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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28 16:51 수정 : 2009.07.28 17:20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중앙정보부 아닌 공안검사가 주도한 듯”
홍성우·최영도·목요상 판사 밝혀
검찰 인책 등 없이 ‘파동’ 허무한 결말
“박정희, 사태 계속 땐 계엄 선포하려 했었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

제 8 화 - 사법파동 (하)

수습을 위한 모색

사법파동의 양상이 점차 법원과 검찰의 대립으로 치달아가자 법원 내에서는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만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부산에서 돌아와 법무부 장관을 만나보겠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대법원장 민복기는 7월 31일 백두진 국회의장이 주최한 8대 국회 개원 자축연에서 “근일 내로 박 대통령을 만나 근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정희는 민복기를 만나주지 않았다. 대신 박정희는 법무장관 신직수를 불러 “이 이상 판사들의 독직사건에 대한 수사나 소추를 하지 말고 대법원장을 찾아가 이번 사건은 민 원장이 알아서 처리하게 맡기라”고 지시했다. 신직수는 8월 1일 검찰총장 이봉성과 함께 민복기를 찾아가 박정희의 뜻을 전했다.

다음 날 민복기는 서울민·형사지법원장을 불러 대통령 면담 때까지 판사들의 동요를 막아 달라고 당부한 뒤, 대법원 판사회의를 소집했다. 7시간여의 마라톤회의를 마치고 기자들을 만난 민복기는 “민사지법판사들이 낸 7개항의 건의문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사법부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현재 면담을 신청중”이라면서 이제 “남은 것은 사법권을 보장하는 문제만이므로 직접 대통령을 만나 우리 실태를 말하고 그분의 용단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곧 있을 대법원장의 대통령 면담 시기에 관심을 모으며 정상근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화당 주변에서는 박정희가 법무부 장관을 통해 대통령의 뜻을 대법원장에게 이미 전달하였기 때문에 대법원장 면담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법원장의 대통령 ‘알현’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다만 법무장관 신직수가 국회에서 이번 사태를 깊이 반성하며 사법부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변했을 뿐이다.

민복기는 이 답변을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받은 것으로 본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서울민·형사지법 판사들은 신직수의 국회 발언 내용을 녹음으로 듣고 난 뒤, 대법원장의 수습방안은 지법판사들의 요구사항과는 거리가 있다면서 법원 고위층의 미온적인 사법파동 수습을 관망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 면담이 일주일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자 법관들은 8월 9일 다시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검찰 관계자 6명의 인책사퇴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러자 검찰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8월 10일 서울지검 검사들은 이범렬 부장판사에 대한 사건을 백지화하였는데도 판사들이 검찰 관계자들의 인책을 요구하는 것은 사법이 검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부산지법 법관 12명은 8월 10일 사표를 제출하는 등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사법파동이 다시 타오를 조짐을 보였다.


국회에서의 논란

박정희는 “사법파동이 장기화되었더라면 계엄을 선포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법파동은 7월 26일 개원한 8대 국회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8대 국회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7대 국회 시절에 비해 의석을 2배로 늘렸는데, 새로 진출한 신민당 의원들 중에는 한병채, 이택동, 나석호, 최병길 등 판사 출신의 변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은 사법파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언론은 8대 국회가 사법파동으로 시작하였으며 “알찬 질의에 공손한 답변”이 눈길을 끌었다고 보도했다.

사법파동이 계속되는 내내 야당 의원들은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국회에 다시 진출한 양일동 의원도 질의에 나섰다. 그는 구속적부심 당시 직접 겪은 일이라며 중앙정보부원들이 유태흥 수석부장판사를 자신의 눈앞에서 협박하던 일을 폭로했다. 그는 공안검사가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중앙정보부 직제가 그대로 있고, 이 법률이 그대로 있는 한” 사법파동과 같은 일은 시정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법파동의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최영도, 목요상 등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들은 중앙정보부보다는 공안검찰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믿고 있다. 홍성우 변호사는 당시에 판사들은 이 사건이 “정부 차원에서 아주 조직적으로 법원에 대한 길들이기를 시도한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담당 검사가 워낙 법원 쪽에 악명이 나 있던 사람”이라 공명심에 불타는 일부 공안검사들이 박 정권이 사법부를 몹시 불편해하던 분위기에 편승하여 저지른 일로 보았다는 것이다. 홍성우 변호사는 검사들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보부와 “협조하거나 논의하거나 하는 과정”은 있었겠지만, 사법파동이 “정권의 아주 깊숙한 곳에서 의도된 것”은 아닐 것이며 정보부가 먼저 발의해서 터진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검찰의 인사이동

