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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03 20:50 수정 : 2009.08.04 14:09

1974년 11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항소를 포기했다. 대법원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제 12회 - 긴급조치 1호ㆍ4호와 사법권 침해

영장없이 체포…법원 뺀채 군사법정으로
3권이 대통령 손안에 ‘판검사는 들러리’
학내 집회 금지하고 결석만 해도 ‘중형’
203명 구속에 징역형량 합치면 1800년 넘어

긴급조치라는 흉물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꿈꾸던 유신시절은 긴급조치의 시대였다. 유신쿠데타 15개월 후인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이래 박정희가 죽고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기까지 2159일간 국민들은 긴급조치라는 살생흉기에 의해 협박을 받았다. 유신으로 국내의 민주세력을 제압한 박정희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반유신운동을 벌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의 입만 막을 수 있다면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완전히 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1973년 8월 8일 백주대낮에 일본에서 그를 납치하여 왔다. 이 사건은 유신쿠데타 이후 1년 가까이 잠잠하던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다시 불을 붙였다. 10월 2일 서울 문리대의 데모를 시발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정보부의 통제 때문에 당시의 신문방송은 학생시위를 보도하지 못했고, 젊은 기자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11월 12일 기독교방송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 결의문 채택에 이어 20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모든 언론이 용기와 신념으로 외부압력을 배척하자는 요지의 언론자유수호 선언을 발표했다. 이런 움직임은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로 번져갔다. 12월 24일에는 함석헌, 장준하, 천관우, 계훈제, 백기완 등을 중심으로 개헌청원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유신철폐나 독재타도가 아닌 개헌청원서명이라는 너무나 온건한 방식이었지만, 박정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개헌서명이 급속히 확산되자 박정희는 12월 29일 담화문을 통해 서명운동은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불순분자들의 황당무계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해가 바뀌어 1974년 1월 7일 이희승, 이헌구, 김광섭, 안수길, 이호철, 백낙청 등 문인과 지식인 61명은 집단적으로 개헌서명에 동참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가 긴급조치라는 흉기를 선보인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인 1월 8일이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ㆍ반대ㆍ왜곡ㆍ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유신헌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과 긴급조치를 비방한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박정희는 같이 발표한 긴급조치 2호에서 긴급조치 위반자의 심판을 위하여 군법회의법에 의한 군법회의와는 별도로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한다고 규정했다. 비상군법회의의 설치에 따라 특정한 형사사건에 관한 심판권한이 법원의 권한에서 제외된 것이다. 긴급조치로 중앙정보부는 반정부인사를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하여, 구속기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수사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의 정보, 수사 및 보안업무를 조정, 감독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자기가 처벌하고 싶은 행위의 구성요건과 형량을 정할 뿐 아니라 재판을 하는 기관까지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그야말로 대통령 1인의 손에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모두 쥐어준 것이었다. 긴급조치의 시대에는 국회도 사법부도 그저 장식물에 불과했다. 헌법의 구성원리를 깡그리 무시한 유신‘헌법’은 긴급조치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하여 위헌시비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박정희는 껄끄러운 판사들은 모두 목을 쳤고, 사법부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틀어쥐었지만 여전히 사법부를 거추장스러워하여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했다. 이제 유신체제 하에서 국민들은 헌법을 고치자고만 해도 정보부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되어 법관이 아닌 군인에 의해 군법회의에서 재판받는 것은 ‘합헌’이 되었다. 이것이 유신체제의 본질이었다.

