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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0.12 20:40 수정 : 2009.10.12 20:40

1980년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는 전두환. 5공 시절 사법부는 정권의 말을 너무나 잘 들어 시국사건에 일괄적으로 중형을 선고했다. 부담은 사법부가 지고 계속 중형을 선고하고, 생색은 ‘각하’가 내서 풀어주는 식이었다.

‘군 대신 감옥행’ 학생시위 못하게
안기부 형량강화지침 법원에 하달
판사들은 지시대로 선고 ‘불신 자초’
엄벌이 되레 민주화 열망 끓게 해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2 안기부와 학내시위 엄벌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광주에서의 참혹한 학살은 민주화운동의 저변을 엄청나게 넓혀 놓았다. 유신 시절의 민주화운동이 아무래도 경인지방에 편중된 것이었다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거쳐 5공화국 시기에 들어와서는 항쟁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갔다. 1970년대의 학생시위도 주요 대학에서만 일어났던 반면,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방의 작은 대학 학생들도 감옥 가는 것을 마다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대학생들의 시위가 확산되어가자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학생시위 주동자들의 형량을 대폭 늘리려 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는 유신시대와 마찬가지로 경찰이 교내에 상주하면서 학생시위를 강경 진압했고, 시위 학생들은 대개 1년 안팎의 형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의 병역법은 6개월 이상 복역한 사실이 있는 사람은 현역 입영은 물론 방위 소집까지도 면제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군 복무를 마쳐야 하는 운동권 남학생들의 경우, 어차피 군대 가서 3년간 ‘썩느니’ 시위를 주동하고 1년가량 옥살이를 하면 군대 문제도 자연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시위에 단순 가담한 학생들이나 시위를 주동할 우려가 있는 학생들을 강제징집했다. 그런데 시위를 주동한 학생들이 1년 내외의 징역형을 받게 되면 당시의 병역법상 징집이 면제되기 때문에 이들을 군대에 보낼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의 시위 확산을 막는 방편의 하나로, 병역의무를 필하지 않은 남학생이 시위를 주동할 경우, 병역기피 목적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들에 대한 형량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들의 형량을 군 복무 기간보다 길게 만들면, 학생들의 데모가 줄어들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개별 사건에서 형량을 결정하는 권한은 사법부에 있었기 때문에 안기부로서는 ‘조정’이라는 이름의 과정이 필요했다.


‘만성적 데모고개’의 발본색원 노려

1983년 4월 11일자 <학원사태 관련자 조기 공판 진행 조정보고>라는 안기부 보고서를 보면 1983년 3월 11일에 신라호텔에서 (아마도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열려) “군입대 기피목적 학원사태 유발자 엄단 처리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 내용은 “학원 관련 사범 특히 군입대 기피목적 사태 유발자에 대해 신속한 재판 처리로 엄단함으로써(5년 이상 구형, 3년 이상 선고) ▷엄단 사실의 학내 전파로 재범 방지 ▷만성적 ‘데모고개’의 발본색원 등 효과”를 거두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안기부는 “현재 검찰에서 수사 중인 학원관련 사건(5건 18명)을 종전과 달리 ▷관련 사건을 공안부 전 검사에게 적절히 배분 ▷신속한 기소 및 공판 기일 지정으로 조속 처리토록 검찰 및 법원을 조정”하기로 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안기부는 앞의 ‘군입대 기피목적 학원사태 유발자 엄단 처리 방침’에 따라 1983년 3월 14일부터 18일 사이에 “조속 기소”와 “조기 공판 진행”을 위해 “대검 공안부 및 대법원 행정처와 동 처리 방침에 따른 협조”를 구하였고 “대법원에서는 전 관할 법원에 동 처리 방침을 시달”하였다.

안기부는 대법원으로 하여금 전 관할 법원에 안기부의 새로운 방침을 시달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학생시위의 대부분을 관할하게 되는 서울형사지법에 대해 직접 ‘조정’에 들어갔다. 안기부는 서울형사지법원장 김형기에게 3월 18일, 3월 25일, 4월 6일 3차례에 걸쳐 학내시위 주동자로 동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될 동국대생 김유능 등 18명에 대한 ‘3년 이상 선고’라는 지침을 제시하면서, 이들의 공판을 기소 즉시 시작하여 조기에 마무리하라고 ‘조정’했다. 우리는 여기서 안기부의 ‘조정’이 들어간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3년 3월이라는 시점은 앞서 살펴본 요정 주인의 외화 밀반출 사건과 국가모독죄 무죄 사건의 여파로 안기부가 사법부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을 때였다.

너무나 말 잘 듣는 사법부

안기부가 형사지법 수석부장이 아니라 형사지법원장에게 직접 행사한 ‘조정’은 너무나 잘 먹혀들었다. 안기부의 ‘조정’이 있은 후 첫 공판인 동국대생 김유능의 재판은 정확하게 안기부의 방침을 구현했다. 4월 15일 첫 공판이 열리고, 8일 만인 4월 23일 징역 3년 형이 선고(재판장 정극수 판사)된 것이다. 대법원이 하달한 지침의 영향 역시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1983년 2월 22일 1심인 수원지법에서 징역 10월 형을 선고받은 성균관대생 3명에 대해 수원지법 항소부(이영준 부장판사)는 4월 30일 원심을 깨고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형량이 2배 가까이 늘어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6월 11일 같은 재판부는 또다시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은 서울대생 김재갑에게 이번에는 원심 형량의 2배가 넘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안기부가 ‘조정’을 벌인 숭전대생 김상림 등 2명과 단국대생 김용덕 등 2명에 대해 남부지원 유재선 판사 등이 안기부가 요구한 형량의 3분의 2인 징역 2년을 선고한 것은 그 이전의 교내시위 주동자들에 비해서는 매우 무거운 형을 선고한 것이다. 그래도 당시 안기부의 ‘조정’에 법원이 무기력하게 따랐던 것에 비춘다면 ‘고민 많이 한 판결’이라 할 것이다.

