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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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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 이승만과 진보당 사건
유병진 부장판사 양심적 판결 외압받은 고법·대법서 뒤집혀
‘경향신문 사건’ 대법원장 등 판사들 사퇴 권고에 물러나
김병로 대법원장의 퇴임 뒤에도 법관들은 비교적 이승만 정권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사법부의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이 무렵 판사에 임용된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은 당시 법관들은 “비위에 안 맞으면 언제라도 옷 벗고 변호사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권력의 입김이 재판에서 잘 통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법원이 1958년 4월 서울대 문리대 학보에 ‘무산대중의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글을 기고한 류근일-<조선일보>의 바로 그 류근일-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나, 6월에 용산중학 교감으로 재직 중에 간첩 혐의로 기소된 이태순에게 집행유예를 내린 것은 법과 양심에 따른 대표적인 판결로 꼽힌다.
이승만은 김병로의 후임 대법원장 선임을 둘러싸고 대법원과 갈등했다. 대법원은 김동현 전 대법관을 제청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이우익 전 법무부장관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우익은 당시 자유당 경북도당위원장을 맡고 있었기에 대법원장을 맡기에는 부적절했다. 1958년 1월28일 대법원은 다시 조용순 대법관을 제청했는데, 이승만은 4개월 이상 시간을 끌다가 6월 9일에야 국회의 승인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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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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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조봉암(오른쪽 두 번째). 1959년 조봉암 사형판결로 사법부는 이승만의 정적 살해 공동정범이 되고 말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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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온 이승만에게 법원을 손볼 좋은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1948년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법관들이 임용되었는데, 이제 헌법에 규정된 법관의 임기 10년이 다 된 것이다. 어느 나라나 재판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법관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한 신분보장을 한다. 법관의 임기도 검사에게 특별한 임기가 없는 것처럼 별도로 명시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옛 소련이나 일본처럼 극히 일부 국가만 예외가 있을 뿐이다. 대다수의 나라가 법관의 임기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은 이유는 헌법상 유일하게 신분 보장을 받는 법관이 임기라는 제한으로 오히려 신분 보장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제헌헌법에 법관의 임기를 두게 된 사연은 단순치 않다. 불행하게도 해방된 조국의 사법부를 일제와 무관한 깨끗한 법조인들만으로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10년 쯤 지나 새 나라가 젊은 법조인들을 키워낸다면 일제 시기의 별로 깨끗지 못한 경력을 가진 자들을 충분히 교체할 수 있지 않을까? 이헌환 교수는 일제 치하의 법관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도입된 임기제와 연임규정이 나중에 집권자의 의도에 따라 사법권 억압에 이용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승만 정권이 법관연임법을 제정하자 서울지법 윤학로 부장판사는 법관의 재판이 행정부의 견해와 어긋나는 경우에 이 법이 악용될 우려가 있다면서, 이 법에 의한 연임을 원치 않는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윤학로 부장은 1958년 4월 근민당계 혁신세력의 조작간첩사건에서 피고인 15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바 있어 권력 쪽의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몸이었다. 이승만은 1958년과 1959년에 걸쳐 안윤출 부장판사, 유병진 부장판사 등 20여명의 법관의 연임을 거부했는데, 이는 전체 연임 대상자의 4분의 1 이상을 탈락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법관의 신변을 위협하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의 외압에 흔들리던 대법원은 결국 하급심 판사들에 의해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이 사퇴 권고를 당하는 전무후무한 일을 당하게 된다. 사태의 발단은 1959년 4월30일 이승만 정권이 군정법령 88호에 의거하여 대표적인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에 폐간처분을 내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는 폐간처분의 법적 근거로 군정법령 88호를 내세웠는데, 이 법령이 대한민국에서 법적효력을 갖느냐가 논란이 되었다. 대한변협은 군정법령 88호는 제헌헌법 실시와 함께 효력을 상실한 것으로 그 법령을 운용하는 것 자체가 명백한 위헌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 쪽은 5월5일 서울고법에 행정처분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재판부는 폐간 57일 만인 5월26일 경향신문의 발행허가 취소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가처분결정을 내렸다. 재판장 홍일원 부장판사는 오필선 서울고등법원장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불러 정부 쪽 승소를 강력히 종용했고, 김두일 대법관도 역시 같은 요구를 했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자유당 간부 중에는 홍판사를 없애버리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고, 처갓집 친척까지 은행계좌를 조사하는 등 보복을 계속했다고 한다. 정부는 폐간취소 가처분 결정이 내려지자 7시간 만에 경향신문에 대해 무기정간 조치를 내렸다. 경향신문도 맞대응했는데 이번에는 서울고법에서 정부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경향신문 쪽은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사안이 시급한 가처분 신청을 3개월이 지나서야 대법원 연합부에 회부했고, 연합부는 또 2달이 지나서야 군정법령 88호의 위헌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다며 헌법위원회에 위헌여부 판단을 제청했다. 그런데 당시 헌법위원회는 참의원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구성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대법원이 이렇게 시간을 끌며 경향신문의 입을 묶어놓으려는 정부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사이에 4·19가 터졌다. 대법원은 너무 정치적이었다. 아니 정치적이라기에는 너무 치졸하게 속보이는 짓을 했다. 헌법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던 대법원이 4월26일 이승만이 하야하자 몇 시간 만에 경향신문의 복간을 허용한 것이다. 대법원의 이런 기회주의적 태도에 가장 분개한 것은 서울고법, 서울지법 등 하급법원의 판사들이었다. 이들은 가처분결정 바로 다음 날 긴급회의를 열고 조용순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의 사퇴 권고를 결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지금 신영철 사태에서와 같이 직무수행이 부적절하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3·15 부정선거 당시 선거관리위원장인 김두일 대법관과 선관위원이던 변옥주 대법관이 즉각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조용순 대법원장도 사표 제출과 번의를 계속하다가 5월11일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 시민이 5월18일 경향신문 가처분사건을 맡았던 조용순 전 대법원장 이하 대법관 전원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서울지검이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고발인이 이에 불복하여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을 냈다. 서울고법 형사1부 윤병칠 부장판사는 적극적으로 이 사건을 조사하여, 대법관들이 4월26일 부랴부랴 가처분 결정을 하면서 전화로 합의결정을 했으며, 결정문에도 사후에 서명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대법관들의 직무유기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며 대법관들에 대해 준기소 명령이 내려질 것임을 시사했다. 이렇게 하급심 재판장에 의해 현직 대법관들이 무더기로 형사사건의 피의자가 될 처지에 놓이자 배정현 대법원장 직무대행을 비롯한 대법관 6명이 1960년 11월7일 재판부를 기피신청한 것이다. 상급법원 판사들이 하급법원 판사를 기피한 것은 세계 사법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대법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윤 부장판사에 동조적 입장을 보인 고위법관들을 인사조치하여 하급법원 판사들의 동요를 유발했다. 사안이 시끄러워지자 윤 판사는 자진해서 이 사건을 회피했다. 그러자 기피신청을 낸 대법관들도 만 하루 만에 기피신청을 취하하였다. 사건은 형사2부로 넘어갔는데, 재판부는 사건을 맡은 지 3시간 만에 기각결정을 내렸다. 대법관들이 형사피고인이 되는 일은 면했지만, 창피한 일이었다.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조봉암, 이승만 사진 출고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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