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서울종합방재센터가 입주해 있는 서울 중구 예장동 옛 안기부 건물. 뒤로 남산의 산자락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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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안기부에 첩보…수사 착수
처리 과정서 가혹행위 사실 불거져
전두환 “정도껏 하라”며 검사 파견
‘굴욕’ 안기부, 검찰·법원 향해 ‘칼날’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18.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 (1)
요정 여주인, 외화 밀반출, 그리고 뇌물
1983년 1월 1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고 부하에게서 상납을 받은 ‘전’ 철도청장 안창화의 구속을 발표했다. 이때 검찰은 유태흥 대법원장의 ‘전’ 비서관 강건용(이사관)이 “구속 중인 형사피고인을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피고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모든 언론은 이들의 직함 앞에 ‘전’이라고 썼지만 사실 이들은 구속되면서 사직한 것이기 때문에, 현직이라고 해야 옳았다. ‘정화’를 내세운 5공 정권으로서는 장영자 사건에 이어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가 연이어 발생한 것은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검찰은 강건용 비서관의 구속을 철도청장의 구속 사실 뒤에 끼워서 발표해 법조계의 한 식구인 법원을 배려했지만, 이 사건은 5공 정권 출범 이후 최대의 독직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뇌물 액수가 크다는 데 있지 않았다. 강건용이 구속될 때만 해도 아무도 이 사건이 일파만파 번져가 검사 2명의 파면, 서울지검장과 서울지검 남부지청장의 인책 사임, 부장판사 2명의 사임, 변호사 3명의 제명 등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파문을 낳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통해 안기부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확실한 힘의 우위를 과시했다.
5공 초기 검찰과 법원을 한꺼번에 초토화시켜버린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의 발단은 1982년 6월 10일 김포공항 검색장에서 미화 34만달러가 든 가방이 발견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검찰은 당시 한국 요정에서 쌍벽을 이루던 대원각 주인 이경자와 삼청각 주인 이정자 자매가 미화 27만달러를 밀반출한 사건도 적발하게 되었다. 검찰은 이 사건을 기소하였는데, 주범인 이경자는 구속 한 달여 만인 8월 16일 서울지법 남부지원 박준용 부장판사의 보석 결정으로 풀려나고, 이경자의 사촌 동생인 이재완도 박준용 부장판사의 후임으로 재판장이 된 정명택 부장판사의 보석 결정으로 9월 13일 풀려났다. 1982년 10월 18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이경자 피고인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는데, 검찰이나 피고 모두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당대 최고의 요정 여주인이 거액의 외화를 밀반출하려다 적발되었는데, 얼마 후 보석으로 풀려나 집행유예를 받았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은 외형상 무언가 냄새가 나는 듯한 이야기였다. 실제 이경자 등은 보석 석방을 위해 당시 대법원장 비서관이던 강건용에게 3000만원이라는 거액을 주었는데, 이 이야기가 어떤 경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청와대 사정팀에 제보가 된 것이다.
특별한 비서관 강건용
청와대는 이 정보를 검찰이나 경찰에 넘기지 않고 안기부에 주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안기부법이 규정한 직무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었지만, 안기부는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의 ‘통보자료’를 단서로, 1983년 1월 5일 수사에 착수했다. 안기부는 1월 5일자로 사표를 제출한 강건용과 사건 관계자 9명을 연행 조사하여, 강건용이 이경자 보석청탁 건을 포함하여 사건 개입 8건에 4450만원의 뇌물을 받았고, 2건의 인사청탁에 개입하여 210만원을 받는 등 모두 4660만원을 받았으며, 3만4000달러(한화 2720만원 상당)의 재산을 국외로 도피시킨 사실을 확인했다. 안기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건용은 유태흥 등 대법원 판사 3명, 고법원장 1명, 지법원장 3명, 지법 부장판사 2명 등에게 사건이나 인사를 청탁하여 대부분 관철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최고의 정보망을 가진 요정 주인들이 뇌물을 찔러야 할 길목으로 파악한 강건용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홍영기 변호사의 사무원이던 강건용은 대법원장 유태흥이 군법무관으로 재직중이던 1957년 군법회의 변론 관계로 서로 알게 되었는데, 사교춤 실력이 탁월했던 강건용이 유태흥에게 춤을 가르쳐 주며 친해졌다고 한다. 유태흥은 일찍 상처했는데 재혼하지 않았고, 강건용이 유태흥의 집안일을 돌보아주며 개인비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강건용이 안기부에 잡혀와 쓴 진술서에 따르면, 유태흥의 자녀들은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고 아이들의 졸업식에도 유태흥을 대신해서 자신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1973년 유태흥이 서울형사지법원장에 취임했을 때 6급 비서관으로 특채되어 유태흥이 서울고등법원장, 대법원 판사, 대법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계속 비서관으로 모셔온 사이였다. 