정찰제 판결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라는 흉기로 겁만 준 것이 아니라 흉기를 실제로 휘둘렀다. 긴급조치 공포 후에도 개헌서명운동이 중단되지 않자, 정보부는 1974년 1월 15일 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사상계> 주간과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을 구속했다. 지금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이 된 인명진 목사와 뉴라이트 전국연합의장을 지낸 김진홍 목사도 이때 구속되었었다. 그리고 헌법개헌지지 성명에 참여한 이호철과 임헌영 등은 1월 26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한 재판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긴급조치 1호의 첫 번째 위반자인 장준하와 백기완 두 피고에 대한 재판은 기소에서 선고까지 겨우 1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검찰의 구형 다음날 구형량 그대로 선고가 이루어지는 군법회의를 가리켜 한승헌 변호사는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의 상관행이 아닌 군법회의 판결에서 최초로 확립되었다”고 야유했다. 삼각지 국방부 청사 부지 내에 설치된 군법회의의 풍경을 <법조야사>는 “당시 군법회의 법정에는 별 셋의 심판관과 영관급 장교인 법무사, 그리고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군재판 관계자, 그리고 계호 및 정리임무를 띤 헌병들이 감시자로 버티고 있어 한 명씩 차출되어 온 판사와 검사는 들러리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헌법을 고치자고만 해도, 긴급조치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아들이는 악법을 갖고, 군인재판장이 재판하는 법정을 보며 변호인이나 방청객들은 “이게 재판이냐, 개판이지”라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그러길래 재판이 아니라 ‘회의’일 뿐”이라고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긴급조치 4호

긴급조치 1호에도 불구하고 반유신운동의 기세를 꺾이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희는 4월 3일 한층 살벌한 긴급조치 4호를 공포했다. 긴급조치 4호는 이른바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교내외의 집회ㆍ시위ㆍ성토ㆍ농성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심지어 학생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거나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여도 사형ㆍ무기징역ㆍ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악법이었다. 긴급조치 4호 역시 1호와 마찬가지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ㆍ구속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도록 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 조총련ㆍ인혁당재건위 등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국가변란을 기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1034명을 검거하여 253명을 구속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 등을 당하며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 심지어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하면 검찰관이 구치소까지 찾아와 구타하는 일까지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 전혀 가족들을 면회할 수 없었다.

무장한 헌병이 지키고 서 있는 군법회의장은 삼엄하다 못해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비상시국에 학생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정치적 주장을 펴면 어떡하냐는 재판부의 말에 학생들은 이 위기상황에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지 않고 무슨 재판놀음이냐고 오히려 꾸짖었다. 서울 상대생 김병곤은 사형을 구형받은 뒤 “영광입니다”라고 답하는 기개를 보였고, 나중에 <한겨레> 편집국장이 된 김효순은 사형을 구형받지 못하여 친구들을 보기 민망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구속된 박형규 목사는 “가능하다면 학생들보다 가벼운 벌이 아닌 무거운 벌을 주기 바란다”고 최후진술을 했다. 유신정권은 피고인당 가족 1명의 방청을 허용한다고 했지만 가족에 대해 공판날짜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막상 재판날이 되면 정문에서의 까다로운 신분확인 절차 때문에 방청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재판장은 늘 꽉 찼다. 가족들은 입장을 못해도 정보부원 등 기관원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별을 단 재판장은 군사작전마냥 일사천리 식으로 재판을 진행하려 하였지만, 학생들은 애국가를 제창하고 구호를 외치며 재판진행을 방해했다. 재판에서는 자주 피고인 전원에 대해 퇴정명령이 내려지고 휴정과 소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피고인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2명에게 징역20년 등 중형이 선고되었다.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 교문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정남에 따르면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이 모두 203명인데, 사형과 무기징역은 빼고 유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의 형량만 합쳐도 1800년이 넘는다고 한다. 3ㆍ1운동의 주모자였던 손병희가 일제의 법정에서 받은 형량이 징역 3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엄청난 형량이 아닐 수 없다. 군법회의에서 이런 중형을 받고도 피고인들의 절반 가까이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피고인들이 상고하지 않은 이유는 상고해봤자 소용없다는 불신 때문이었다. 당시 사형판결을 받고도 항소를 포기한 시인 김지하는 “사형선고 받은 놈이 항소 포기하는 것 봤어요? 얼마나 웃기는 판결이라 생각했으면 항소를 포기했겠어요”라고 회고했다. 대법원장 민복기는 1975년 신년사에서 지난해 후반에 갑자기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소리가 국민 일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있었다면서 이러한 불신의 소리는 오로지 사법부의 소임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공허한 변명을 했다. 박정희가 군법회의에서 멋대로 한 재판에 대하여 그나마 대법원 상고의 길을 열어둔 것은 사법부에 대한 배려였을까, 모욕이었을까? 대법원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조작된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으로 박정희의 ‘배려’에 화답했다. 사법부의 회한과 오욕의 역사는 박정희가 제작과 감독을 맡았지만 사법부의 손으로 쓰인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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