사법파동이 터지면서 법원과 검찰의 정기 인사는 계속 미뤄졌다. 원래 법원과 검찰은 9월 1일의 성동지원과 지청, 영등포지원과 지청의 신설 등에 따라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었으나 사법파동으로 계속 미루어진 것이다. 법관들은 사법파동과 관련된 검찰 인사들의 문책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검찰의 인사는 큰 관심을 모았다. 마침내 8월 24일 전국 366명의 검사 중 58%인 214명을 이동하는 대규모 인사가 단행되었다. 서울지검공안부의 김종건과 이규명은 각각 전주지검과 천안지청으로 발령받았고, 대검 차장 물망에 오르던 서울지검장 김용제는 대검검사로,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대현은 서울고검 검사로 전보되었다. 법관들이 지목한 문책 대상자 6명 중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4명은 공안 일선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종건과 이규명의 경우 서울 근무 2년이면 자동으로 지방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김종건은 고향인 전주로, 이규명은 서울과 가까운 천안으로 발령이 났다는 점에서 문책성 인사라 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최대현은 1년이 안 되어 청와대 사정보좌관실로 발령을 받았고, 이규명 역시 청와대에 근무하게 되었고, 김종건도 다시 서울로 올라왔으니, 10월 유신 이후 법원이 치러야 했던 대가에 비한다면 검찰은 문책이 아니라 포상을 받은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허무한 결말

8월 27일 대법원장 주재 아래 열린 재경법관 전체회의에서 민복기는 이번 파동과 관련하여 검찰 관계자의 징계나 인책을 요구하는 것은 법관 특유의 초연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법관들을 달랬다. 민복기는 회의 후 발표한 성명에서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거론했는데 이는 박정희가 1년여 뒤에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자행하면서 써먹은 논리이기도 했다. 법관들은 격론 끝에 사표 철회를 결의했다. 형사지법 판사들은 성명에서 “지금까지 사법권 독립의 수호를 위한 우리의 충심에서 나온 주장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사태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 축 늘어진 어깨로 업무에 복귀했다. 전국 법관의 3분의 1인 153명의 판사들이 사표를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의 결말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것이었다.

법관들은 사표 제출이 가장 단호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홍성우 변호사는 돌이켜보면 “그런 방법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회고했다. 민사재판은 재판이 좀 지연되어도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형사재판은 구속 피고인들이 일주일만 재판 안 하면 미결구금일수가 그만큼 늘어나고 영장 등 그날그날 처리해야 할 일이 줄지어” 있었기 때문에 법관들이 사표를 내고 투쟁을 계속한다는 게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최대의 무기라고 생각하고 사용했던 게 별 쓸모가 없는 무기”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결국 사표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 뒤의 허탈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홍성우는 원래 1972년 봄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할 생각이었는데, 사법파동이 허망하게 끝난 뒤 “더 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는 마음으로 10월에 김공식 판사와 함께 사표를 제출했다. 이보다 앞서 이범렬 부장판사는 8월 28일 사표를 제출하여 법복을 벗었다. 그는 “평생을 법원에 몸바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군요”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고 한다.

사법파동이 남긴 것

사법파동은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사법파동의 허망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이범렬에 이어 홍성우, 김공식 등이 법원을 떠나고, 1973년의 법관 재임용(다음 회)으로 평소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던 법관들이 다 잘려나가면서 법원은 힘을 잃어버렸다. 유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이 내놓고 판사실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민복기는 박정희가 죽은 뒤인 1981년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중에 박정희를 만났을 때, 박정희는 “사법파동이 장기화되었더라면 계엄을 선포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이 말을 그 후에도 몇 차례 되풀이하였는데, 이는 박정희가 그만큼 사법부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2년 다시 한 번 헌정질서를 유린한 박정희는 이제 더는 사법부 문제로 골치를 앓지 않도록 근원적인 해결책을 강구한다. 사법부에 회한과 오욕만이 남은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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