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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1.02 18:13 수정 : 2009.11.02 21:00

지난 8월 28일 열린 재심 재판에서 2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당사자 송기복(맨 오른쪽)씨 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송기복씨의 외삼촌 한용수씨, 동생 송기홍씨와 육촌 송기준씨. 송씨 일가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명칭을 안기부로 바꾼 뒤 옛 위상을 회복하고자 대대적으로 준비한 사건이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독재정권, 불리하면 ‘간첩사건’
1000명중 진짜 간첩은 40명 미만
불법구금 기본…고문·증거조작도
대법원 판결 거스른 ‘불법’ 판결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5. 송씨 일가 간첩사건과 사법부(1)

조작간첩 사건과 사법부

첨예한 대치상황이 계속된 한반도에서 남과 북은 각각 상대 진영에 많은 공작원을 침투시켜 정보 수집, 반정부 지하조직 구축, 파괴, 납치 등의 활동을 시도했다. 남과 북의 체제에게 상대편이 침투시킨 간첩을 적발해내는 작업은 어느 무엇보다도 우선순위가 높은 과제였다. 1968년의 1·21사태 당시 북쪽이 파견한 무장공작원들이 청와대 턱밑까지 침투했던 것에서 보듯 위기는 분명 실재했다. 한국 정부는 다양한 루트로 침투해 들어오는 북쪽의 간첩을 막기 위해 방대한 방첩기구를 운영했다. 중앙정보부-보안사-육해공군-경찰에 걸친 이들 기구의 인력과 예산은 1·21사태 등을 거치면서 크게 증강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간첩을 막아내야 한다는 것은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국민 모두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국가 대사였다. 국정원 과거사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96년까지 당국은 모두 4495명의 간첩을 적발했다. 북쪽이 침투시킨 간첩을 적발해내기 위해 관계당국이 벌인 노고는 치하받아 마땅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적발된 간첩의 상당수가 조작되거나, 무리한 법적용에 의해 간첩이라는 어마어마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독재정권은 정적을 제거하거나 불리한 정치적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1958년의 진보당 사건이나 1974년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대규모 공안사건은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간첩사건을 들여다보면 정말 ‘돈 없고 빽 없는’ 선량한 소시민들이 무고하게 간첩으로 몰린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 일차적인 책임은 불법 장기구금과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해 낸 수사기관에 있겠지만, 사법부 역시 조작 간첩사건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 보루라고 불리는 이유는 수사기관이 조작한 무고한 혐의를 재판에서 걸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1970년대와 80년대의 사법부는 그 구실을 포기했다.

1960년대까지는 북쪽에서 간첩이 정말로 많이 내려왔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20년이 흐르다 보니 전쟁 당시에 월북한 사람들을 남파시켜 봤자 금방 체포될 뿐 별 효과가 없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거치면서 남과 북은 서로 상대 지역에 공작원을 침투시키지 않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이 신사협정이 철저하게 지켜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남쪽 당국의 간첩 적발 통계를 보면 적발된 간첩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각각 1600명가량의 간첩이 적발되었던 것이 1970년대에는 681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1980년대에 적발된 간첩은 340명으로 다시 1970년대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1990년부터 96년까지는 모두 114명으로 80년대의 3분의 1로 감소했다. 북쪽이 보내는 간첩은 줄어들었지만, 남쪽 방첩기구의 인원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들은 간첩이 와도 걱정이지만, 어쩌면 간첩이 오지 않으면 더 큰 걱정이 생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줄어드는 진짜 간첩, 늘어나는 조작 간첩

필자가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조사한 바로는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생포되거나 자수한 1000여명의 간첩 중, 북쪽이 직접 파견한 ‘직파간첩’의 수는 30~40명을 넘지 않았다. 그 나머지를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순도가 떨어지는 함량 미달의 간첩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 중정-안기부가 사법부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주된 이유의 하나는 이런 함량 미달의 조작 간첩들이 유죄판결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사법부는 안기부의 이런 요구에 대체로 순응했다. 이런 요구를 거스른 법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법관은 정말 드물었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임을 호소하는 피의자들에게 바짓가랑이 한 번 걷어 올려 보라고 하는 판사가 없었던 것이 우리 사법부의 멍에이다.

