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21돌 특집] 2009 농촌 보고서
갯마을 간척뒤 농촌으로…이젠 레저단지 개발광풍
“쫓겨나면 어디로 가나” 살갑던 이웃 깊어진 주름
전남 해남군 산이면 구성리는 30년 전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지난 80년대 서남해안 간척사업으로 영암호와 금호호가 생기면서 쌀농사와 겨울배추를 번갈아 짓는 농촌으로 변모했다. 69가구에 남자 135명, 여자 143명 등 278명이 살며, 중학생 둘, 초등생 여덟명이 버스로 10~15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 간척지 농사로 비교적 젊은 층이 많은 편이다. 버섯재배 농장과 건축자재 공장 등 기업 2곳이 입주해 있다. 순천 김씨 집성촌이기도 한 이 마을이 다시 관광레저도시 개발의 바람을 맞고 있다. 군민축제가 열리는 날 마을을 찾았다. 다문화가정 며느리, 귀농한 40대 이장, 초등3년생, 팔순이 넘은 노인회장,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의 일상을 통해 오늘의 농촌을 다섯가지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전남 해남군 산이면 구성리
뼈빠지게 일해도 “여보, 빚이 왜 이리 많아?”
① 필리핀 이주여성 도미네스
“세수 해야지. 빨리 빨리”
1일 아침 7시 마리테스 도미네스(37)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선(9·초등3)이와 익선(7·초등1)이가 부시시 일어났다. 셋째딸(6)과 넷째딸(2)도 깨워 씻겼다. 남편(47)은 이른 새벽 밭을 둘러보러 나갔다. 2003년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희귀질환 진단을 받았으나, 남편은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한다. 아침 메뉴는 된장찌개, 도미네스는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된장을 푼 뒤 소금까지 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손맛을 따를 순 없지만 이젠 김치찌개 정도는 자신 있다. 네 딸을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나니 아침 8시30분. 그는 남편의 화물차를 타고 군민의 날 행사가 열리는 읍내로 갔다.
필리핀에서 온 마리테스 에이 도미네스씨가 아이들과 함께 남편을 배웅하고 있다.
오전 10시 해남공설운동장에 도착했다. 14개 읍·면별로 달리기와 배구 경기가 벌어져 응원이 뜨거웠다. 99년 10월 한국에 온 도미네스는 구성리에 사는 재중동포 출신 이주여성 박순화(31)씨와 일본 출신 이주여성 나오코(42)를 만났다. 헤이룽장 출신인 박씨는 어려움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다. 가톨릭에서 통일교로 개종한 도미네스는 일요일마다 읍내 통일교회에 나가 나오코를 만난다. 이들은 다음 달 6일 출산 예정인 도미네스를 걱정했다. 도미네스는 “이번엔 아들이래”하고 웃었다. 이들은 구성리 부녀회장이 출전한 남녀 혼성 단체씨름 경기에 구경을 가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필리핀 서부의 섬 고향 아부욕에서도 비슷한 축제가 열린다. 고향에선 한국 사람들이 모두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도미네스는 어디서든 소작농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빚만 쌓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2006년 농협에서 날아온 연체금 상환 독촉장을 본 뒤 남편에게 “빚이 왜 이리 많으냐”고 물었다. 문중 제각에 딸린 집에서 살며 남편과 늦게까지 일했던 세월이 허망했다. 2005년 열아홉번만에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억척스럽게 적응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도미네스였다. 더욱이 마을이 기업도시 예정지에 포함돼 대규모 골프장이 들어서면 빌린 논 9900㎡마저 내놓아야 할 형편이어서 답답하다.
오후 5시. 도미네스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맞았다.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딸의 알림장에 ‘10칸 받아쓰기’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딸에게 ‘이건 뭐야’ 하고 물었다. 큰 딸 조선이는 태권도 학원에 갔다가 저녁 7시에 돌아왔다. 조선이는 며칠 전 “느그 엄마 필리핀 사람이지?”하고 놀리는 친구에게 “그런다. 느그 엄마 우리 엄마처럼 영어 잘하냐?”하고 따져 물었던 아이다. 도미네스는 이런 아이들을 보면 행복하다. 그래서 한국행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는 대학에 진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안정된 직업을 갖는 것이 절실한 꿈이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분열하는 주민들 “아이들도 떠나기 싫대요”
② 이장 김병재씨
이장 김병재씨
“오늘은 군민의 날 행사가 있습니다. 9시까지 마을회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1일 아침 7시20분 전남 해남군 산이면 구성리 마을회관 방송실. 이장 김병재(42)씨가 안내방송을 시작했다.
