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구리 해안의 용천수 자구리물. 서귀포 주민들이 소낭머리물과 함께 오랫동안 식수공급원·빨래터로 사용해 온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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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 워킹맵 40. 제주 서귀포항과 서귀진
이중섭초가~매일올레시장~이중섭거리~자구리해안…제주 서귀포 옛도심 5km
서귀포는 ‘세계 7대 자연경관’이 아니어도 아름다운 섬 제주도 남부의 그림 같은 항구도시. 앞바다를 지키는 섶섬·문섬·새섬·범섬이 늠름하고, 포구 양쪽 해안절벽에 드리운 정방폭포·천지연폭포 물줄기가 늘씬하다. 관광객들이 좀더 멋진 경관을 찾느라 무심코 지나치는 서귀포 옛도심에도 흥미로운 볼거리·느낄거리들이 촘촘하다. 화가 이중섭(1916~1956)이 살던 집 앞에서 걷기 시작해 매일올레시장, 이중섭 거리, 서귀진 터와 자구리 해안, 정방폭포를 감상하며 도심을 한바퀴 돈다.
이중섭 거주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래된 계단길을 오른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때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피난 와 서귀포에서 1년을 지냈다. 그가 살던 집과 미술관은 잠시 뒤에 보기로 하고 서귀포기상대①로 올라간다. 기상대는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치욕의 자리였다. 정방동주민센터 거쳐 기상대로 오르는 돌계단길이 신사참배를 위해 오르던 길이다. 서귀포 향토사학자 박정석(68)씨는 “초등생들도 반바지 차림으로 줄지어 올라가 참배했다”고 말했다. 일제 흔적은 일부 민가 돌담에도 남아 있다. 돌을 길쭉하게 세워서 쌓는 건 일본식이라고 한다.
기상대 옆길엔 노란 머위꽃들이 화사하다. 제주 특산 문주란도 심어놨다. 기상청 마당 구석에 선 커다란 후박나무②를 만나러 간다. 400년 넘은, 서귀포를 지키는 신목이다. 옆에 한 그루가 더 있었으나, 태풍 사라(1959년) 때 낙뢰로 불타버렸다. 박씨는 “불탄 나무를 톱으로 자르는 데 닷새가 걸렸다”고 말했다. 기상대 앞마당은 이중섭이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내가 그때 일곱살이었는데, 그 양반이 여기 이젤을 세우고 앉아서 바다 그림을 그렸어요. 그게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었지.”(박정석씨)
고위 공무원 줄줄이 났다는 구린세끼 윗마을굿인모텔·영원여인숙·장수장여관…, 이름도 좋은 숙박시설이 고루 나타나는 골목길 지나, 감귤가게·떡집·옷가게 즐비한 서귀포매일올레시장③ 동쪽 입구로 들어선다. 시장 자리는 ‘시내 뒤쪽 넓은 들판’이란 뜻의 ‘뒷병듸’라 불리던 곳이다. 20여년 전까지는 오일장(4·9일)이었다. 서귀떡방아·강방와(가서 보고 와라)·모닥치기(모둠)·상에떡(상외떡)…, 가게 이름, 음식 이름이 색다르면서도 정겨운 시장골목을 걷다가, 한 분식집 진열대에 쌓인 커다란 빵덩어리들을 만났다. “이게 제주 별미 상외떡이우다.”(영분식 주인) 시루떡·송편처럼 제사상에 정식으로 올리는 떡이 아닌, 밀·보리로 만든 떡(빵)을 말한다. 가난했던 시절 제상에 제대로 만든 떡을 못 올리고, 대신 올리면서 상외떡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중섭이 1951년 1년 동안 세들어 살던 초가. 당시 주인집 며느리 김순복씨가 지금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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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넘은 중국집 덕성원과 100년 역사를 가진 서귀포성당을 지난다. 성당 앞마당은 50년대 중반, 1~3회 탐라예술제(현재 탐라문화제)가 열렸던 장소다. 나포리호텔 밑 옛 매일시장 터 지나, 조선시대 서귀진성과 포구로 드는 옛길이었다는 기정길(벼랑길)⑨로 내려선다. 앞이 탁 트이며 포구 쪽 경관이 열린다. 최근 건설된, 새섬과 잇는 다리 새연교가 울창한 참가시나무·동백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천지연폭포 들머리에서 방향을 틀어 포구 쪽 절벽 밑의 선왕당사(용신당·용왕당)⑩에 들른다. 잠수·잠녀들과 고깃배의 안전과 풍어를 빌며 매달 초하루 제를 올리는, 용왕의 막내딸을 모신 사당이다. 위쪽으로 오르면 오래된 팽나무 무리가 울창하다. 최근 지은 칠십리정자⑪ 옆에는 둘레가 7m나 되는 소나무(신목)가 있었다. 찰흙을 빚고 조각하는 솜씨가 전문가 뺨친다는, 강씨(75) 할아버지 집 울타리 안에 놓인 다양한 표정의 인물 작품들(사진)을 감상하고 서귀진 터로 걷는다. 서귀진은 조선시대 제주 3성9진의 하나. 일제강점기까지 건물들과 성벽이 남아 있었다. 동헌이 있던 자리에 서귀진 표석⑫을 세웠다. 검은 바위 우거진 자구리 해안으로 간다. 이중섭은 섶섬·문섬이 보이는 이 바닷가에서 아내, 두 아이와 함께 게를 잡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작품 <그리운 제주도 풍경>에 이때 모습이 담겨 있다. 이를 알리는 팻말⑬을 세워놓았다. 자구리에서 ‘자구리물’⑭을 빼놓을 수 없다. 서귀포 주민들이 오랫동안 식수로 써온 용천수다.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자구리물로 빨래를 하신다. 강옥(70) 할머니 말씀. “여깃물이 수돗물보다 좋수다예. 재기 호는 맛에(빨리 하는 맛에) 여기 와서 함수다.” 제주 풍물을 노래한 시화전시장 지나 소낭머리 전망대⑮에 선다. 소나무가 많았던 언덕으로, 서귀포 출신 서예가 소암 현중화(1907~1997) 선생이 자주 들러 머리를 맑혔다는 곳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보낸 서불(서복)이 정방폭포 주변에 들러 갔다 해서 세운 서복전시관(16)과 서복공원은 규모에 비해 근거도 전시 내용도 빈약하다. 정방폭포(17) 절벽에 서불이 새긴 글씨가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실은 서복전시관 주변 절벽은 제주도민의 한과 고통이 서린 곳이다. 문화관광해설사 강치균(67)씨가 말했다. “4·3 때 폭도로 몰린 중산간 지역 사람들과 군인·경찰들이 교대로 총과 대창으로 살해된 곳입니다.” 낮엔 군경이 지배하고, 밤엔 산사람들이 지배하며, 무수한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한다. 정방폭포 앞으로 내려가, 땅을 치는 물소리에 이마를 씻고 돌아나와 소암기념관(18)을 향해 걷는다. 박정석씨는 기념관 앞길이 “통곡의 길, 죽음의 길이었다”고 말했다. 해안가 절벽에서 희생될 사람들이 이 길로 가족의 통곡 속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소암기념관은 자유분방한 글씨체로 이름난 현중화 선생이 “자연이 곧 글씨”라는 철학 아래 “먹고 자고 쓰는” 데에만 몰두하며 50년간 살던 집 옆에 세운 서예전시관이다. 무아지경에 든 듯한 ‘무아지경’ 글씨를 마음에 새겨담고 나오니 걸음이 좀 가벼워진 느낌이다. 5㎞ 남짓 걸었다. 서귀포=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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