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중앙청 앞에 탱크와 장갑차들이 출동했다. 박정희 정권은 사법파동 후 유신쿠데타를 준비하면서 법관 재임명을 통해 사법부에서 잘라버릴 법관들의 선별을 미리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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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 제10화 유신 뒤 재임명 탈락 사례
반공법 사건들 무죄 선고 김인중 판사…
‘남북가족 서신왕래 허용’ 이건호 판사…
강근호 신민당 의원 동생 강인애 판사…
중정 주도로 재임명 제외 ‘사법부 장악’ 털어서 먼지 안 나도 탈락 - 김인중 판사 서울고법 김인중 판사는 사법파동 때 대법원장을 면담한 평판사 대표로, 서울형사지법 재직 시 반공법 사건에서 자주 무죄를 선고하여 중앙정보부와 검찰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법파동 후 유신쿠데타를 준비하면서 중정은 법관 재임명을 통해 사법부에서 잘라버릴 법관들의 선별을 미리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판사비위관계철>이라는 자료는 이 과정에서 준비되었다. 이 자료를 보면 정보부가 어떤 구체적인 첩보에 기초하여 내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표적’을 미리 찍어놓고 그의 주변을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식으로 샅샅이 훑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보부는 김 판사가 근무했던 지역에 수사관을 파견했다. 이들은 김 판사와 같이 근무했던 입회서기들, 김 판사가 집행유예나 보석을 내린 모든 사건과 관련자들, 그리고 그의 동창생과 친지들을 소환 또는 연행하여 조사하는 등 주변을 이 잡듯 뒤졌다. 정보부는 김 판사의 초임판사 시절부터 “사건 판결을 둘러싸고 피고 또는 그의 가족 등으로부터 금품을 수뢰한 사실을 적발”하려 했다. 정보부는 먼저 김 판사의 입회서기부터 잡아들여 강압적으로 김 판사가 무죄나 집행유예를 선고한 사건들에 대한 진술을 받아 이를 토대로 ‘비위’ 혐의를 여러 건 포착했다고 본부에 중간보고를 올린 뒤, 관계자들을 찾아가 확인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결과보고서를 보면 수사관들이 만난 사람들은 모두 돈을 준 사실이 없다고 “극구 부인”하거나, “조사해 보았으나 비난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보부는 김 판사의 고교 동창으로 그와 한 달에 두 차례 정도 술 마시고 당구도 치는 친한 약사가 1965년 독한 매독 주사약을 팔다 마약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구속정지로 석방된 사례를 찾아냈다. 정보부는 그가 김 판사에게 돈을 주고 풀려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그 약사의 외숙은 정보부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에 따르면 이 사건은 우연히 김 판사에게 배당되었는데 김 판사가 피고가 자신의 동기 동창이기 때문에 사건 심리를 기피하여 다른 판사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조카는 검찰 조사 때 김 판사를 믿고 거만하게 행동했다가 검사에게 밉보여, 같이 적발된 약사 7명 중 유일하게 구속되었다. 정보부는 김 판사의 비위 사실을 찾기 위해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중앙부처 과장으로 있던 두 사람 등 동창 4명을 데려와 조사하기도 했다. 정보부는 구체적 첩보도 없는 상태에서 김 판사에 대해 철저한 표적조사를 벌였으나 아무런 비위도 적발하지 못했다. 약사 동창생 사건의 처리에서 보듯이 김 판사가 공사가 분명한 모범적인 법관임이 밝혀지면서 그에 대한 비위 조사는 무혐의로 종결됐다. 그럼에도 김인중 판사는 재임명에 탈락했다. 반공법 무죄와 부친의 경력 - 이건호 판사
정보부는 1971년 3월 23일 이건호 판사의 부친과 관련된 사실조사 지시를 내렸다. 이 판사의 아버지는 1950년 당시 서울지검 검사였는데 세칭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항소심 진행 중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부친은 북으로 갔는데, 월북한 것이냐 납북된 것이냐는 것은 연좌제가 힘을 발휘하던 당시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 판사의 해군 법무관 시절 해군 방첩부대에서는 부친 관련 사실을 “본명의 부 이○○ 검사는 6·25 당시 납치 행불되었고 본명의 부역이 아니기 때문에 사찰병류에서 삭제”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7년 만에 재론된 것은 이 판사가 1970년 11월 26일 반공법 위반 사건에서 “일본을 통해 북괴 지역에 안부를 주고받아 기소된 ○○○를 북한에 산다는 사실만으로 북괴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단순 안부 편지가 반공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보도를 보면 “검찰은 단순한 서신 연락에 대해 앞서 반공법 5조 1항(회합·통신)을 적용해 기소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자 반공법 4조 1항(찬양·고무·동조)으로 적용 법조를 바꿔 기소”했는데, 이 판사가 이 또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 판결이 만약 대법원에서 굳어진다면 공안당국은 남한 주민들이 북에 있는 가족 친지들과 서신 왕래를 해도 처벌할 수 없게 된다. 정보부는 이 판결 때문에 이 판사를 주목하던 차에 그의 부친이 남로당원으로 투옥되었다가 월북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런 자가 어떻게 신원조회를 통과해 판사가 되었냐며 이 판사의 신원보증 경위와 최근 동향, 접촉 인물 등을 조사했다. 