그는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상태였다. 요즘 제이(J)프로젝트 문제로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하느라 술자리가 잦다. 제이프로젝트는 전남도가 해남 영암 일대 서남해안에 추진하는 관광레저도시 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이 추진되면서 그는 조상대대로 이어온 보금자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는 1998년 구제금융 위기 직후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경기도에서 사업을 했으나 여의치 않아 귀농을 결심했다. 초기에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형편이 나아진 편이다.
방송을 마치고 승용차를 갖고 있는 젊은이들한테 주민들에게 동승 편의를 제공해달라고 부탁하고 8시쯤 아침식사를 하러 집으로 향했다. 집은 아담한 단층짜리 슬라브 양옥이다. 2년 전 부모님이 살던 터에 새로 집을 지었다. 멋진 집을 꿈꾸며 한 달 동안 잠도 잊은 채 설계도 30여장을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지은 집에서 2년 동안 아내와 1남3녀가 단란하게 살아왔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서둘러 일어섰다. 8시20분 버스를 놓치면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막차는 오후 7시20분에 끊긴다. 이 때문에 중3인 큰딸이 야간학습에 참여하지 못한다. 부진한 과목을 보충할 학원이 주변에 없는 게 아쉽지만 아이들은 정든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은 눈치다. 그는 요즘 뒤숭숭한 마을 분위기에 아쉬움을 느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마을은 정이 넘쳤다. 올해 들어 개발을 두고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로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고향을 떠났던 이들도 행여 개발이익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주 마을을 찾는다. 지주들은 보상을 더 받으려고 땅을 임대해주는 대신 억지로 나무를 심는 통에 주변이 각박해지고 있다.
10시에 행사장에 도착하니 함께 나주 혁신도시와 무주 기업도시를 찾았던 이들이 보였다. 그는 개발을 무턱대고 반대하는 것같아서 지난 3월 이들 개발 예정지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얻은 결론은 “주민들을 위한 개발이 아니다”라는 사실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방조제 축조로 만들어진 간척지 땅을 경작한다. 소작농이 많아 3300㎡(1천평) 이하의 영세농가가 60% 가량된다. 주민들이 보상을 제대로 받는다해도 40대~80대가 대부분이어서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실업대란에 취업할 곳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장사를 한다해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축제가 열린 행사장의 하루는 예전처럼 즐겁지 못했다. 마을 상황이 어수선해 먹을거리도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 오후 늦게 마을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2년 뒤 군민의 날 행사가 열리면 다시 참석할 수 있을까…”
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김필중 회장이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다.
65살 이상 44명 “약값 대느라 허리 휜당게”
③ 노인회장 김필중씨
“잘 다녀와요. 몸이 아파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1일 오전 9시 전남 해남군 산이면 구성리 마을회관 근처. 이 마을 노인회장 김필중(81)씨는 허리가 아픈 아내(72)의 배웅을 받았다. 아내한테 들어가라 손짓을 하며 자신의 1t 화물차에 올라탔다. 이미 이 마을 할머니 4명이 타고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시동을 걸고 군민의 날 행사장인 읍내 우슬경기장으로 향했다.
운전 중에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해엔 아내의 수술 때문에 마음이 늘 무거웠다. 올해에는 그래도 아내의 건강이 다소 나아져 읍내 나들이를 나섰지만 집에 혼자 남겨진 아내한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허리 수술을 받은 아내는 앉았다가 일어서는 간단한 동작을 하려해도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아내는 지난해 3월 굽은 허리를 펴는 수술을 했다. 인공뼈를 5개나 몸안으로 넣어야 하는 대수술이었다. 이 수술마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1년 만인 지난 3월 재수술을 받느라 고생을 해야했다.
극도로 건강이 나빠진 아내는 수년 전부터 우울증까지 앓고 있다. 하루에 두번씩 약을 먹어야 한다. 아내가 병고에 시달리니 밥과 빨래 등 집안일은 그의 몫이다. 마을 할머니들은 자신에게 “마음 좋은 노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재수술을 한 뒤 아내는 장애 5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 등급으로는 혜택이 크지 않아 병수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병원 쪽은 4급 이상으로 등급을 올려 받자고 조언했다. 하지만 절차도 복잡하고, 좋은 결과를 확신할 수 없었다. 돈만 버리는 것 같아 신청을 아예 포기했다.
