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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16 13:24 수정 : 2009.06.16 14:04

1967년 동백림 사건 재판 현장. 이 사건의 1심과 2심에서는 사형을 포함하여 중형이 선고됐으나 대법원에서는 간첩죄 부분에서 대부분 무죄가 선고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홍구의 사법부-회환과 오욕의 역사] 5. 무장군인 법원난입과 괴벽보 사건
“‘비협조적’ 김제형 서울지법원장 최고회의, 법원조직법 개정 내쳐
한일회담 반대 시위자 영장기각에 군인·중정 직원, 총들고 법원 들이닥쳐”

이상한 위인설관 - 형사지법과 민사지법의 분리

지금은 서울의 법원이 중앙과 동서남북 등 5개 지방법원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1963년까지는 서울지방법원 하나였다. 그런데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부에게 서울지법의 깐깐한 법원장 김제형은 불편한 존재였다. 군사정권은 수시로 법관을 최고회의 등 권력기관에 파견할 것을 요구하고, 재판에 대해서도 무리한 요구를 했지만 김제형은 이에 협조하지 않았다. 김제형은 법원에 나와 있던 중앙정보부 조정관과도 자주 마찰을 빚었다. 1963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김제형이 사법서사회에서 등기사건 1건당 20원씩의 부당한 수수료를 받고 있는 것을 감독하지 못했고, 서울지법의 일부 판사들이 판결서 작성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대법원에 인사조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군부의 생트집에 대하여 법원 쪽의 반발이 고조되자, 최고회의는 대법원장에게 처리를 일임한다고 한발 물러서는 척했다. 그러나 6월 18일 최고회의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하여 지방법원은 필요에 따라 민사지법과 형사지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규정을 신설하여 7월 1일자로 서울지법을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으로 나누어버렸다. 김제형 서울지방법원장은 졸지에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애먼 놈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위인설관은 흔하디 흔하지만, 강직한 미래의 대법관을 떨궈내기 위해 자리를 둘로 쪼갠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형사지법이 분리된 것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정치적 사건에 대해 정권의 개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사건

1964년 3월부터 시작된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5월 20일 서울대에서 대학생 1500여명이 모여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경찰은 이 시위와 관련 학생과 시민 180여명을 연행하여 서울형사지법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영장담당 양헌 판사가 일부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러자 이튿날 새벽 4시 30분경 권총과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수도경비사 1공수 소속 군인 13명이 경찰의 인도를 받으며 서울형사지법 당직실에 난입한 것이다. 양헌 판사가 이미 퇴청한 사실을 확인한 이들은 곧 양헌 판사의 집으로까지 쳐들어가 “영장을 기각한 판사가 누구냐?”며 행패를 부렸다.

동백림 사건 때 재판을 받는 저명 재독 음악가 윤이상씨(서 있는 사람). <한겨레> 자료사진

이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컸다. 대법원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엄중 항의하였고, 국회에서 야당은 이를 ‘국기를 흔드는 난동’으로 단정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 사태의 근본원인을 엉뚱하게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과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서 찾는 담화를 발표하여 여론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의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박정희는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사건은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6·3사태로 비화되는 데에서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정부는 군인 8명과 법원난입을 지시한 최문영 대령을 구속해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무죄로 석방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도 얼마 안 가서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사건은 흔히 정권차원에서 사법부를 길들이기 위해 계획된 공작이라기보다는 “5·16과 군정을 통해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일부 장교들이 나름대로의 즉흥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한 결과”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당시 군검찰관으로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백형구, 최영도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에 민간인으로 기소된 김상목과 유국준은 공수특전단 출신 예비역 중령으로 중앙정보부 과장으로 근무하던 자였다고 한다. 최영도 변호사는 김상목과 유국준의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고 의심했으나 증거가 없어 거기까지는 파헤치지 못했다고 회고하면서, 이 두 명의 민간인과 관련된 부분을 공소장에 밝히려 하다가 청와대와 육군본부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백형구 변호사는 두 사람이 중앙정보부 출신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공개했다가는 정말로 내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냥 ‘민간인’이라고만 밝혔다고 증언했다. 백형구 변호사는 이에 덧붙여 “중앙정보부나 국가권력이 직접적으로 개입 혹은 주도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정보기관이나 정권 차원의 개입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백림사건 판결

