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민주 인사들의 부인들은 보라색 한복을 맞춰 입고 재판 때마다 다양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기습시위를 벌였다. 1976년 여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 등이 ‘공개 재판’ 구호를 쓴 부채를 들고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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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문익환 등 11명 전격 구속
변호인단 27명 구성 초대형 규모
속전속결 ‘재판쇼’에 전원 사임
가족들 기발한 투쟁…교외 버려지기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15. 3·1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사건) ※ 이 원고를 막 보내고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재판과정에서 눈물겹도록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원주선언 인혁당 사형과 사이공 함락에 이은 긴급조치 9호 발동 이래 한동안 잠잠하던 반유신운동은 1976년 1월의 원주선언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당시 원주는 지학순 주교, 김지하, 장일순 등이 살고 있어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천주교는 신·구교의 분리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일치주간을 두고 있는데 이를 맞이하여 1월 23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신·구교회의 합동으로 열렸다. 기도회는 천주교 신부들 다수와 개신교의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조화순 목사와 함석헌 등이 서명한, 제목이 없는 반유신선언을 채택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개신교 인사들은 3·1절에 개신교도 천주교처럼 문건을 발표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 최다선 원로인 정일형 의원 등 정치권에서도 3·1절에 즈음한 시국선언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가 워낙 살벌한 때였던 만큼 개신교 쪽 흐름이나 정치권 흐름이나 모두 윤보선 전 대통령의 서명을 받기를 원했다. 레드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김대중 후보 쪽은 서명 문안을 완곡하게 작성했지만, 색깔론의 부담이 없는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신철폐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할 것을 주장했다. 두 갈래의 흐름을 하나로 모아 실질적으로 일을 준비하는 사람은 문익환 목사였다. 문익환 목사는 자신이 기초한 선언 문안을 제자 이해동 목사에게 전달해 55부를 인쇄했다. 성명서 발표가 정부 전복 음모로 3·1민주구국선언은 개신교 쪽이 주도했지만, 발표 장소는 명동성당이었다. 3·1절이 다가오면서 발표 장소가 마땅치 않자 천주교 쪽에 명동성당의 3·1절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할 기회를 줄 것을 요청했다. 천주교 쪽은 이미 원주선언을 했기 때문에 3·1민주구국선언에는 다시 서명하지 않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되었지만, 개신교 쪽의 급한 요구에 선언 발표 장소를 제공한 것이다. 그 당시에 김수환 추기경의 옷자락이 그렇게 넉넉했다.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2천여명의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미사가 거행되었고, 미사의 마지막 순서로 바로 전날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정일형 등 11명이 서명한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그것으로 미사는 조용히 끝났고, 시위도 농성도 없이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일은 다음날 벌어졌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전날 재야인사들이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선언을 발표했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펄펄 뛰며 이들을 잡아들이라고 직접 지시했다. 그날부터 관련자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3월 10일 검찰은 일부 재야인사들이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발표했다. 검찰은 죄질이 나쁜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문동환, 이문영, 서남동, 안병무, 신현봉, 이해동, 윤반웅, 문정현 등 11명은 구속수사중이며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이태영, 이우정,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등 9명은 불구속으로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선언에 서명한 사람의 두 배가 되는 인원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입건되었는데, 특히 선언에 서명하지 않은 신부들이 구속자 3명을 포함하여 7명이나 걸려들었다. 법정 안팎에서 벌어진 쇼 명동사건의 공판은 긴급조치9호 관련 재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쇼였다. 우선 피고인들의 면면이 그랬다. 전직 대통령에, 대통령 후보에, 최다선 의원에, 개신교의 내로라하는 지도자에, 긴급조치9호 발표 이후 해직된 5명의 교수가 포함되었으니 이런 화려한 멤버가 또 없었다. 피고인들 중에는 특별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 분들도 있었다. 76살의 고령으로 불구속 재판을 받은 함석헌 선생은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법정에 나왔고, 신현봉 신부는 피고인을 호명하여 앞으로 나갈 때면 한국이 인권과 민주주의가 죽어서 곡을 한다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며 나갔다. 변호인도 피고 수보다 훨씬 많은 27명으로 당시로는 초대형 변호인단으로 구성되었다. 