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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30 13:42 수정 : 2009.06.30 14:40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검찰, 미행·사찰 ‘사법부 손보기’
이범렬 판사 향응수수 혐의 영장
판사들 ‘법원 도청’등 폭로·줄사표
검찰 옹호 민복기 대법원장 사퇴 요구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
제 7 화 - 사법파동 (상)

사법부의 독립성

1971년 6월과 7월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성은 사실 평지돌출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장군인들의 법원난입사건이나 동백림사건 당시의 괴벽보사건은 법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60년대 후반부터 사법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이 권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서는 그야말로 중정(중앙정보부)이나 검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서 할 건 못한다든가 하는 분위기가 그때만 해도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법원은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 힘이 세다는 말까지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지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이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법관 2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71년 7월 사법파동 당시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형사지법 판사들의 사표를 모아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발단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 이규명 검사는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재판장인 이범렬 부장판사가 배석 최공웅 판사 및 참여서기 이남영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 사실은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갔을 때, 피고인의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것은 잘한 일은 아니지만, 출장비가 책정되지 않는 현실에서 피고인측의 요구로 현장검증을 나갈 경우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는 일이었다. 당직이었던 손진곤 판사는 선배 법관의 영장을 심사할 수 없다며 송명관 형사법원장에게 사건의 재배당을 요구했고, 송원장은 이를 받아들여 유태흥 수석부장판사에게 사건을 재배당했다. 유태흥 판사는 5시간의 기록검토 끝에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의 영장청구에 판사들은 격앙했다. 홍성우 판사 등은 각 방을 돌며 판사들을 리더십이 강하고, 성격이 화통했던 형사8부 전상석 부장판사 방으로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는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왔다고 한다. “이럴 바에 우리 다 쥐약 먹고 죽어버리자” 소리까지 나왔다니 결론이 집단사표로 내려진 것은 차라리 온건한 것이었다. 판사들은 그 자리에서 사표를 작성하였고 유태흥 수석부장판사는 전부 37명의 사표를 송명관 법원장에게 제출했다.

검찰은 집요했다.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영장을 기각하자 검찰은 증거를 보강하여 다음날 새벽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보강된 증거란 두 판사가 출장가서 ‘객고’(客苦)를 푼 것에 관한, 좀 쑥스러운 내용이었다. 검찰은 이범렬 판사를 미행하고 이들을 접대한 여성들은 심문하여 이런 정보를 수집했다. 더구나 검찰은 보도진에게 구속영장의 내용을 읽어주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형법 제 126조의 “검찰 등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등이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한 피의사실공표죄를 명백히 범한 것이었다. 검찰이 잠자던 법원당직자를 깨워가며 접수시킨 치졸한 내용의 2차영장은 또 다시 법원에 의해 기각되고 말았다. 이범렬 판사에 대한 영장청구는 이규명 검사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김종건 검사가 담당했다고 한다. 이 문제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어 법무장관 신직수가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김종건이 이범렬과 친분이 있어 사건을 회피했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하기도 했다.


왜 이범렬 부장이었나?

표적이 된 이범렬 부장판사는 심성이 곱고 착했지만, 검찰과의 관계에서는 자를 것은 칼로 자르듯 서릿발 나게 확실히 잘르는 존경받는 법관이었다. 목요상 변호사는 자신이 <오적>사건과 <다리>사건을 맡아 심신이 고달파 서울형사지법의 부장판사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는데, 이범렬 부장만이 소신껏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이범렬 부장의 형사지법 항소3부는 1971년 1월부터 7월까지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19건의 사건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고, 반공법 위반사건 5건에 대해서도 무죄 또는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서울대생 신민당사 농성사건을 무죄판결한 양헌 부장판사와 함께 검찰의 ‘사랑’을 담뿍 받게 된 것이다. 검찰은 양헌 판사도 얽어 넣기 위해 수사관을 구치소에 잠입시켜 정보를 수집하기까지 했는데, 양헌 판사의 부인에게 돈을 주었는데 “돈은 돈대로 처먹고 형은 빵, 실형 때리고 영 나쁜 놈”이라고 불평을 터트리는 재소자를 만나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조사해보니 중간에 돈을 전달하던 사람이 꿀꺽해버린 것이라 양헌 판사는 다행히 화살을 비껴갈 수 있었다고 한다. 현직법관이 향응이나 금품수수와 관련하여 구속된 사례는 자유당 시절에도 몇 차례 있었고, 심지어 서울지법원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 대하여 법관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적은 없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검찰의 보복이었음이 명백한 것이었다.

