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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5.26 13:56 수정 : 2009.06.02 14:14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미군정 임명 김용무 대법원장
민사사건 개입하자 판사 반발
이승만 정권 서민호 의원 사건땐
시위대 동원 “판사 살해” 외치게

2. 미군정-이승만 시절

1945년 11월 정동과 서소문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해방 이후 몇 달간의 사법 공백을 깨고 서울에서 처음으로 재판이 열린 것이다. 일제 강점기 옛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의 장헌식의 횡령사건에 대한 재판이었다. 한복을 입은 우리 법관이 우리말로 재판을 진행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장안 사람들이 구경을 나올 만큼 새로운 사법부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재판이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이고, 전문성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새 나라의 사법부는 제국주의의 지배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야 하건만 법률지식을 갖춘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 재판소 판사는 250명이고, 검사는 138명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변호사는 모두 420명이었는데, 그중 한국인은 250명으로 38도선 이남에는 150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미군정은 이런 인력 부족을 이유로 친일 법조인을 걸러내기는커녕 무자격자들에게도 서둘러 변호사 자격을 부여했다. 이때 변호사 자격을 움켜쥔 자들 중에는 일제 때의 법원 서기들이나 수완이 좋은 미군정 통역관들이 많았다. 일제하의 마지막 변호사시험은 1945년 8월14일부터 시작하여 민법, 형법, 상법 세 과목만 치르고 해방으로 중단되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관련 서류를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응시자들은 집단으로 전원 합격을 요구했다. 응시자 200명 중 남쪽에 있어 연락이 된 106명이 변호사시험 합격 증서를 교부받고 판검사로 임명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11일 김용무 변호사를 대법원장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임명된 지 불과 넉 달여 만에 판검사 40여명에 의해 불신임안이 제출되는 불명예를 겪었다. 미군정하에서 미군 쪽의 재판 간여를 막지 못한다는 구조적 요인에 대한 불만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대법원장 자신이 재판에 부당하게 간여하려 했던 때문이었다. 김용무는 1946년 서울지방심리원 오승근 부장판사가 담당한 민사사건에 대해 잘 보아 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보냈는데, 오승근 부장이 덜컥 대법원장을 직권으로 증인으로 채택해 버린 것이다. 대법원장으로서는 망신도 이런 망신이 있을 수 없었다. 대법원장 자신이 스스로 재판의 독립성을 침해했으니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김용무는 오승근 부장을 대구지법으로 좌천 발령을 냈는데, 오승근은 사표를 제출하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결국 김용무도 사표를 제출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반려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 정권은 삼권분립 정신을 훼손하며 사법부를 침해했다.
유임 직후인 1946년 6월9일 김용무는 광주지방법원에서 행한 훈시 내용으로 또다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법원의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언급하는 자는 사법부 관리로서의 자격이 없다. 미군정 정책에 반대하는 자나 신탁통치와 좌파 이데올로기에 찬성하는 자는 그들의 범법행위를 증명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더라도 엄중 처벌해야 한다”라고 말하여 이번에는 변호사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았다.

미군정이 한국인재판소의 재판에 개입한 것은 한국인 법관들의 자존심을 침해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의 재판이 좌우대립의 격동기에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경우가 많아 신뢰성이 떨어졌다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특히 1947년의 대한민청 사건에서 한국인재판소가 좌익 계열 인사를 납치·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김두한 등에게 벌금형을 선고하자 미군정 당국은 이 사건을 군사재판소로 이송토록 명령했다. 미군 24사단 군사재판소는 1948년 1월 김두한 등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김두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특사로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법원장에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권변호사 출신의 김병로가 임명되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반민특위 특별재판장도 맡았는데, 민족적 양심을 가진 보수파로서 친일잔재 청산의 의지를 가진 김병로는 친일파에 의존하려던 이승만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로는 이승만의 비호 아래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특경대를 해산하자 이를 맹비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는 지병이 도져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아픔을 겪었다. 대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운 그에게 이승만은 사표를 종용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어느 대법관 출신 인사는 의족에 의지한 채 “지팡이를 짚고 한쪽으로 기운 그의 모습은 병들기 시작한 사법부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안타까워했다.(<조선일보> 1971년 8월7일)

이승만 정권이 행한 사법권 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1952년의 서민호 의원 사건을 들 수 있다. 서민호는 야당의 맹장으로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서 반대하는 데 앞장서 왔다. 서 의원이 4월26일 지방 순시 도중 술 취한 현역 육군 대위가 시비를 걸고 먼저 권총을 쏘자 서 의원이 지니고 있던 호신용 권총으로 응사하여 육군 대위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사건이지만, 당국은 서 의원을 살인죄로 구속했다. 국회는 5월14일 서 의원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조선방직 직공 3천명 등 시위대를 동원하여 법원을 포위하고 서 의원을 죽여라, 서 의원을 풀어주면 판사를 죽이겠다고 외치게 하였다.