그는 지난해 자신의 땅 8250㎡(2500평) 을 팔았다. 빚을 갚고 아내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2억원쯤 받았지만 지금 남은 돈이 없다. 해병대 출신으로 국가훈장까지 받은 그의 한달 수입은 40여만원이다. 무공수훈자회 지원금에다 국민연금, 노령연금 등이 보태진 돈이다. 아내가 우울증만 없다면 그런대로 버티겠지만 약값이 크게 부담이 된다.
오전 10시. 사고 없이 행사장에 도착했다. 팔순이 넘었지만 그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8년 전 운전면허를 땄다. 주변에서는 “나이 먹어서 주책맞게 무슨 운전이냐”고 힐난했지만 흘려버렸다. 운전을 하기 때문인지 주변에서 노인회장을 강권해 맡고 있다. 마을에는 65살 이상 노인이 여자 32명과 남자 12명 등 44명이나 된다.
요즘 농사짓기는 예전만 못하다. 지난해 간척지 땅 1만9800㎡(6천평)을 경작했다. 올해는 마을 주민과 개발업자의 생각이 달라 농사를 못 지을 수도 있다. 차라리 보상을 받고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다. 행사장에서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먹으며 담소했다. 좋은 음식을 보면 혼자 있는 아내가 생각나 마음이 가라앉곤 했다. 점심을 먹고 일찌감치 행사장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 도로 옆에서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는 해병전우회원들을 보면서 불현듯 군대생활이 떠올랐다.
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김채림양(오른쪽)이 동생 채원양과 함께 집 베란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몸 불편한 엄마 아빠, 그래도 같이 살아 행복”
④ 초등 3학년 채림양
버스가 왔다. 1일 아침 8시10분 김채림(9·초등3)양은 언니(11·초등4)와 해남교통 버스에 올랐다. 학교는 버스로 10분 거리다. 채림이의 아빠(44)가 두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20여 년 전 교통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친 아빠는 후유증 때문에 한달에 한번 목포의 병원으로 약을 타러 간다. 아빠처럼 엄마(30)도 몸이 건강하지 않아 일을 잘 하지 못한다. 엄마 아빠는 할머니와 함께 큰 아빠의 논과 밭에서 농사를 조금 짓는다. 채림이는 버스에 올라 단짝 친구 김조선(9·초3)을 만났다. 조선이 엄마는 필리핀에서 시집왔다. 버스 안엔 군민의 날 구경을 가기 위해 읍내로 나가는 할아버지들이 눈에 띄었다.
10분 뒤 학교 건너편 길에 버스가 섰다. 채림이는 조선이 손을 잡고 교문에 들어섰다. 전교생 79명의 작은 학교다. 채림이는 2층 교실에 도착해 먼저 컴퓨터 앞으로 갔다. 3학년은 13명. 조별로 날마다 영어 문장을 외운 뒤 인터넷에 댓글을 올리는 것이 숙제다. 채림이는 숙제를 한 친구들의 이름을 적어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채림이는 1교시 읽기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작문을 했다. 한부모와 사는 원식이라는 주인공이 돼 편지를 쓰는 글감이었다. 편지 말미에 ‘사이좋게 진넬게요’라고 적은 조선이는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듯 공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외국 출신 여성을 엄마로 둔 아이들은 대체로 받아쓰기와 띄어쓰기를 잘하지 못한다. 채림이는 2교시 땐 운동회를 준비하려고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나갔다.
채림이네는 기초수급권자다. 채림이는 학기 초 가족사항 조사서에 아빠 이름을 쓴 뒤 관계라는 네모칸엔 ‘별로’라고 적었다. 엄마 이름 옆의 관계란엔 ‘행복’이라고 썼다. 엄마와 아빠는 앞으로 마을에 큰 골프장이 들어서면 어디로 가서 살아야 할 지 막막하다고 걱정한다. 채림이도 이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그래도 채림이는 엄마·아빠와 함께 사는 것이 다행이다. 할머니와 사는 같은 반 친구 보인(가명)이는 아직도 엄마가 외국에 있다. 외할머니와 사는 하민(가명)이는 아예 엄마의 성으로 바꿔 버렸다. 채림이는 남을 잘 배려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다. 채림이는 마음 속에 선생님이 되는 꿈을 키우고 있다.
