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6.23 11:44 수정 : 2009.06.23 11:49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노동자·학생·의사·교수·판사도 나서
“연금받는 군인 국가배상 제외안돼”
대법, 정부·국회 압력에도 위헌 판결
‘다리’‘오적’ 사건에서도 획기적 조처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

제 6화 -국가배상법 위헌! 집시법, 반공법 위반 무죄!

국가배상법 위헌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거센 도전을 간신히 따돌리고 어렵게 3선에 성공했다. 박정희의 세 번째 임기 첫 해는 촛불에 덴 이명박의 첫 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촛불은 석 달이었지만 박정희의 1971년은 1년 내내 빈민과 노동자에서부터 대학생은 물론이고 의사, 판사, 교수, 기자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데모에 나섰으니 시간이 국방부 시계보다 훨씬 더디게 갔을 것이다. 유신의 긴 겨울이 오기 전, 1971년은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반짝 제 목소리를 또렷이 냈던 기간이었다. 심지어 사법부까지….

박정희는 1971년 7월 1일 7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교련반대 데모로 요란한 팡파르를 울려주더니, 6월 16일에는 수련의들이 파업을 시작했고, 사법부에서는 획기적인 판결을 연이어 내놓아 박정희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6월 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군인이 전투훈련 및 직무수행 중 전사, 순직, 공상으로 유족연금 등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는 국가배상법 제2조의 단서조항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의 원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으로, 군인의 희생으로 국고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를 배척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위헌법률 심사권이 대법원에 있었는데,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71년 대통령선거에서 40대 기수 김대중이 보인 위력은 박정희를 불안하게 했다.

정부여당은 1967년 3월 3일 국가배상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나치시대의 낡은 법이론인 특별권력관계를 원용하여 군인 등의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한 바 있다. 사법사를 다룬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이를 베트남 파병 이후 발생한 사상자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1960년대에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의 희생자를 논외로 하고도 매년 평균 1400명 이상 사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라크전에서의 미군의 연평균 사망자 수가 800여 명인데, 우리는 전쟁을 치르지도 않으면서 믿을 수 없는 인명손실을 입고 있었다. 정부여당은 이런 인명손실을 줄일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는 대신, 군대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나 그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박정희는 만약 국가배상법이 위헌 판결이 나면 국고손실이 엄청나게 되니 반드시 합헌판결이 나도록 법무부 장관이 책임지고 대법원판사를 설득(압력행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배영호 법무부장관은 이는 사법권의 독립을 해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답변하여 박정희의 노여움을 사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막기 위해 법원조직법을 개정하는 편법을 동원했다.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은 대법원 판사 16명 전원의 합의체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정부여당은 위헌 결정 정족수를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 과반수 찬성에서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변경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1970년 7월 16일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켜버린 것이다. 이는 대법원의 위헌선언 가능성을 배제하여 법원의 위헌 심사권을 실질적으로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1971년 6월 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국가배상법 제2조가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위헌심사의 정족수를 제한한 법원조직법 역시 위헌으로 판결했다.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우리 헌정사상 획기적인 판결이라 찬양했고, <조선일보>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표방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법원사>에서는 당시 국회가 행정부의 시녀처럼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무조건 통과시키던 정치현실에 비추어 대법원의 결단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국가와 개인 사이의 첨예한 이해대립이 걸린 문제에서 사법부가 개인의 편에 서서 국가의 기본권 침해를 지적한 것은 왜 삼권분립이 필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매우 컸다. 1972년 10월 17일 또 다시 탱크를 앞세워 헌정질서를 짓밟은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대법원에서 위헌심사권을 빼앗아 헌법위원회로 넘겼고, 위헌 의견을 낸 손동욱, 김치걸, 사광욱, 양회경, 방순원, 나항윤, 홍남표, 유재방, 한봉세 등 대법원 판사 9명 전원을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시켜버렸다. 또 박정희는 유신헌법에서 군인·군속·경찰공무원 등은 국가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못박아버렸다. 이 조항은 1987년 헌법을 개정할 때도 여전히 살아남아 현행 헌법에서 가장 부끄러운 조항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어떤 법률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할 때 헌법재판소에 가져가 위헌 여부를 물어본다. 그런데 군인 등의 경우는 헌법에 떠억 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되어 있으니 제아무리 유능한 변호사가 수십 명 붙어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니 군대 가서 죽으면 개값만도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신민당사 사건 무죄판결