80년대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200여명의 변호사가 팔 걷고 나서는 등 대형 변호인단이 구성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70년대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변호인들도 선임료를 받을 것이 아니라 수업료를 내야 할 정도였다며 재판 자체가 큰 공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국회의원이나 정치인 중 율사 자격을 가진 이들도 대거 변호인단에 참여했는데 홍성우 변호사는 “평소에 긴급조치같은 거 안 하던, 정치권에 있던 변호사들이 대거 거기 달라붙어서 좀 시끄러웠다”고 회고했다. 재판 자체가 유신 정권이 꾸민 쇼였고 일부 피고인들과 변호인들도 쇼의 의미를 살렸지만 방청이 제한된 법정에는 실제 방청객보다 기관원들이 더 많았다. 당시 법원은 피고 1인당 방청권을 5매 발행했는데, 방청권에는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고, 입장 시 주민등록증을 함께 제시해야 하며, 일단 퇴정 시는 재입장시키지 아니할 수 있고, 분실 시는 재발급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가족들이 보이지 않자 1회 공판부터 비공개재판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기도 했다. 방청석 맨 앞의 20석쯤은 기자석이었는데 항상 만원이었지만 신문에는 한 줄도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중 후보는 최후진술에서 내지도 못할 것을 열심히 쓰는 기자들에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니들이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기도 했다. 기자들은 변호인들이 ‘쓰지도 못할 것을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나오냐’고 놀리면 ‘민주주의 교실에 공부하러 다닌다’고 답하곤 했다고 한다. 진짜 볼거리는 법정 밖에서 벌어졌다. 가족들은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 한복을 똑같이 차려입고 법정 주변을 행진하거나, 언론자유가 죽었다는 뜻으로 엑스표가 쳐진 마스크를 일시에 꺼내 쓰거나, 민주주의 회복 등 구호가 쓰인 양산을 한꺼번에 펼치거나, 공개재판이라고 쓰인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며 활보하였다. 가족들은 브이(V) 자를 새긴 보라색 ‘빅토리 숄’을 떠서 판매했는데, 정부 당국에서 한때 보라색 실을 팔지 못하게 하여 선교사들이 공수해 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가족들이 맹활약하다 보니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나 김대중 대통령 후보 부인 이희호 여사 등도 경찰차에 실려 교외에 버려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논란이 된 사법부 독립 명동사건의 재판에서는 유달리 사법부의 독립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3ㆍ1선언 자체가 “우리는 사법부의 독립을 요구한다. 사법권의 독립 없이 국민은 강자의 횡포에서 보호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법부를 시녀로 거느리는 정권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며 사법부의 독립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직접 지시로 벌어진 일이라 재판은 속전속결로 매주 토요일에 강행되었다. 이런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될지는 처음부터 의문이었다. 공소장 부본이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즉각 전달되지도 않았고, 공판조서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재판장 전상석 부장판사는 검찰 쪽의 증인과 증거만 채택할 뿐 변호인 쪽의 증인 16명과 증거, 사실조회 요구는 거의 채택하지 않았다. 이돈명 변호사는 1심 재판장이 “너무 몰상식하게 재판을 진행했다”면서 1심은 “재판이 아니라 싸움”이었다고 회고했다. 하경철 변호사는 “시국사건 변호인의 역할이란 무죄나 감형에 있다기보다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충분히 진술을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만들어 주는 데 있다”고 했는데, 변호인단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여 민주주의의 강연장을 만들었다. 재판장이 서둘러 심리를 종결하자 변호인단은 검사의 논고 직전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을 하고 전원 퇴장했으며, 불공정한 재판에 대한 항의로 변호인단 전원이 사임하여 최종변론 없이 1심을 마쳤다. 한편 변호인들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문제 삼자 성격이 괄괄한 재판장 전상석은 자신도 사법파동 때 사표를 썼다며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사법권에 도전할 때 이를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받아쳤다. 그는 처음부터 변호인들의 발언을 제지하고 퇴정을 명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정녕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맞서야 할 사법권 침해가 피고인들이나 변호인들의 공정한 재판 요구였을까? 항소심에서 김대중 후보는 1심 판결문이 검찰의 공소장을 그대로 베낀 점을 지적하며 “검찰이 증거도 안 대고, 요구하지도 않은 것도 전부 검찰이 부탁한 것 이상으로 판사가 판결을 해 주었다. 이걸 보니까 이 나라의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것이 이렇구나 하고 한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2심 재판에 대해서는 변호인들이 피고인들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이는 재판부에 대한 “가혹한 요청”이라며, 자신은 판결보다 재판 진행절차에 더 관심이 있는데, 1심과 달리 변론도 하고 최후진술도 할 수 있다며 “오늘의 여건 아래서는 재판부는 적지 않은 노력을 해왔다”고 치하했다. 2심의 경우 재판 자체는 비교적 공정히 진행되었지만 형량만 부분적으로 감경되었을 뿐이었고, 피고인들의 상고는 1977년 3월 22일 대법원에서 기각되었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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