1950년대에 남파된 공작원들 중에는 간첩죄가 아니라 간첩미수죄로 처벌받은 사람이 상당히 있었다. 그만큼 간첩죄가 엄격히 적용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간첩죄는 제멋대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80년대의 말도 안 되는 간첩사건 공소장을 읽노라면 남파공작원이 간첩죄로 처벌되지 않던 저 50년대가 태평성대로 느껴질 뿐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법부가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납북 어부들이 간첩으로 몰리지는 않았다. 당시 법원은 북에 억류된 상태에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일정한 정보를 제공하고, 돌아올 때 금품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런 행위는 형법상의 이른바 ‘강요된 혐의’로서 처벌할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70년대가 되면 납북 어부들은 간첩죄로 처벌받기 시작했다.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만, 적발된 간첩의 수를 결정하는 최대의 요인은 북이 얼마나 많은 간첩을 보냈느냐보다는 한국의 사법부가 간첩죄를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했느냐였다. 특히 신문에 난 공지사항이라도 적에게 알려질 경우 적의 이익이 될 수 있다면 국가기밀로 본다는 대법원 판례는 간첩의 범위를 무한정 넓혀 놓았다. 피의자가 기밀을 북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탐지만 해도 ‘목적 수행’으로 최고 사형까지 처해질 수 있게 되자 무전기나 난수표도 없는 함량 미달의 간첩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사기관에서 납북 어부나 재일동포를 고문하여 간첩으로 만드는 일은 너무 간단한 일이 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조작 의혹이 제기되는 간첩이 양산되었다. 만일 사법부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임을 호소하는 피의자에게 바짓가랑이라도 들어 올려 보라고 했다면 오늘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억울한 조작 간첩이 이토록 많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간첩이 줄어든 것은 80년대에는 정보기관의 위세에 눌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사법부가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독자성을 회복해 가면서 고문과 증거에 대해 엄격한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독립성을 일정하게 회복한 뒤, 수사기관이 80년대식으로 불법구금과 허위자백에 의해 간첩을 만들어 기소하면, 이제 공소유지가 불가능해지거나 무죄판결이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1982년 9월10일 안기부는 6·25 당시 충청북도 인민위원회 상공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한 후 남파된 송창섭에게 포섭되어, 서울·충북을 거점으로 25년간 간첩활동을 해 온 일가친척 28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고정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에 따르면 송창섭은 1957년 5월부터 1977년 2월까지 8차례에 걸쳐 남파되어 그 공로로 ‘북괴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으로까지 승진했다. 송창섭의 처로 남쪽에서 공화당 중앙위원을 지낸 한경희는 정계, 군수사기관에 근무했던 송지섭은 군, 사업을 한 송기준은 산업계, 서울시 공무원인 송기섭은 공무원 사회, 대학교수 한광수와 중학교 교사 송기복은 학원에 침투하여 국가기밀을 수집·보고했고, 이들은 4개 대학에 재학중인 자녀들까지 간첩조직에 끌어들여 학원 동향을 보고하는 한편 악성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학생들을 자극·선동했다는 것이다. 안기부는 이들이 사회 혼란을 조성할 목적으로 불순단체를 조직하여 부마사태, 광주사태, 10·26사태 등 중요사건 때마다 각종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고 동조세력을 규합해, 대정부 투쟁을 유도하는 등 25년간 장기 암약해왔다고 강조했다.

중앙정보부는 국가최고정보기관으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행사했지만,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여 권부 내에서 하루아침에 ‘역적 기관’으로 전락하여 주요 간부들이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문서를 압수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송씨 일가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명칭을 안기부로 바꾼 뒤 옛 위상을 회복하고자 대대적으로 준비한 사건이었다. 의욕이 과한 탓이었을까, 최초의 연행자인 송기복씨의 경우 무려 116일간 불법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안기부는 처음부터 이 사건에서 무리수를 많이 범했다. 게다가 이 사건에서는 여느 간첩사건과는 달리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 등 당대 최고의 인권변호사들이 변론을 맡았다. 그러다 보니 뜻밖에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와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되었다.

안기부는 이 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자 크게 당황하여 이 판례가 굳어진다면 앞으로 간첩사건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유죄판결을 내리도록 전력을 다해 법원에 압력을 가했다.

유례없는 핑퐁 재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상급심의 판결은 하급심을 기속하는 법이다. 그런데 안기부의 개입으로 고등법원은 재항소심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치받아 다시 유죄판결을 내렸고,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다시 무죄, 고등법원이 재재항소심에서 다시 유죄, 대법원이 재재상고심에서 마침내 유죄판결을 내려 2년4개월 동안 장장 7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관련자들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이 사건은 대법원장 3인 등 한국 사법부의 수뇌부가 모두 관련이 된 사건이었다. 사건 당시의 대법원장은 유태흥이고, 상고심과 재상고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린 이일규 판사와 김덕주 판사는 민주화 이후 연이어 대법원장을 지냈고, 재재상고심에서 유죄판결을 내린 김석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가 되었다. 또 재재상고심에서 유죄판결을 내린 김형기의 대법원 판사 선임에는 안기부가 개입했다. 송씨 일가 간첩사건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간첩사건을 둘러싸고 1980년대 초반의 안기부와 사법부와 검찰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여주는 가늠자이다. 2009년 8월28일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송씨 일가의 기막힌 사연이야 책 몇 권을 써도 다 이야기 못하겠지만, 본난에서는 재판과 관련된 부분에 한정하여 서술하도록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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