대법원의 위헌결정이 있은 지 일주일이 안 된 6월 28일 서울형사지법은 신민당사에 들어가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하라고 요구했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대학생들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내렸다. 재판장이었던 양헌 변호사의 회고에 의하면 이 사건은 경찰에서도 즉결감밖에 안 된다고 이야기했던 사건인데 검찰에서 무리하게 기소하다보니 당연히 무죄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무죄가 선고되자 검사가 “요씨” 라고 ‘두고 보자’라는 뜻의 일본말을 내뱉었고, 검찰이 자신의 계좌를 추적하고 과거에 그가 다뤘던 다른 사건들도 조사하는 등 크게 반발했다고 회고했다. 민복기 대법원장은 박정희가 격노해서 대법원장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불만을 표시했다고 뒤에 말했다. 유신정권은 1973년 법관 재임용과정에서 양헌 부장판사는 물론이고 배석인 김성기, 장수길(‘김&장’의 그 장수길 변호사) 두 판사까지 탈락시켜버렸다.

1971년 5월 필화사건의 피고인인 문학평론가 임중빈, 주간 윤형두, 발행인 윤재식씨가 법정에 서 있다. 이들은 이례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아 풀려났지만 이 잡지는 72년 창간 두 돌 특대호를 내자마자 ‘10월 유신’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다리〉지 사건 무죄판결

박정희는 취임 직후에도 사법부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7월 15일 이른바 <다리>지 필화사건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검찰은 이 잡지의 1970년 11월호에 실린 임중빈의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이 프랑스 5월혁명과 뉴레프트의 활동을 본받으라고 권유하여 국외공산계열과 북한을 고무ㆍ찬양했다며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했었다. 그런데 <다리>지는 당시 김대중 후보를 적극 지지하던 김상현 의원이 운영하던 잡지였고, 필자 임중빈은 김대중 후보의 자서전을 대필하고 있었다. 임중빈의 구속은 김대중 후보 쪽이 기획한 자서전이 선거국면에 제 때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리>지 사건의 재판장은 목요상 판사였는데, 검찰은 임중빈 피고가 통혁당 사건으로 집행유예 중이기 때문에 동일범죄를 다시 범했을 때 반공법으로는 최고 사형이 가능하다며, 이 사건을 형사지법의 단독판사가 아니라 합의부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 단독판사들은 ‘통제 불가’이기 때문이다. 목요상 판사는 김지하 시인의 유명한 <오적> 필화 사건의 담당판사이기도 했다. 목요상 변호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법원에는 중앙정보부 조정관이 4명이나 상주했는데, 이들이 수시로 방에 찾아왔다고 한다. 이들은 ‘유죄를 선고하라, 중형을 주라’는 식으로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높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이 재판 잘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신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등의 발언으로 은근슬쩍 위협을 가했는데,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보통 커다란 압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검찰과 중앙정보부는 피의자들의 보석허가를 내주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목요상 판사는 <오적> 사건 관련자들의 보석을 허가했다. 그는 <오적> 사건에 대하여 “결론을 못 냈어요. 사람만 다 내줬지. 하도 지랄들을 하는 바람에. 재판만 했다 하면 그놈들 쫓아와서 뭐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니까”라고 회고했다. 그는 자꾸 외압이 들어와 재판진행을 안 하고 처박아두고 있던 차에 어찌된 영문인지 <다리>지 사건까지 떠맡게 되었다고 한다.

목요상 판사에 따르면 <다리>지 사건 재판을 맡게 되자 중정 요원들이 비밀요정에 가자, 탤런트를 소개해주겠다는 등의 말로 유혹했고, 사건 담당 검사와 전화로 서로 욕을 하며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다리>지 사건의 변호사들은 <오적> 사건 때 보석허가를 내 주었다가 목요상이 애먹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목요상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석신청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직권으로 윤형두 등 두 사람을 보석으로 석방해 버렸다. 임중빈에 대한 선고 전날에는 검사가 찾아와 지키고 있는 바람에, 목요상은 이웃의 친구 집으로 도망가 판결문을 작성했다. 다음날 법정에서 임중빈 등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방청석에 있던 문익환 목사와 김상현 의원이 “대한민국 만세”, “목요상 판사 만세”를 외쳐 “아이구,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회고했다. 검찰에서는 모 검사가 일주일 동안 잠복하면서 자신을 감시했고, 주위 사람들 다 조사하여 큰 형은 농협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7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법조계 안팎에는 정부가 곧 법원을 손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이는 곧 사법파동으로 현실화되었다.성공회대 교수·한국사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