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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0.19 20:44 수정 : 2009.10.26 18:11

안기부는 강금실 판사(오른쪽 사진)가 1984년 9월 22일부터 같은 달 28일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남부 즉결심판소에 회부된 서울대생에게 형 면제 선고를 했다면서 강 판사의 친정과 시댁 가족관계와 부친의 재산사항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1985년 박시환 판사(현 대법관·왼쪽)는 피의자 14명 중 11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자, 인천지법에 처음 발령받은 지 6개월 만에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좌천됐다.

안기부 ‘판사 성향 보고서’ 만들어
강금실 판사 일가친척까지 뒷조사
시위 학생 석방한 박시환은 좌천
공안검사 ‘천적’ 판사, 의혹의 사표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3.즉심에 대한 개입 (1)

즉심까지 막아라

전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학생 시위를 엄벌하려 한 것은 부작용이 많았기에 전두환 정권도 1983년 말부터 ‘유화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제적됐던 학생들이 돌아오고 캠퍼스 내에서의 집회는 가능해졌다. 학생들은 1984년 1학기에는 학생회를 재건하고 학내에서 집회를 여는 등 자체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의 움직임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거리 진출을 모색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가 즐겨 쓰던 긴급조치나 계엄령 없이 학생들의 거리 시위에 대처해야 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겨냥한 ‘유화조치’의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학교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학생들을 내버려 둘 수도, 엄하게 처벌할 수도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학교를 벗어나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즉심’을 통해 다스리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몇 달 전만 해도 집시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정식 기소될 법한 사건들이 즉심에 회부되게 되었다.

즉결심판이란 “경미한 범죄사건(당시 기준으로는 5만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에 해당하는 사건)에 대하여 정식 형사소송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결심판에 관한 절차법’에 따라 경찰서장의 청구로 순회판사가 행하는 약식재판”을 말한다. 즉결심판은 그날의 당직 판사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처리하는 약식재판으로 법원장이나 안기부 조정관 등이 사전에 내용을 파악하거나 관여하기도 쉽지 않았다. 문제는 즉심을 담당하는 20대 후반의 젊은 판사들이 학생들에게 무죄나 형 면제를 선고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는 점이다.


강금실 판사의 경우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1984년 10월부터 1985년 10월 사이에 즉심에서 무죄나 형 면제 판결이 나자 안기부가 개입한 사실을 보여주는 보고서 네 건을 입수했다. 날짜상으로 가장 앞선 보고서는 1984년 10월 5일에 작성된 <시위학생 즉심, 형 면제 선고자 남부지원 강금실 판사 성향 등 내사보고>였다. 안기부는 강 판사가 1984년 9월 22일부터 같은 달 28일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남부 즉결심판소에 회부된 서울대생에게 형 면제 선고를 했다면서 그 경위를 내사한 것이다. 원래 강 판사는 이 두 사건 즉심 담당이 아니었는데, 사시 동기생인 담당 판사들이 공판 관계로 시간이 없으므로 대리로 맡아줄 것을 부탁하여 즉심을 맡게 되었다. 안기부는 강 판사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법원 상층부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경위조사를 요구했다. 보고서는 ‘법원 자체 규명’이라는 설명 아래 강 판사가 “심리 과정에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죄과를 깊이 뉘우치고 있어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형 면제 선고를 하였다”고 하면서, “판사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치 못한 데 있다”고 ‘변소’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안기부는 강 판사의 친정과 시댁 가족관계와 부친의 재산사항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안기부는 강 판사가 “학교 재학 중 문제서클이나 학원 데모 등에 가담 사실 없고 학업에만 전념”했으며 “판사 임용 후에도 자기 직무에 비교적 충실한 자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본 건 즉심에 회부된 피의자들의 죄질로 보아 형 면제를 선고한 것은 납득가지 않는 처사”라고 규정했다. 안기부는 과거 ‘무림사건’(1980년 말에 발생한 서울대 학회들의 지하모임 사건)으로 복역한 남편 김아무개씨에 주목했다. 안기부는 강 판사가 시위 학생들에게 형 면제를 선고한 것이 “남편의 영향에 의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안기부는 강 판사와 고교와 대학과 사법시험 동기인 김영란 판사(현 대법관) 주변을 탐문하여 강 판사와 남편의 결혼 경위까지 파악했으나, “현재로서는” 강 판사가 남편의 영향으로 시위 학생들을 풀어주었다는 “확증은 없는 상태”라고 보고서에서 적었다. 강 판사는 이 일로 안기부의 미움을 샀지만,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영월지원으로 좌천된 박시환 판사