채림이는 오후 4시까지 운동회에서 선보일 탈춤을 연습했다. 공부방은 쉬는 날이다. 채림이는 보통 오후 3시께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공부방으로 간다. 채림이에겐 지역아동센터의 공부방이 유일한 과외수업 공간이다. 3학년 친구 13명 가운데 7명이 공부방 회원이다. 채림이는 3학년에 올라와 공부방에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웠다. 처음엔 A부터 S까지밖에 쓸 줄 몰랐지만, 벌써 2단계로 올라갔다. 집으로 돌아온 채림이는 9시 뉴스를 할 때까지 할머니(72) 방에서 혼자 숙제를 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캄보디아에서 온 쟌닌(오른쪽)이 해남버섯영농조합법인에서 동료와 함께 일하고 있다.
버섯농장 온 지 17달 “마을은 접근 힘든 성”
⑤ 외국인노동자 스라이 쟌닌
1일 아침 버섯농장은 조용했다. 떠들썩한 마을 분위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이장이 두차례 방송을 했지만 농장에선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마을과 농장 사이에 있는 언덕을 넘지 못한 탓이다.
해남버섯영농조합의 외국인 노동자 스라이 쟌닌(31·캄보디아)은 이날 오전 6시 평소처럼 눈을 떴다. 동료 네명이 기거하는 작은 방이다. 방에는 아직도 비행기 화물표가 붙은 가방 네개가 키를 재듯 나란히 서있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벽에 붙은 어머니 사진에 아침 인사를 건넸다. 소식이 뜸하면 먼저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야 마음이 풀리는 따뜻한 어머니다. 그는 어머니처럼 넓은 이마와 커다란 눈을 지녔다. 웃는 모습이 아이처럼 맑은 그는 어릴 적부터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프놈펜의 대학에 진학했으나 1학년 때 그만 뒀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지만 등록금을 대지 못했다. 이 때부터 돈을 벌어야만 했다.
우연히 한국에 가면 한달에 100만원쯤 받는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타향살이의 계기가 됐다. 학원을 다니며 한국어를 배우고 시험도 치렀다. 경비 400만원은 다림질로 한달에 20만원씩을 벌어 마련했다. 이렇게 일년 남짓 준비해서 겨우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쟌닌은 2007년 11월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경기 화성의 농협연수원에서 2박3일 간단한 인사법을 배우고 버섯농장에 온 지 14달이 지났다. 농장에선 한국인 3명과 외국인 10명이 일한다. 이중 캄보디아 출신이 6명이다.
“추운 겨울에 와서 힘들었어요. 동상에 걸린 듯 피부가 터지고 손가락이 짓물러 병원 신세를 여러차례 졌지요. 그땐 날마다 집으로 전화하고 남몰래 눈물 짜고….”
농장 안에서 살며 곁눈질한 한국의 농촌은 신기하고 놀라웠다. 농부들이 줄지어 느릿하게 일하는 남국과는 달리 한국에선 이앙기와 콤바인이 뚝딱 농사를 해치우는 것처럼 보였다. 궁금해도 마을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큰 탓에 접근하기 힘든 ‘성채’로 느껴졌다. 농장 안에 베트남과 조선족이 일했지만 마을로 시집온 같은 민족 출신 새댁들을 전혀 모르고 지내는 눈치였다. 굳이 만날 필요도 없었고, 남편들이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지레 짐작으로 위축됐다.
이날도 쟌닌은 군민의 날 축제가 벌어졌는지, 주민 대부분이 읍내로 떠났는지 알길이 없었다. 마을의 소식과 면의 한글교실은 다문화 가정엔 열려있어도 외국인 노동자한테는 아직 닫혀있다. 초대받지 못한 그는 오전 10시반 읍내의 정반대 쪽인 목포로 방향을 잡았다. 동료가 서울 결혼식에 가는 바람에 모처럼 얻은 휴일을 보내려는 나들이다. 점심으로 국수를 먹고 시장을 봤다. 혼자서 버스를 타지만 은행에서 송금하고 마트에서 물건사는 일이 없으면 외출을 삼가온 터였다. 불교 국가에서 왔어도 여태껏 절집을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오후 4시반 마을 한켠에 ‘섬’처럼 떠있는 농장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읍내로 나간 주민들이 아직 귀가하지 않은 듯 마을은 고요했다.
해남/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