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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5.13 13:50 수정 : 2009.05.15 10:07

하버드가 아니었어, 오바마를 키운건….

[한겨레 창간 21돌 특집] 진보의 길찾기
대통령감 공급하는 미국의 지역운동





풀뿌리조직·자금모금 방식 등
3년간 빈민운동 경험에서 축적

실패를 통해 타협을 배우고
대중과 호흡하는 정책 생산

철저히 ‘대중’ 기반한 정치학습
‘집권’만 고민하는 한국과 큰 차

“시카고에서 지역사회운동가(organizer)로 활동한 경험은, 하버드 로스쿨에서 받은 것보다 더 값진 생애 최고의 교육이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해 6월 버락 오바마는 아이오와에서 열린 선거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세장을 찾은 수만명의 청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고의 명문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그가 3년 남짓한 지역사회운동 경험을 더 높이 산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그해 11월 해소됐다. 새로운 선거운동 기법을 도입한 오바마는 전통적 방식에 의존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여유있게 따돌리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그가 사용한 ‘풀뿌리(Grass root)식’ 선거운동이 바로 미국 지역사회운동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지난 4일 시카고 시내의 가말리엘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레거리 갈루조는 오바마와 지역사회운동을 함께 했던 활동가다. 그는 “버락은 원래 능력이 뛰어났지만, 그를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로 만든 것은 지역사회운동”이라고 말했다. 지역사회운동은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걸 목표로 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대중’으로부터 시작한다.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한 뒤 함께 문제해결에 나선다. 오직 집권을 목표로 삼고 대중을 동원 대상으로만 여기는 ‘워싱턴식 정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갈루조는 “오바마는 당시 시카고 외곽의 빈민가 올트겔드의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상세하게 듣고 상담했다. 그가 만든 보고서는 다른 활동가들 것보다 뛰어났다”고 회상했다. 일상에 쫓기는 주민들을 만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오바마는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으로 주민들의 냉대를 극복했다. 오바마는 지난해 대선을 비롯해 각종 선거에서 이런 경험을 잘 활용했다. 풀뿌리 조직과 연계해 유권자들의 요구에 기반한 공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의료보험·공교육·이민법 개혁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약은 상대 후보의 탁상공론식 공약보다 호소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을 짜임새 있게 조직하는 방법도 지역사회운동의 큰 자산이다. 지난 대선 때 오바마 캠프는 수백만명의 열성적 지지자들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대선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대중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려면 싸움에서 이기는 경험이 필요하다. 가시적 성과가 없으면 순식간에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게 대중이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운동에서 때로는 타협이 강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갈루조는 “항상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이길 수는 없다. 상대방의 가치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올트겔드 주민들과 함께 주거환경개선 운동을 하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본 경험이 있다. 공청회에 주택단지를 관리하는 회사 쪽 책임자를 초대한 뒤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다가,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공청회가 난장판이 된 것이다. 주민들은 그 후 다시는 싸움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동료 활동가에게 “나의 미숙함 때문에 일을 망쳤다”며 많이 자책했다고 한다. 오바마 정부가 의료보험과 에너지 개혁을 추진하면서 의료계와 보험회사, 석유재벌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것은 이런 경험의 산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환경운동단체나 의료개혁운동단체들로부터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지역사회운동이 성공하려면 정부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재원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나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면 이들에게 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재원은 주민들의 기부금이나 회원 회비 등 ‘풀뿌리’에서 나오는 돈이다. ‘이민자의 권리를 위한 행동’ 대표 조슈아 호잇은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 후원금을 금기시할 필요는 없지만 풀뿌리에서 나오는 돈이 가장 건강하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선 캠프가 인터넷 소액기부운동을 통해 선거자금을 모금한 건 이런 교훈에서 출발한다. 지나치게 기업들에 정치자금을 의존할 경우 그들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운동가 출신의 미국 정치지도자는 오바마뿐이 아니다. 메릴랜드주의 바버라 미컬스키 연방상원의원(민주당)은 여성계를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 이미 입지를 굳혔다. 일리노이주의 루이스 구티에레즈 연방하원의원도 민주당의 주목할 만한 정치인으로 꼽힌다. 이들은 오바마보다 더 오랫동안 지역사회운동의 경험을 쌓은 뒤 정계에 진출했다. 호잇은 “지역사회운동은 정계에 진출하려는 활동가들에게 훌륭한 교육의 장을 제공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단순히 지역사회운동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바마를 지역사회운동가로 처음 발탁한 제리 켈먼은 “오바마는 정부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정책으로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런 능력이 그를 일반 활동가들과 다른 길을 가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카고/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오바마, 연봉 1만2천달러 받고 지역운동 시작”

시카고서 처음 발탁한 제리 켈먼

명문대생 속속 몰려
지역운동 좋은 조짐

제리 켈먼

“연봉 1만달러를 제시했더니, ‘2000달러가 더 필요하다’고 합디다.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닐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대답하더군요. 흔쾌히 더 주겠다고 했지요.”

1985년 미국 매사추세츠 렉싱턴의 한 커피숍에서 청년 오바마를 만난 제리 켈먼은 그의 명석함과 진지함에 반했다. 켈먼은 “오바마는 지역사회운동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자신을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었다”고 그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켈먼은 오바마의 자서전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마티 카우프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지금 시카고 외곽의 한 교회에서 지역사회운동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오바마는 지역사회운동가 시절을 가장 값진 경험이라고 했는데, 오바마가 여기서 배운 게 무엇인가?

“무엇보다 사람들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운 게 가장 큰 자산일 것이다. 정치지도자에게 이것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또 있을까. 지난 대선 때 보니까 지역사회운동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그대로 선거에 활용하더라. 그게 큰 효과를 본 것 같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면 적을 만들기 쉽다. 지역사회운동가들이 가장 금기시하는 게 바로 이데올로기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에, 오바마 영향으로 지역사회운동 붐이 일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렇다. 그들이 지역사회운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명문대학을 갓 졸업한 유능한 인재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는 것은 좋은 조짐이다. 내가 일했던 때보다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연봉이, 나는 물론이고 오바마가 일했던 때보다 훨씬 좋다.”

시카고/이춘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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