄의 공소시효 15년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이었다. 안기부는 송창섭이 무려 여덟 번이나 남파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1960년의 남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작된 것이니 증거가 있을 수 없었다. 정말 참담했던 사실은 안기부는 송창섭이 남파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구상의 어떤 공작기관도 침투했던 사실이 신문에 대서특필된 공작원을 다시 그 지역에 침투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개연성은 차라리 작은 문제였다. 안기부는 최초의 제보자인 박정수를 통해 송창섭이 1968년도에 김일성이 직접 내린 지시로 숙청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찰, 바보인가 공범인가


송씨 일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송창섭씨의 젊은 시절 모습.
조작간첩사건을 조사하면서 한없이 절망스러웠던 것은, 안기부의 조작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검찰이 그럴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안기부가 넉 달간 공을 들였어도 서류는 너무나 엉성했다. 북에 가서 밀봉교육을 받고 왔다는 송기준이 인천 만석동 부두에서 간첩선을 타고 입북하였다가 다시 만석동 부두에 간첩선을 타고 내렸다는 검찰 조서와 공소장을 보았을 때 필자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철책을 통해 민간인이 월북을 해도 사단장까지 보직해임되는데, 간첩선이 버젓이 인천부두에 배를 대고 간첩을 태우고 갔다가 데려다 준단 말인가? 송지섭의 경우 공소장에 기재된 입북 및 복귀 루트를 따져보면, 휴전선을 넘어 30분을 걸어와 양주 덕정에서 버스를 타고 의정부로 나왔다고 하는데 덕정에서 가장 가까운 휴전선은 직선거리로 20㎞가 넘어 차를 타도 30분에 갈 수 없는 거리다. 안기부 서류에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대목이 들어 있을까? 혹 안기부에 그래도 양심적인 사람이 있어 검찰이나 법원에서 풀려나라고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안기부에서 넘어온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그대로 검찰조서와 공소장에 반영한 검사들은 바보천치일까, 직무유기일까, 아니면 조작의 공범일까? 이런 자들이 얼마 전까지 고검장이나 법무장관이었다는 것이 한국 검찰의 아픈 현실이다.

안기부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검찰의 신문조서는 법률적 효력이 크게 다르다. 사법경찰관 작성 신문조서는 피의자가 법정에서 부인하면 증거능력이 없지만, 검사 작성 조서는 피의자가 부인한다 해도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는 차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조작간첩 사건의 피의자들은 법률적 지식도 없었고 변호사들의 조력도 얻지 못했다. 그런 피의자들에게 검사들은 안기부에선 인정하고 여기서는 왜 부인하냐며 다시 안기부로 보낸다고 윽박질렀다. 송기준이 임휘윤 검사 앞에서 안기부 조사 내용을 부인하자 검사는 수사관을 불러 “이 사람 또 부인한다. 이야기 좀 잘해주지”라고 말했다. 피의자가 안기부 조서 내용을 부인하면 어김없이 안기부 조사관들이 나타나 “너 왜 검사 앞에서 부인하느냐. 자백하면 기소유예나 집행유예로 내보내주려고 상사들과 다 합의가 돼 있는데 왜 엉뚱한 소리 하느냐. 다시 가서 조사받아야겠다”고 협박했다.

분단이 네 잘못은 아니나 네가 간첩 되라

송지섭, 송기준 두 사람의 경우 안기부 수사관의 구치소 접견 기록이 남아 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김 검사에게 이야기를 들었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그때는 모든 걸 시인하고 이제 와서 번복을 해?” “듣기로는 사실을 자꾸 부인한다는데 안기부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고 왜 또 다른 소리를 하고 그러나요?”라며 검찰에서의 혐의사실 부인을 힐난했다. 실제로 송기준의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기록을 보면 7월 9일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에서 입북 부분을 부인했던 송기준이 안기부 수사관의 접견 이후에는 입북 부분을 비롯한 대부분의 혐의를 시인했다.

베스트셀러 형사소송법 교재를 쓴 백형구 변호사는 담당 판사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국정원 과거사위와의 면담에서 송기복의 사연을 전했다. 검찰 조사 당시 고문의 상처가 남아 있던 송기복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옷을 벗고 고문당한 모습을 보이며 사진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송기복의 강력한 요구에 검사가 사진을 찍긴 했지만, 검사는 송기복이 안기부에서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안기부 수사관을 불러 이대로는 기소 못 한다며 도움을 청했다. 수사관은 구치소로 송기복을 찾아가 안기부에서의 자백을 그대로 인정하도록 종용했다. 송기복은 상고이유서에서 “검사 수사 도중에 두 번씩이나 수사관이 방문하였고 이러한 심리적인 공포 속에서 안기부의 진술서를 그대로 읽어나가는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검사 임휘윤은 이 모든 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그는 “분단된 조국이 당신의 잘못만은 아니요.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건이니 시인하라”, “당신만 혼자 아니라고 부정해도 당신의 친척 동생들이 전부 시인했는데, 어떻게 당신은 홍수 속으로 떠내려가는 무리 중에 혼자만 떠내려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겠는가. 혼자만이 독야청청할 수 있겠는가”라고 역설했다.

있으나마나한 기소독점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검찰은 마침내 1982년 8월 4일 이들을 기소했다. 이 과정에서 김경한, 임휘윤 검사는 다시 한 번 안기부의 ‘조정’을 받았다. 안기부 1국에서 1982년 8월 4일 작성한 <서울·충북 거점 간첩단 사건 피의자 한영희, 송광섭, 김춘순 처분의견>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담당검사는 “한영희, 송광섭, 김춘순 등의 편의제공 및 회합 부분에 대한 공소유지는 가능하나 범증이 경미하고 상피의자들과의 친족관계인 점 등을 감안, 기소유예 처분”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안기부는 이에 반대하며 “당부에서는 위 피의자들의 범증이 경미하여 구속 해제하더라도 불구속 기소처리 하도록 협의한 바 있다”면서 검찰 측과 재협의 처리하겠다는 조치 의견을 밝혔다. 이 보고가 올라간 바로 그날 임휘윤 검사는 편의제공 혐의로 한영희를, 회합 혐의로 송광섭, 김춘순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의 힘의 원천은 기소독점권에 있다. 그러나 안기부 손을 거친 사건은 안기부가 기소 여부를 결정했다. 이는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 조정 규정> 제9조 “검사가 주요 정보사범 등에 대해 공소보류 또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사건을 기소하거나 기소의견으로 송치된 사건을 공소보류, 불기소 처분을 할 때 안기부장과 협의를 해야 한다”에 기반한 것이다. 대통령령에 불과한 이 규정은 형사소송법상의 기소독점주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년 전 이 조항에 항의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만 구상진 검사의 사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김경한, 임휘윤 검사는 아무런 이의 제기도 없이 안기부의 ‘조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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