그런데 정보부가 과거 기록을 뒤져 작성한 <신원특이판사 내사보고>에 따르면, 1964년 6월에 대법원에 보낸 자료에는 부친이 자진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0월에 보낸 신원회보에는 “북괴 정치보위부 청년 2명에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다고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해군 방첩부대, 치안국, 그리고 관할인 성북서의 기록에 모두 이 판사의 신원에 문제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조치 의견’으로는 “본명 계속 내사 특이사항 입수하여 추보”하겠다고 끝맺었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이에 대한 후속 보고서를 발견하지는 못했는데, 이 판사는 1973년 3월의 법관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그 자신이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좌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연좌제 폐지에 대한 <지시각서>를 내리기도 했다. 1971년에는 4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무총리 백두진과 내무장관 박경원이 연좌제 폐지를 밝힌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정보부는 연좌제를 껄끄러운 인물을 공직에서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연좌제의 또다른 사례 - ㅍ판사 서울형사지법 근무 중 탈락한 ㅍ판사는 연좌제 이외에는 별다른 꼬투리가 발견되지 않는다. ㅍ판사에 대한 조사는 유신 후인 1972년 11월 2일에 시작되었다. 그의 부친이 남로당 간부로 활동하여 “ㅍ이 신원상 흠결로 판사 임용이 불가함에도 신원조사 착오로 부당하게 임명되었다 함”이란 첩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중정의 지시를 받은 경찰은 ㅍ판사의 아버지를 연행하여 그가 과거에 빨치산으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복역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정은 경찰의 조사 결과를 접수한 후 “본건 상기명은 공산주의 활동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복역한 바 있는 사람의 친자임으로 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의 판사 재임명시 배제토록 함이 가하겠습니다”라는 보고를 올렸고, ㅍ판사는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ㅍ판사의 부친 정도의 사안이라면 당시에는 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재임명을 통과한 법관들 중에도 신원조사 기록을 보면 한국전쟁 전후 아버지나 할아버지, 삼촌 등이 부역 혐의로 “아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왜 이들은 재임명을 통과했고, ㅍ판사는 탈락했는지 그 이유는 현재 알 수 없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해도, 살아 있는 ‘빨갱이’가 아무리 지독했다 해도, 죽은 ‘빨갱이’보다 더 위험하다고 본 것이었을까…. 야당의원 동생은 판사 할 수 없어 - 강인애 판사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강인애 판사는 신민당 강근호 의원의 동생이었다. 강 의원은 문공위 소속이었음에도 실미도 사건, 중앙경리단 부정사건, 공군의 금괴밀수 사건, 해군 함정 월북 사건 등 군 관련 민감한 사항을 국회에서 많이 질의하였다. 그는 유신 후 보안사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강 판사는 형 강근호 의원이 고문을 당하고 나오자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자신의 토지를 급히 처분하려 했다. 이 땅은 그가 군법무관 제대 직후 판사로 임용되기까지의 기간에 장인의 토지 관련 소송의 법률자문을 하고 대가로 받은 토지였다. 이 땅에는 80여 세대의 주민이 사용료를 내고 불법건축물을 축조하여 살고 있었는데, 강 판사는 거주자들을 상대로 대지명도 가처분 신청을 관할 법원이자 자신이 근무하고 있던 법원인 서울지법 영등포지원에 제기하여 승소 판결을 받았다. 돈이 급한 강인애 판사는 세입자들이 토지를 매입하든지, 아니면 강권을 동원하여 건물을 철거하겠다고 하여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주민들이 “동절기이며 유신과업 수행 과정에 시한의 여유를 두고 타협할 것을 제의”하자 강인애 판사는 “10월유신과 내 재산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내 형이 지금 매를 많이 맞아 병들어서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등으로 거절하였다. 중앙정보부는 강 판사가 문제의 토지를 입수한 경위부터 파악하면서 겸직 금지 규정 위반, 증여세 탈세, 탈세 과정에서의 세무공무원들과의 결탁 등 다양한 각도에서 비리를 포착하려 하였다. 중앙정보부는 “본건 강인애 판사는 법률 단속법 위반 및 증여세 등 포탈 혐의가 농후함은 물론, 평소 반정부적이며 악덕법관의 표본적 인물인 것으로 인정되므로 증거보강, 차제 본명을 검찰로 하여금 의법처리케 함이 가하겠습니다”라고 보고했으나, 위법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반정부 성향이 강한 야당의원의 동생으로 형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한 일이 있는 강인애 판사는 다행히 기소되는 일은 면했으나,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유신정권은 이렇게 수십 명의 목을 치며 사법부를 장악해 갔다. 유혈이 낭자해진 사법부에서 목이 잘리는 변을 당한 사람들과 살아 욕을 보아야 했던 사람들 중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였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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