1967년 7월 8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한의 대남공작단 사건을 발표했다. 유럽의 유학생과 교민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하거나 평양을 왕래하고 공작금을 받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200여 명에 달하는 사건 관련자 중에는 프랑스 화단에서 인정받던 화가 이응로 부부와 독일에서 활동해온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부부를 포함해 지식인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백림사건은 중앙정보부가 해외에 있던 피의자들을 우방국의 주권을 침해하면서 무리하게 국내로 연행해 와 커다란 국제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1심과 2심에서는 사형을 포함하여 중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는 간첩죄 부분에서 대부분 무죄가 선고되는 등 파기환송 판결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윤이상씨 부인 이수자씨 등은 재판과정에 중앙정보부 등 외부의 압력이 작용했다면서 “중정은 재판관과 검사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재판관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3일간 호텔에서 감금되다시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 당시 재판 진행절차만큼은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의자 대부분은 독일, 프랑스 등에서 중정에 의해 연행되었기 때문에 양국 정부가 백주에 자기 영토 안에서 한국 정보부가 불법납치를 저질렀다며 강력하게 항의하는 등 이 사건에는 국내외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이 덕분에 1심에서 재상고심에 이르는 재판 과정과 내용은 상당히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진행되었다. 1심 재판장 김영준 판사는 “1심 기간 중 판사들을 특정 호텔에 집단 투숙시키면서 판결문을 특정 방향으로 작성하도록 강요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건 기록이 방대해서 처음에는 우리 집에서, 나중에는 호텔에서 숙박하면서 검토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정에서 관여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판결에 중정 등 외부압력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당시 중정에서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이후 작성한 <동백림 사건 등 증거보강 추가수사계획>에는 검찰지원비 25만원(검사 3명, 검사서기 2명) 및 재판 후 지원비 추가분 25만원(판사 5명) 등 예산이 책정되어 있어 중정이 검찰·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최소한 행사하려고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이 보고서 내용 중 증거보강 추가 수사계획상의 소요예산에 검사, 검사서기, 판사에게 각 5만원씩의 지원비가 왜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쌀 한 가마가 5250원이던 당시 시세로 볼 때 5만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이에 관해 1심 재판장 김영준은 중앙정보부에서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받은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으며 당시 지출결의서 등 회계장부가 보존되어 있지 않아 과거사위원회에서 이 예산이 실제 집행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 상의 검찰 및 재판부 지원비가 ‘추가분’이라고 명시되어 있다는 점은 재판 진행 과정에서 수회에 걸쳐서 상당 액수의 지원금이 제공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괴벽보 사건

동백림 사건 재판과 관련한 또 다른 의혹은 대법원 파기 환송 이후의 ‘괴벽보’ 사건이다. 대법원 선고 3일 후인 1968년 8월 2일, 서울 시내에 애국시민회 명의로 “김일성의 판사를 잡아내라! 북괴와 야합하여 기회를 노리는 붉은 도당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전단이 배포됐다. 다음날도 대법원에서 가까운 배재중학교, 법무부, 반도호텔, 그랜드호텔, 대한공론사 부근 등에 역시 애국시민회 명의로 작성된 벽보가 붙었다. 같은 날 조진만 대법원장에게는 “사법부 안에 용공판사를 두어서 되겠느냐”며 힐문하는 내용의 협박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재판에 관여했던 최윤모 판사가 돌연 사표를 제출하면서 이 괴벽보와 협박편지 사건의 배후에 중정이나 행정부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대한변협은 물론 국회와 야당에서도 주모자 색출과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조진만 대법원장도 행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이나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1968년 9월 31일, 국회 내에 ‘괴벽보 사건 등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지만 발족 2개월 20일 만에 특별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철저 수사 재개를 촉구한다”는 내용의 조사보고서만 채택했다. 당시 언론인 이상우 등이 괴벽보 사건의 배후에 중정이 있었다면서 이 일로 인해 “모 기관의 중견 간부가 직위해제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과거사위원회에서 중정 직원 인사자료를 조회해본 결과 1968년 7월에서 9월 사이에 중정에서 직위해제된 고위간부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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