파동의 확산

형사지법의 젊은 단독판사들은 대법원장의 면담을 요구했고 휴가 중이던 민복기 대법원장도 급거 귀경하여 소장판사들과 만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에 돌아온 민복기는 대법원장인지 법무장관인지 모를 언동으로 빈축을 샀다. 그는 이번 사건이 법원과 검찰의 갈등처럼 알려져 있지만, 자신은 갈등으로까지는 해석하지 않으며 사소한 개인사건으로 서로가 의사전달이 안 돼 빚어진 오해일 뿐이라고 사태의 의미를 축소했다. 그는 이번 사태를 사법권 침해나 보복으로 보지 않는다면서 법무부 장관을 만나 해결책을 모색해보겠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법관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대법원장이 사법권 침해가 아니라 오해라고 검찰을 비호하면서 겨우 법무장관을 만나보겠다고 하였으니 젊은 판사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대한변호사협회는 비상총회를 열어 검찰보다도 대법원장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사퇴를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르면 사법부의 최고책임자인 대법원장이 법관들의 비장한 결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검찰을 비호하는 발언을 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영도, 홍성우 등 판사들은 7월 30일 대법원장 면담을 앞두고 더욱 강력하게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사법침해 사례를 1) 반공법·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법관을 용공분자로 취급하여 협박하고 신원조사를 했다, 2) 판사실에 도청장치를 했다, 3) 무죄선고가 나면 법관이 부정한 재판을 한 듯 비난하면서 예금통장을 조사했다, 4) 판사들을 미행·사찰하고 함정수사까지 했다 등 7개항으로 정리했다. 서울민사지법원의 법관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민사지법의 판사 44명도 집단사표를 제출했고, 형사지법의 판사들과 더불어 위의 7개항을 뼈대로 한 사법권수호건의문을 발표하였다. 건의문 발표와 함께 서울형사지법의 홍성우, 김인중, 최영도, 장수길, 금병훈, 목요상, 김공식 등 7명의 판사가 민복기 대법원장을 방문하여 검찰의 사법권 침해사례에 대한 시정책을 강구할 것을 요청했다. 최영도 변호사에 따르면 대법원장이 “놀라시는 척 하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검찰총장에 법무장관까지 지내 검찰의 행태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 만한 대법원장이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판사들이 자부심을 갖고 여태까지 외압에 굴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검찰과 정보기관에서 일일이 판사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도청하고 미행하고 은행계좌 조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판사들은 사법부의 건의문에 대해 서울지검 차장검사 박종훈은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고 법관들의 건의문에서 거론된 7개항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7월 31일에는 가정법원 판사 4명, 휴가 중이던 민사지법 판사 8명, 서울고법 판사 13명이 사표를 제출하여 사표를 제출한 법관의 수는 총 1백 명을 넘어섰다. 당시 법관의 정원은 455명이었는데 파동발발 사흘 만에 근 4분의 1의 법관이 사표를 내던진 것이다. 판사들의 사표제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방과 고등법원으로 계속 확산되었다. 한편 검찰은 두 차례나 영장이 기각된 데다가 뜻밖에 판사들이 일치단결하여 집단행동으로 나와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검찰은 서울사법서사회가 수수료 일부를 서울민사지법 등기소에 정기적으로 상납을 한 혐의가 있다면서 일제 수사에 착수하는 것으로 맞불을 놓았다.

(다음 회에 계속)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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