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헌/행복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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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21돌 특집] 행복경제학
[기 고] “이 문제들은 집단풀이로 전환합니다. 누구든 오늘 밤 12시까지 정답을 메일로 보내면 점수를 모두 주겠지만, 정답이 없으면 모두 점수를 깎겠습니다.” 그날 밤늦게, 한 학생이 전화로 질문을 한 뒤 12시가 다 되어 정답을 보내왔다. 다행히 학생들은 점수를 깎이지 않았다. 다음주 나는 두 번째 집단별 문제를 내주면서 취지를 설명했다. “점수를 개인 간의 경쟁으로 여기는 문화에 익숙한 여러분이 집단으로 점수 따기를 하는 방식이 의아할 수 있어요. 점수를 개인끼리 경쟁으로 몰고 가는 것이 지금 세상이죠. 여러분과 다를 것 없는 친구들 중에는 부모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유학을 가거나 명문대를 다니는 게 현실입니다. 그들이 여러분보다 잘났으니 인정하고 굽혀 사는 것이 현명한 처세술이라고 사회는 말하고 있죠. 경쟁을 하면서도 우리 모두 좀더 만족스러운 방법은 없을까요?” 마감인 당일 밤 12시까지 두 통의 전화와 10여 통의 메일이 왔다. 그중에는 문제에 대한 답변도 있었지만, 문제에 대한 느낌을 적거나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문제 풀이도 섞여 있었다. 이번 학기에 학생 90여명과 내가 대한민국의 보통 대학에서 경제학 지식에 앞서 삶의 지혜를 찾고 있는 모습이다. 점수 얻기와 등수 따기를 전적으로 개인과 가족이 알아서 하라는 것, 경쟁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주장, 평등과 분배만을 내세우며 인간이 가진 차별적 우월성에 대한 본능을 무시하려는 이상론. 이 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진행 과정과 결과에서 사회적 수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집단적 협동으로 집단적 발전이 이루어질 때 경쟁은 삶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일정 정도는 같이 가야 한다. 그 이후 개인의 특성과 자질을 인정하며 경쟁판을 벌이는 것이, 소모적 무한경쟁을 막고 승자에 대한 인정, 패자에 대한 배려를 일구어 낼 수 있는 방책이다. 돈 때문에 어려워진 판국을 돈을 벌어 고치겠다는 것은 순리를 모르는 하급 처방이다. 설사 돈이 생긴다 해도 그 돈을 서로 많이 갖겠다는 다툼이 격해질 게 뻔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돈 버는 재주가 있다고 나서는 정치인이나 경제전문가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경쟁과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제도·정책·문화의 늪에 빠져 있다.
남을 불행하게 하면서 얻은 돈과 권력은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 법이다. 경쟁과 비교로 가리가리 토막난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엮어낼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속성이 있다. 사회적 여건과 맥락에 따라 이기적이 될 수도, 이타적이 될 수도 있다. 1%가 잘나 보이는 건 99%가 있기 때문이다. 그 1%가 가진 재주와 힘을 사회 모두를 위해 쓰도록 유도해야 한다. 바로 정부와 정치인의 일차적 의무다. 지금 학생들은 집단 문제풀이를 하고 있다. 점차 방관하는 학생이 줄어들고 동참하는 학생이 늘어난다. 일부는 평생 경험하지 못한 과정 자체를 즐기는 듯도 싶다. 이런 현상은 내 수업의 점수평가 방식이 절대평가라는 구조 때문에 가능하다. 거기에 그 구조적 잠재성을 활용하는 집단 문제풀이방식이 결합됐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이기주의와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사람들은 이미 준비돼 있다. 조승헌/행복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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