대법원장과의 이런 각별한 인간관계가 요정 주인들에게 포착되어 보석 청탁을 위해 거금 3000만원이 전달된 것이다. 안기부는 1월 12일 강건용의 신병과 외화 밀반출 사건 보석 관련 금품수수 및 재산 국외도피 관련 증거품을 대검 중앙수사부에 이첩하고, 다른 비위 사실은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에 통보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안기부, 처음으로 가혹행위 인정 그러나 사건은 종결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창민 당시 <한국일보> 기자에 따르면, 강건용이 남산의 안기부에서 서소문의 대검찰청으로 신병이 인도되어 12층 중앙수사부 사무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모 신문 법조출입기자가 같이 타게 되었다. 이 기자는 대법원장실을 출입했기 때문에 강건용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당시 강 비서관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즈음에야 겨우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기자의 목격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검찰 수뇌부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며” 강건용이 안기부에서 아주 심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는 말이 법조계에 퍼져 갔다. 법원과 검찰은 때로 1971년의 사법파동과 같이 극한적인 대립을 하기도 하지만, 늘 일상적으로 접촉하면서 나름의 동질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법관은 아니고 비리를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대법원장의 최측근인 고위 공직자가 안기부에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지경으로 험한 꼴을 당했다는 데 대해서 검찰이 법원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강건용이 “검찰과 법원의 유기적인 관계를 고려, 다른 수사기관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며 강건용이 안기부에서 조사받았음을 시사했다. 안기부는 법조계와 언론계에서 강건용이 안기부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묵사발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소문의 진원을 캐기 시작했다. 안기부는 소문의 진원지로 검찰에서 이 사건을 담당한 대검 중수부 2과장 성민경 검사를 지목하고 그의 교우관계와 재산관계 등을 뒷조사하기 시작했다. 안기부가 자신의 뒤를 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성민경 검사는 김석휘 검찰총장에게 찾아가 강력히 항의했다. 부하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김석휘 총장은 며칠 뒤 노신영 안기부장을 만나 안기부원에 의한 검찰 간부 뒷조사 사실에 대한 유감을 표시하고 뒷조사의 중단을 요구했다. 안기부장으로서도 검찰총장이 정색을 하고 검찰 간부에 대한 뒷조사 중단을 요구했다면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보고서가 국정원에 남아 있다. 1983년 2월 일자 미상에 작성된 <전 대법원장 비서관 강건용 조사경과보고>라는 제목의 안기부 보고서는 “동건 수사과정에서 담당수사관이 피의자 강건용을 침상목으로 둔부: 3회, 손바닥으로 따귀: 5회 등 구타한 사실”이 있어 “이에 대한 수사경위 및 관계관 처리보고”를 위해 이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1961년 중앙정보부 창립 이후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해왔는데,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확인한 중앙정보부·안기부 자료 중 내부보고서 형태로나마 연행되어 온 피의자에게 구타 등 가혹행위를 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이 보고서가 유일한 것이다. 안기부 보고서는 “담당 수사관들은 사실규명에 집착한 나머지 우발적으로 피의자를 구타한 것으로 계획적인 고문행위는 없었다”며 구타는 엉덩이 3차례, 따귀 5차례 때린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안기부의 반격 이는 강건용이 실제 당한 피해에 비하면 실상을 매우 축소한 것이었지만, 안기부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검찰에 대해 구타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또 폭행을 가한 수사관은 불문에 부쳤지만, 지휘 책임을 물어 과장 급 간부 1명을 징계위에 회부해야 했다. 더구나 안기부와 검찰의 갈등에 전두환이 직접 개입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지낸 전두환은 안기부의 고문이 너무 자주 논란이 되자 정도껏 하라며 검사를 파견해 수사 실무를 지도하도록 했는데, 이때 법률담당관으로 파견된 검사가 바로 정형근이었다. 고문 근절의 막중한 사명을 띠고 파견된 정형근이 그 후 안기부의 고문 논란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논란의 주역으로 등장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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