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6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돌아온 사형수’ 이철 의원은 광주 학살, 박정희와 전두환 일가의 부정축재 등을 지적했다. 이 발언이 담긴 <민주정치1>을 발행한 일월서각 대표에 대해 서울형사지법 조재연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자, 안기부는 정형근 수사2단장을 보내 “엄중 항의”하고 “담당 판사에 대해 엄중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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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 ‘국회록’ 출판도 즉심에 넘겨
무죄판결 판사는 ‘비위 사실’ 내사
즉심 넘긴뒤 판결 사전조정·사후 조처
대상·경중 가리지 않고 ‘그물망’ 압력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4.즉심에 대한 개입 (2) 국회의사록 출판도 문제 삼아 안기부는 박시환 판사 관련 보고서를 작성한 두 달 후쯤 또다시 즉심 판결을 문제 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번 사안은 학생 시위 관련이 아니라 출판물에 관한 것이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이 불어 강성 야당이 출현하게 된 것은 안기부에는 큰 골칫거리였다. 5월 들어 국회가 개원하자 신민당 의원들은 민정당의 2중대라는 조롱을 받던 민한당과는 달리 군사정권을 맹공격했다. 당시 유력한 사회과학 출판사의 하나인 일월서각은 12대 국회의 첫 번째 회기인 125회 국회가 끝나자마자 이민우, 김동영, 이철 등 야당 의원 13명의 국회발언 속기록을 <민주정치1>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안기부는 경찰로 하여금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게 하여 책자와 지형을 압수하고, 최옥자 일월서각 대표를 연행했다. 경찰은 최옥자 대표에 대해 책의 발간 경위 등을 조사한 뒤,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즉심에 회부했다. 그런데 즉심을 담당한 서울형사지법 조재연 판사가 1985년 8월 23일 무죄를 선고해버렸다. <민주정치1>은 모두 야당 의원 13명의 발언을 담고 있지만 안기부가 문제 삼은 것은 이철 의원의 발언이었다. 1985년 6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돌아온 사형수’ 이철 의원은 “존경하는 의정,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이라는 관용구도 생략한 채, 바로 “이 땅에 결단의 때가 왔음을 엄숙히 선언”한다는 말로 질문을 시작했다. 20분 남짓한 그의 발언에서 24회나 속기록이 삭제되었고, 17번이나 장내 소란이 일었다. 민정당은 이철의 발언을 앞두고 ‘야유조’를 편성해두는 등 대비했지만 그의 발언 수위는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이철이 광주 학살, 박정희와 전두환 일가의 부정축재 등을 지적하자 “집어치워”, “인마”에 이어 육두문자가 난무했는데, 이철은 “구린 데가 있는 분들은 계속 떠들어 주십시오”라며 더 큰 목소리로 발언을 계속했다. “현 정권의 즉각 퇴진”까지 요구한 그의 발언이 끝나자, 민정당은 즉각 의원총회를 소집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마이크를 잡은 의원들은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이 한탄스럽다”느니, “민중혁명을 주장하는 자와는 국회를 같이할 수 없다”는 등 강경한 발언을 퍼부었다.
법원장과 수석부장 통한 강력 조정 이런 문제 발언이 책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안기부는 “법원에 유죄선고토록 사전협조(조정)”하는 등 ‘강력조정’을 했다. 그런데도 무죄가 나자 안기부는 바로 다음날 <일월서각 대표 최옥자 등 즉심, 무죄선고 사유 확인 및 조치보고>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안기부는 8월 22일과 23일에 두 차례에 걸쳐 서울형사지법원장 황선당과 수석부장판사 박만호에게 “<민주정치1> 책자는 문제 국회의원 이철이 홍보용으로 발간한 불순책자로서 동 책자 내용에는 실정법상 위반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시판될 경우 정국 안정에 위해롭고, 이를 묵인할 경우 유사내용 책자 제작판매가 우려되므로 유죄선고토록 협조 요청(조정)”하여 그들로부터 “최대 협조 다짐”을 받았다. 안기부는 이때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최초의 도서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판매한 혐의로 즉심에 회부된 책 도매상 진명서적의 영업부장인 이규만씨 사건과 민통련의 ‘불순성명’ 제작과 관련하여 즉심에 회부된 같은 단체의 민생분과 이부영 위원장과 실무자 오경열씨 사건에 대해서도 ‘협조’를 요청했다. 