정식 재판도 아닌 즉심에서 정권의 뜻을 거슬러 인사조치 된 사례로는 박시환 판사(현 대법관) 사건이 유명하다. 유태흥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안 표결까지 불러온 이 사건의 발단은 1985년 6월(일자 미상)에 작성된 안기부의 <인천 공단 입구 가두시위 관련 즉심 회부자 무죄선고 경위 확인보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85년 6월 3일 19시 30분부터 25분간 인천시 북구 제5공단 입구 노상에서 서울대, 중앙대, 인하대, 숙명여대, 상명여대 등 5개 대학 15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사독재 박살내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화염병을 던지는 등 거리 시위를 벌였고 인천 동부경찰서는 현장에서 25명을 연행해서 이 중 14명을 집시법은 적용하지 않고 도로교통법 및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6월 6일 인천지법에 즉심을 회부했다. 그런데 담당 박시환 판사는 피의자 중 3명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구류 3일에서 4일을 선고했지만, 11명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노동운동 탄압’·‘군사독재’ 운운하는 구호에 화염병을 던진 ‘가두시위’에 무죄가 선고됐으니 안기부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안기부는 즉각 경위 파악에 착수했다. 안기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인천 동부서 정보과장은 학생들을 법원에 넘기면서 즉결 담당 판사에게 사건을 설명하려고 면담을 요청했으나, 박 판사는 서류를 보면 된다고 면담에 응하지 않았다. 박 판사는 사실심문에서 가두시위 관련 학생 피의자 14명 전원에게 “돌을 던진 사람 손들어봐”, “화염병 던진 사람 손들어봐”, “시위 시 서로 본 사람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학생들은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개별심문에서도 학생들이 모두 “돌이나 화염병을 던진 사실이 전혀 없다고 진술”하자 박 판사는 “시위한 증거가 없고 본인들이 부인하므로 정식재판이 들어오면 공소기각감이다”라고 하면서 시위 가담을 부인한 관련자 11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즉결심판 회부는 원래 검사의 손을 거치지 않고 경찰서장이 결정하는 것이지만, 학생들이 무더기로 무죄를 받자 인천지검은 발끈했다. 6월 8일 공안부장 박은은 인천 동부서에 무죄 석방자에 대해 “재즉심청구 하도록 석방자 전원 재연행, 위반사항을 추가하여 서류 보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인천 동부서에서는 무죄석방 된 학생 중 6명을 다시 잡아다 조사했고, 연행에 실패한 5명에 대해서는 “출석요구서 발부, 재즉심 청구 가능하도록 신병확보 조치”했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도 전례 없는 ‘재즉심 청구’가 문제 있다고 보았는지 담당 검사가 경찰에 재즉심 청구 포기 결정을 통보하여 수사는 종결되었다. 이 판결에 대해 안기부의 보고서는 “동 박시환 판사는 85.3 형사사건 담당 판사로 임명되어 6.6 처음으로 즉결심판을 담당”한 초임 판사로 “학생시위 사건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을 직감하지 못하고 경솔한 판단을 한 것”으로 평가했다.

알아서 조심하라 사인 주는 안기부

박 판사는 뒤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즉심 판결 바로 다음날부터 안기부의 압력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했다. 다음날 저녁 법원 당직실에서 집으로 전화가 와서 “안기부라면서 판사님 집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당직 직원이 묻기에 “절대 가르쳐주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날 출근해 보니 자신이 배석판사로 모시는 부장판사가 “안기부에서 당신 전임지를 묻더라”고 전해줬다고 한다. 천하의 안기부가 판사 집 전화번호를 법원 당직실에 묻거나, 부장판사에게 배석판사의 전임지를 묻는 것은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박 판사는 부장판사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구나’라고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박시환 판사는 9월 1일자 정기인사에서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발령받았다. 그가 인천지법에 발령받은 지 6개월 만에 좌천된 것이다. 법관이 한 법원에 발령을 받으면 통상 2년간 근무한 뒤 자리를 옮기는 관례에 비추어 본다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 판사는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7년 3월 서울지법 형사단독판사로 있을 때도 1년 만에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로 발령이 났다. 박 판사와 함께 시국사건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내려 공안검사들의 ‘천적’이라 불리던 유원석 형사단독판사는 이때 정기인사를 앞두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표를 냈다.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인천지법에 근무했던 경북대 법대 신평 교수(1993년 법관재임명에서 탈락)는 당시 즉심과 관련해서 법원장이 직접 자신을 불러 지시한 적이 있었다고 필자와의 면담에서 밝혔다. 법원장은 “이번에 신 판사 담당 즉결심판으로 넘어온 아무개가 성향이 아주 악질적이라고 한다. 이런 놈은 일벌백계해야 하니 최소한 구류 20일 이상은 때려서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강력히 주문했다. 막상 즉심에 들어가 보니 ‘학생들이 정의감으로 반체제 운동을 한 단순한 사건’이었다. 신 판사는 개인적으로는 무죄석방을 하고 싶었지만 법원장이 강력히 당부한 바도 있어 구류 3일을 선고했다. 그는 법원장에게 다시 불려가 “그만큼 당부했는데도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느냐”며 호통을 들어야 했다. 신평 교수는 “법원장이 즉결사항을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안기부에서 특별히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고 말했다. 신평 교수는 그래도 자신은 같은 고향 선배인 김용철 대법원장이 각별히 신경을 써준 덕택인지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지만 비슷하게 무죄판결을 내렸던 박시환 판사는 영월지원으로 좌천되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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