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등 유신체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해직교수들. 왼쪽부터 백낙청·이문영, 한사람 건너 리영희·안병무 교수 등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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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들 ‘법관기피신청’ 속출
75년 구속영장 발부율 93%
법원, 검찰 꼭두각시 노릇
형집행 221명 중 무죄 단 한명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14. 긴급조치 9호 하의 재판 판결문에 남은 이름 감추고 싶어라 1975년 4월 9일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사형집행 이후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어 북베트남 주도의 베트남 통일이 이루어지자, 도미노현상을 우려한 한국의 위기의식은 엄청나게 고조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는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그동안 선포된 긴급조치 1호, 4호, 7호의 종합판으로서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를 청원, 선동,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9호 역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또는 수색이 가능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제10항은 “이 조치 위반의 죄는 일반법원에서 심판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이제 더 이상 군법회의를 설치하지 않고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일반법원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청와대나 중앙정보부의 입장에서는 법원을 한 식구로 믿어 준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법원으로서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 관할권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일반법원으로 이관되어 온 것이 꼭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긴급조치 사건을 일반법원이 처리한다는 것은 법관들이 유신체제 유지의 일선에 배치되어 손에 피를 묻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법관들 사이에서 ‘중앙정보부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부 출세에 눈 먼 법관들에게는 승진의 기회였지만, 대다수 판사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문제였다. 2006년 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문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낼 때, 법조계 일각에서 판사 이름을 절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친 것은 참으로 씁쓸한 문제였다. 이 시절 법원 주변에서는 장차 대법원장감으로 거론되는 인재들의 경력관리를 위해 일부러 서울형사지법에 보내지 않는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법관기피신청 사태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관할권이 일반법원으로 돌아온 이후, 법관들이 직면한 사태는 ‘법관기피신청’이었다. 법관기피신청이 인권변호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5월 시인 김지하 피고인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라는 내용의 수기를 신문에 발표했다가 기소된 사건에서부터였다. 이 사건의 재판장을 맡은 권종근 판사는 과거 군법회의에서 인혁당 사건을 맡은 사람인지라, 변호인들은 “인혁당 문제가 공소사실의 하나로 되어있는 이 사건에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재판부 기피를 신청한 것이다. 이때는 하도 살벌한 시기여서 김지하가 사형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현실적인 우려로 제기되었다. 변호인들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법관기피신청을 내기로 했으나, 인권변호사들도 위축되어 막상 자신들의 이름으로 기피신청을 내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홍성우 변호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솔직히 변호사인 내 이름으로 기피신청을 내는 것이 두려웠어요. 다음날 법정에 들어가려는데 다른 분이 아직 안 와서 혼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 두려움이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겪어보지 못할 정도로 컸어요. 김지하는 그 뒤에 어느 글에선가 그 법정의 모양을 ‘법정에 칼이 서 있더라’라고 표현했었지요.” 이어 1975년 8월에는 ‘어떤 조사’라는 수필에서 사형이 집행된 간첩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한승헌 변호사의 변호인들이 이영범 판사 기피신청을 제출했다. 다음달에는 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기소된 김대중씨가 재판장인 황석연 판사에 대하여, 피고인 쪽이 신청한 증인을 소환하지 않고 서증 제출 기회를 봉쇄하였다는 이유로 기피신청을 제출했다. 녹음 검증을 하고 있는 판사실에 중앙정보부원이 들어와 있는데도 내보내지 않는 등 재판이 공정성을 상실했다고 보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 대법원은 김지하, 한승헌, 김대중 재판 과정에서 제기된 기피신청을 모두 기각했고, 이해 말 법원장 회의에서 대법원장 민복기는 법관들에게 추호도 위축됨이 없이 재판에 임하라고 독려했다. 등신이라 불린 사법부 민복기는 1974년 말의 법원장 회의에서 유신체제는 가장 좋은 제도이며 법관들은 재판을 할 때 국가관에 입각해서 하라는 훈시를 하여 국회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 발언에 대해 “당치 않은 망측한 소리”라며 문제를 제기한 의원은 판사 출신으로 박정희 욕을 많이 하다 좌천된 후 법복을 벗은 김인기였다. 김인기는 5·16군사반란 후 박정희가 법관이 아닌 전우영 대령을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하자 일부러 그의 비위를 건드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군인들은 법원 복도에도 중앙선을 그어놓고 좌측통행을 강제하였는데, 김인기 부장판사는 일부러 우측통행을 했고, 전우영 대령을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하기는커녕 째려보고 걸어서 전우영 대령이 멀리서 김 부장이 보이면 피해갔다고 한다. 김인기는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사건에서 유신 전에는 국가의 승소율이 10~20%에 불과하던 것이 갑자기 80%를 넘어서게 된 것은 법관들이 법률과 양심 이외에 국가관이라는 새로운 재판기준에 의해 재판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도 검사들이 의견을 진술하거나 구형할 때에는 일어서서 했는데, 유신 후에는 “버젓이 뒤로 나가자빠진 태도로 구형”을 하는데 “이러한 불순오만한 법정태도를 보고 판사가 꼼짝을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것은 사법부의 독립 이전에 위신 문제였다. 현실이 이런데도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판사들에게는 “바둑을 두지 마라, 도시락을 가져와라” 등의 지엽말단적 지시만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긴급조치 위반사건 같은 것은 보석이 없고, 집행유예가 없고, 무죄가 없다”면서 “아무리 무고하고 억울한 사람이라도 검사가 기소할 때에 우선 긴급조치라는 죄명의 굴레얼갈이만 가지고 있으면 이것은 다시 헤어날 길도 없다”고 개탄했다. 김인기는 대법원이 제출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1975년의 구속영장 발부율이 93.3%나 되고 일부 지원은 100%까지 발부한 데가 있다면서 “법원은 도대체 수사기관 검찰이 하라는 대로 끌려다녀요. 등신이 되고 말았다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긴급조치하에서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했던 김인기는 1978년 4월 11일 변호사법 위반·공갈·탈세 등 혐의로 구속되었다. 처남과의 유산상속 문제로 갈등이 빚어졌는데 평소 박정희 정권을 비판해온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에까지 이른 것이다. 검찰은 김인기를 기소한 뒤 공소유지에 자신이 없었던 탓인지 기소 일주일 후 귀향보고 당시의 체제비판 발언을 문제 삼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추가기소했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무죄가 없고, 그 죄명만 덮어씌우면 헤어날 길이 없다고 비판했던 국회의원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기소된 것이다. 그가 ‘등신’이 되었다고 탄식했던 법원은 김인기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무죄 내리고 법복 벗어 1976년의 경우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으로 판결을 받은 피고인은 모두 221명이었다. 그중 무죄가 선고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1976년 11월 8일 서울지방법원 영등포지원의 이영구 재판장은 수업 도중 “후진국일수록 1인 정권이 오래가는데, 우리나라 정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 먹는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기소된 고등학교 교사에 대하여, 1인 정권 문제는 역사적, 경험적 사실로 그 자체가 날조된 사실이거나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니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표현은 비유이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두 달이 채 안 된 1977년 1월 4일 그는 관례를 깨고 전주지방 법원 부장판사로 전보되었다가, 2월 5일자로 법복을 벗게 된다. 이보다 앞서 이영구 판사는 1976년 2월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할복자살한 서울대생 김상진의 49재에 맞춰 교내시위를 벌인 이른바 5·22사건으로 기소된 4명의 학생 중 두 명에게는 징역과 자격정지 1년 6월형을, 다른 두 명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한 바 있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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