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6.09 14:35
수정 : 2009.06.0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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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박정희 시대 재평가에 나섰다. 1961년 6월18일 육군사관생도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바라보는 박정희와 쿠데타 주역들. 김천길 사진집 (서울발 외신종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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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사법부 근본 개혁 지지
지지 후보따라 법조계는 분열
박정희, 법원에 감독관 파견
복도에 줄긋고 좌측통행 강요
5·16 군사반란과 사법부의 암흑시대
2004년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 결정은 한국 사회의 주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선출된 권력이 국민들에게 약속한 공약을 정치적 판단에 의해서 뒤엎은 것이라는 비판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 결정이, 삼성의 변칙상속에 대한 무죄 판결이 오로지 법과 양심을 위해서만 이루어진 것일까 하고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회의원을 뽑듯이 사법부의 구성원들도 국민들이 직접 선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법관선출제도는 일견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들은 제2공화국 시절 법관선출제를 도입하려 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났다.
제2공화국 헌법이 법관의 선거제를 채택한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가 대법원장 및 대법관 임명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여 사법권의 독립을 확고하게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김병로 대법원장의 퇴임 이후 사법부가 정치권력에 굴복하였던 결과, 국민 여론은 사법부의 근본적인 개편을 가져올 법관선출제를 지지했다. 법관선출제는 사법의 민주화를 위한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시행의 준비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선출된 법관이라고 하여 꼭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법관을 선출할 것인가도 복잡한 문제였다.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거나 선거인단 선거에서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거일이 다가오자 선거 분위기가 혼탁해졌고, 지지 후보에 따라 법조계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선거는 실시되지 못했다. 법관 선출을 위한 선거인단 선거를 하루 앞두고 5·16 군사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초임판사였던 변정수에 따르면 “만일 그대로 선거가 실시되었더라면 판사들이 학연, 지연, 인맥으로 분열되어 인화가 크게 깨질 뻔”했을 정도로 분열상은 심각했다.
육군 소장 박정희 일당은 1961년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헌정질서를 파괴하였다. 국회는 해산되었고, 법원 역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거하여 재구성되었다. 정권을 탈취한 군부는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설치하여 정상적인 사법부 기능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는 등 사법권을 중대하게 침해했다. 5·16 군사반란 이후 1963년 12월까지의 군정기간은 법원이 완전히 군부의 통제하에 있었던 사법부의 암흑기였다.
당시 군부는 ‘5·16 혁명과업의 완수’라는 미명하에 사건의 신속한 처리를 강조하면서 군사작전을 벌이듯 밀어붙였다. 혁명재판소 재판은 군인을 재판장으로 하여 군 병력이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방청인 출입은 제한되고, 충분한 증인신문이나 증거조사도 없이 진행되었다. 당시 서울지법 단독판사로 근무했던 이돈명 변호사에 따르면 군사정권이 미제사건의 조속한 처리와 재판의 속전속결주의를 강조하다 보니 명동 시공관에 법관 20~30명을 데려다놓고 통행금지 위반자 등 여러 가지 사건의 재판을 진행한 일도 있었다. 이때 이돈명 변호사가 많은 피고인들을 풀어주자, 나항윤 서울지법원장이 다가와 옆구리를 찌르며 “너 어쩌려고 그러냐”고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인들도 해 보니까 문제가 많다고 판단했는지 이후에는 극장에 판사들을 모아놓고 재판을 진행하는 터무니없는 짓을 다시 하지는 않았다. 군사정권은 또한 4월혁명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에 대하여 3·15 부정선거 원흉 등에 대한 처벌에 소극적이라는 명목으로 김용식 특검 부장 등 특검 검찰관 17명과 이른바 6대 사건의 재판장이었던 장준택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을 구속하기도 했다. 한편 혁명재판소 재판관 차출에 응하지 않은 한복 변호사도 구속되는 곤욕을 치렀다.
군사정권한테 사법부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독의 대상이었다. 군사정권은 1961년 5월31일 제1군 사령부 법무부장인 홍필용 대령(군법무관, 뒤에 중앙정보부 국장을 오래 지냄)을 대법원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각급 법원에도 역시 감독관이 파견되었다. 또 1962년 4월30일에는 현역 군인인 전우영 대령을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법관 자격이 없는 자를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전우영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 대령이 “사법부는 다른 행정기관과는 다르게 혁명정부에 협조도 하지 않고, 따라오지도 않으며 권위의식에 젖어 현대적인 행정 능력이 다른 부처에 비해 떨어진다”고 지적하면서 법원행정처장으로 근무할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현역 군인이 법원행정처장에 임명되자 조진만 대법원장이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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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기 전 대법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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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은 1961년 8월2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거하여 228명의 판사를 임명했는데, 기존 법관 중 47명은 의원면직 형식으로, 5명은 재임명 탈락 형식으로 법복을 벗게 했다. 이때 법복을 벗은 법관에는 4월혁명 직후 대법관들의 직무유기 사건에 대한 재정신청을 담당했던 윤병칠 판사 등 사법개혁에 적극적인 법관들이 당연히 포함되었다. 군사정권은 법관 임명 후 군대의 정훈교육처럼 법관들에게도 특별교육을 실시했다. 법원장급 이상을 제외한 211명의 판사와 226명의 검사가 1주일 단위로 교육을 받았는데, 주된 교육 내용은 군사혁명의 의의, 혁명입법 해설, 혁명과업의 방향, 공산주의 비판, 평화통일론, 민형사 실무 등이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모든 공무원에 대해 신사복을 못 입게 하고, 대신 코르덴이라는 천으로 만든 제복(국민복)을 입혔는데, 법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사정권은 심지어 법원 복도에 테이프를 붙여 놓고 좌측통행을 강요하기도 하여 자존심 강한 법관들의 불만을 샀다.
한편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1962년 5월14일 대법원장에게 ‘지시’ 각서 5호를 내려 보냈다. 이 지시 각서에서 그는 혁명 이래 일부 법관이 아직도 새로운 세계관의 확립 없이 돈과 술에 팔리고 정실과 야합하는 등 구질서와 타협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으로 혁명정신과 동떨어진 재판을 했다고 지적했다. 일부 법관들이 중대한 국가적·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권리 위에 땅을 치고 우는 약자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도 없이 마치 법이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식 교육을 받은 박정희는 당시 사법부를 군대의 법무감실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박정희 시절 법무부 장관 3년, 대법원장 10년을 지낸 민복기조차 이렇게 얘기했다. “내 생각으로는 그 당시 대통령이 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법부를 군의 법무감실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군 형사소송법에 ‘법관은 참모총장에 독립해서 판결한다’고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참모총장에 의해 좌우될 여지가 있거든요. 참모총장이 감형도 할 수 있으니까요. 사법부도 마찬가지로 보았을 거예요. 민주주의 국가이니 사법부의 독립을 내세우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제사에 대추 밤 놓듯이 구색을 맞춘 정도였지요.”(<매일경제신문> 1990. 7. 17)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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