헌법 정신에 따르면 국회에서 석방 결의안이 통과되면 지체 없이 석방되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검찰은 석방지휘를 하지 않았다. 결국 석방결의안 통과 닷새 후인 5월19일 안윤출 부장판사는 친지들이 “만약 석방조치를 하면 너는 귀신도 모르게 죽는다”는 충고를 하였음에도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내려 서 의원을 석방했다.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이끄는 시위대가 다시 법원으로 몰려와 “안윤출을 죽여라”라고 외친 것이나 안 판사의 하숙집이 피습된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나갔다. 그는 이 혼란을 빌미로 부산·경남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의원들이 탄 버스를 크레인을 동원하여 견인하는 등 상상 밖의 초강수를 두면서 자신의 뜻대로 만든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서민호는 물론 재구속되었고, 그의 사건은 계엄 선포 이전에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군사법원으로 이관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안윤출은 석방 결정 후 3개월간 시골의 처갓집으로 피신했는데, 그 대신 배석판사들이 특무대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안윤출 부장판사는 1958년에 실시된 법관 재임용에서 1호로 탈락했다. 이승만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김병로 대법원장에게 불만을 표했다. 이에 김병로는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것으로서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된다”고 답변했다.

사법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정부가 무리하게 기소한 국가보안법 사건이나 정치적 이유로 옭아 넣은 뇌물사건 등에 대해 연거푸 무죄를 선고했다. 특히 1955년 12월 사법부가 <대구매일신문> 최석채 주필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다음달 검찰의 항소마저 기각해 버리자 이승만 정권은 몹시 분개했다. 최석채는 이승만 정부가 무슨 일만 있으면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을 두고 ‘학생을 도구로 사용치 말라’는 사설을 썼다가 신문사는 테러단에게 습격당하고 본인은 구속되었었다. 이 테러사건에 대해 어느 경북도경 간부는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1957년 12월 김병로 대법원장의 정년퇴임식. 그는 소신 있게 이승만 정권과 맞섰다.

이미 여러 차례 사법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해 온 이승만은 1956년 2월20일 제22회 국회 개회식에 보낸 치사를 통해 “사법부의 형편이 말이 아니”라면서 “사법부에 재판관 되는 사람들은 세계에 없는 권리를 가지고 행사”하고 있고, “경찰이나 검찰에서 소상히 조사해서” 재판소에 넘기면 재판소에서는 그냥 풀어준다고 불만을 퍼부었다. 그런데 노회한 이승만은 눈엣가시와 같은 김병로 대법원장을 묘하게 끌고 들어갔다. 사법부에 문제가 많지만 “다행히” 대법원장이 “무슨 중대한 문제가 생길 적에는 행정부와 협의”해서 “판결을 하는 까닭으로 큰 위험은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승만은 앞으로 “어떤 방면으로든지 재판장의 권한에 한정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이승만의 치사에 국회는 발칵 뒤집혔다. 의원들은 이승만을 비난하면서도 김병로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만약 대법원장이 중대한 문제를 놓고 대통령과 상의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사법부는 다 썩어버린 것”이라며 대법원장의 국회출석을 요구했다. 김병로는 “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해서 법을 운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재판장의 권한 제한은 입법부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지만 그런 특수입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에게는 정년이 없지만 대법원장에게는 정년이 있었다. 만 70살이 된 김병로는 1957년 12월 자신보다 13살이나 많은 이승만을 두고 정년퇴임을 했다. 사법부 식구들에게 “굶어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고 늘 강조해 온 그는 국회에서 행한 퇴임인사에서 사법부의 독립성 유지를 위해 법관들의 ‘최저생활 보장’을 간곡히 호소했다.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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