이 보고서는 수석부장판사 박만호가 사건 담당 조재연 판사가 즉심에 들어가기 직전 “동 책자에 수록된 이철 의원 발언 중 광주사태 부분이 시중에 유포되면 유언비어가 되어 사회안정에 유익한 것이 못 되며 유무죄는 정식재판에서 논하도록 하고 즉심에서 유죄 인정 구류 선고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수석부장판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즉심 담당 판사 조재연”은 “국회의사록이 일반에게 반포됐다 해서 허위사실 날조 유포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어떤 판결을 내릴지에 대해선 “구체적 언급”을 “회피”한 뒤 법정에 들어가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무죄를 선고”해버렸다. 당시 <중앙일보>는 조 판사가 “국회의원의 발언을 수록, 편집한 것만 가지고는 유언비어 유포라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고 보도했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조 판사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전국의 서점에 배포한 이규만씨에 대해서도 “책장사라는 정상 참작, 형면제를 선고”했다. 다만, 민통련의 성명 관련자인 이부영 위원장 등은 “사안이 중하다는 이유로 검찰 송치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정형근 수사단장 보내 강력 항의 이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을 안기부의 서울형사지법 담당 조정관은 “무죄선고 즉시 서울형사지법원장 및 수석부장판사에게 강력 항의”하여 법원장 등이 “면목 없다”며 “향후 대책수립 적극 협조 다짐”을 했다고 썼다. 당시 조정관들은 보고서를 작성할 때 자신들의 조정 결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심했다. 아무리 법원장과 수석부장이 정권에 ‘협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법원장이 일개 조정관에게 “면목 없다”라고 했을 리는 없다. 이 보고서는 안기부가 ‘수사2단장’을 보내 형사지법원장 및 수석부장을 “직접 방문”하여 “엄중 항의”하고, “담당 판사에 대해 엄중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안기부 내부 보고서인지라 이름 없이 직함만 썼지만, 당시의 수사2단장은 정형근이었다. 안기부가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대공수사2단장을 법원에 보낸 것은 같은 법조인을 보냄으로써 법원을 나름대로 ‘예우’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법원의 독립성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안기부의 엄중 조치 요구에 대해 박만호 수석부장은 “향후 여사 사례 없도록 책임지고 자체 대책을 충분히 강구하겠으니 담당 조재연 판사에 너무 힐책 말아주길 요망”했다고 한다. 법원 쪽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조재연 판사에 대해 ‘조치’에 들어갔다. 보고서는 안기부가 “담당 판사 조재연”에 대해서는 “비위 내사, 견제 자료 확보” 조치를 취하고, “여타 비협조 판사들에 대한 비위자료” 역시 “집중 수집”키로 했다고 결론지었다. 조재연 판사의 인사이동 기록 등을 보면 다행히 별다른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박시환 판사에 대한 인사파동으로 유태흥 대법원장 탄핵안이 발의된 상황에서 안기부나 법원이 조재연 판사에 대한 강경대응에 나서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즉심과 관련한 안기부의 사전 ‘조정’이나 사후 ‘조치’가 담당 판사에게 직접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에게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대다수 판사들은 법원 상부에서 오는 압력은 많이 받았으나 그것이 법원 외부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법원 상부 선에서 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압력 대법원장 유태흥에 대한 탄핵안의 국회 표결을 앞둔 1985년 10월 10일에도 서울형사지법에서 시위 물품을 운반하다 적발된 여대생을 즉심에서 무죄로 방면한 일이 발생했다. 이에 안기부는 <서울대 여학생, 시위준비물 운반 등 관련 즉심 무죄선고 경위확인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은 “IMF, IBRD 총회 반대 가두시위설에 대비 경계근무 중” 광화문 앞에서 메가폰과 시너 1ℓ가 든 상자를 갖고 있던 서울대 여학생 박현주 등 2명을 불심검문으로 적발하여 연행 조사했다. 이들은 수배 중인 서울대 인문대 여학생회장 최미숙에게서 시위 용품의 운반을 부탁 받았다가 적발되어 “경범죄처벌법(제1조 4호: 폭행 등 예비) 위반으로 즉심회부”되었다. 그런데 담당 김대휘 판사는 피의자 등이 시위에 참석하려다 실패한 것은 경범죄처벌법상의 예비음모에 해당하지만 “단순히 메가폰 등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해 해를 입히기 위해 공모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 판사는 서울민사지법에서 근무하다가 한 달 전인 1985년 9월 서울형사지법으로 전보되었고, 즉심은 네 번째 맡았다. 안기부는 김 판사의 성향을 “온순 단정, 정부시책에 협조적”이라고 파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박만호는 담당 판사를 불러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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