안기부가 행한 ‘조정’의 의미는 안기부의 ‘조정’이 있기 이전에 서울형사지법이 단순 교내시위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렸는가를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징역 3년을 받은 김유능의 동기로 그보다 두 달 먼저 재판을 받은 조승수(현 진보신당 국회의원)는 징역 단기 1년, 장기 2년, 김유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 정극수 판사에게 재판을 받은 숙대생 김이경(현 통일운동가) 등은 징역 1년에서 1년 6월, 현재 시민운동가로 맹활약 중인 하승창 등 연세대생 3명은 징역 8월에서 1년을 선고 받았다. 이를 보면 안기부의 ‘조정’으로 단순 교내시위에 대한 형량이 2배가량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안기부 ‘조정’의 첫 희생자로 갑자기 3년형을 받게 된 김유능은 그 후 승려가 되었다가 200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중형은 판사가, 선심은 전두환이…

1983년 12월에 작성된 안기부의 다른 보고서는 이와 같은 ‘학원사태 관련자 엄벌처리주의’의 적용 사례를 보여주면서 이 방침이 많은 문제점을 낳았음을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83년 이후 검찰에서는 학원사범에 대해 최소 3년, 최고 5년형 구형으로 일관성 있는 엄벌처리 원칙”을 고수하여 ‘학원사범’에 대해서는 “거의 100% 영장 발부, 구속기소 처리” 해왔으며, “법원은 검찰 구형의 최소한 2분의 1 이상 선고원칙 하에 평균 징역 2년형 이상 선고”해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엄벌처리 원칙은 안기부가 보기에도 많은 문제를 낳았다. 우선 “사법처리의 경직성으로 학원의 대사법부 불신감, 대정부 불만감”이 조성되었고, “어린 학생들을 최고형인 징역 5년형으로 구형, 중형 선고하는 현 사법처리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했으며, “학원사범 엄단원칙 확립으로 상당한 정황이 있는 경우에도 관용처리 회피경향 등 경직화 현상”이 나타났고, 일부 판사들이 학원사범 처리 방침에 “노골적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엄벌처리 방침의 문제점에 대한 안기부의 진단은 정확했던 반면, 그 대책은 핵심을 벗어났다. 안기부는 “중형선고 원칙이 무너지면 법원의 생리상 학원사범 재판에 대한 통제조정이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에 대해서는 계속 중형을 선고하고, 법원에 대해서는 계속 ‘통제조정’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구속자 누증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은 ‘각하의 특별조치’로 ‘탄력성’ 있게 대처한다는 처방을 내놓았다. 요컨대 부담은 사법부가 지고 계속 중형을 선고하고, 생색은 ‘각하’가 내서 풀어준다는 것이었다.

법정소란 자초

탄력성 있는 ‘각하의 특별조치’가 구체화 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약 20일 후인 1983년 12월 22일 정부는 “지금까지의 엄벌 중심의 강경책이 당국의 기대대로 학원사태를 방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학원사태 주동자의 의식은 갈수록 첨예해지고 사태는 계속 빈발”했다는 이유로 해직교수의 복직, 제적학생의 복교, 학원소요 사범과 공안사범들에 대한 대거 사면·형집행정지·복권 등의 조치를 내려 학원소요와 관련된 학생 134명을 석방했다. 1983년 말과 1984년 초에 걸친 일련의 조치로 풀려난 학생은 모두 338명이었으며, 남아 있는 학생은 22명이었다. 서울지역의 경우 집시법 위반으로 1983년에 구속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158명 중 140명이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안기부의 중형 선고 방침에 따라 충실하게 중형을 선고한 판사들만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1980년대 5공화국 시기 시국사건은 유신 시절 아래의 ‘악습’인 ‘양형 동일화’ 원칙을 지켜왔다. 1988년 6월, 5공 사법부의 악습으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움직임이 한창이던 때 한 현직 법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80년 이후 시국사건의 ‘양형 동일화’ 현상은 유신 때부터 지켜지던 악습으로 청와대의 양형을 절대로 지키는 것이 불문율이었지요. 특히 주요 시국사건은 기관의 조정관이 검사장에게 선고량을 전달하면 검사장이 형사법원장 또는 수석부장에게 전했어요. 전달 내용도 거의 변경된 적이 없었고, 어떤 부장판사는 오히려 한술 더 뜨는 실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안기부는 단기적인 목적은 달성했을지 모르나, 민주화의 열망은 당국의 엄벌주의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서슬 푸른 안기부의 ‘조정’과 ‘협조’ 요청에 무기력하게 굴복한 법원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신성해야 할 법정 위로 고무신짝이 날아다니고, 피고인들은 오히려 법관을 심판하겠다고 소리쳤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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