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강화성당. 2층 한옥 모습이지만 내부가 트인 단층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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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 워킹맵 22. 강화읍과 강화산성
강화군청에서 용흥궁-고려궁터 거쳐 남문까지 6.5㎞
단군 할아버지의 영광부터 일제강점기 수모까지 들어 있다. 한강·임진강·예성강 들머리인 뱃길 요충지 강화도(江華島). 선사시대와 삼국시대의 치열한 영토 다툼을 거쳐, ‘동양 오랑캐’ ‘서양 오랑캐’ 침략 때마다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섬이다. 고난 속 선인들의 발자취가 빼곡하다. ‘지붕 없는 박물관’ ‘한반도의 축소판’으로 불리는 강화도로 간다. 강화군청에서 시작해 용흥궁·고려궁터와 서문 거쳐 남문까지 걷는다.
20년째 만두를 쪄온 만두집 냄새가 솔솔
군청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찰서 지나 용흥궁 골목으로 간다. 20여년째 만두를 쪄온 정통만두집 앞 골목길이 구수하다. 옛 한옥 담벽을 돌면 용흥궁① 솟을대문이 열린다. ‘용이 일어난’ 곳이다.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1849~1863년 재위)이 즉위 전 19살까지 농사짓고 나무하며 살던 잠저(왕세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으로 추대되기 전 살던 집)다. ‘강화도령’ 이원범이다. 집은 애초 세칸짜리 초가였으나, 철종 즉위 4년 뒤 안채 별채를 갖춘 한옥으로 지었다.
용흥궁공원으로 간다. 옛 심도직물 공장터다. 일제강점기 이래 강화읍에선 인조견을 만드는 직물공장이 번성했다. 60~70년대엔 직물공장이 20개에 이를 정도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일부 터만 남아 있다. 공원 한쪽에 당시의 굴뚝②을 그 흔적으로 남겨 두었다. 심도직물에서 50년을 일했다는 이남식(75)씨가 말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바로 들어가서 평생을, 주로 직포부에서 일했죠. 저 굴뚝 자리에 염색부가 있었어요.” 굴뚝 옆에 비각③이 있다. 청의 침입(병자호란)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문에서 폭약에 불을 붙여 순절한 김상용 선생을 기려 세운 2기의 비다. 왼쪽 비는 1700년에, 오른쪽은 비문이 마모돼 181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비각 맞은편엔 ‘강화3·1만세기념비’④가 있다.
만세기념비 뒤쪽(웃장판터·주차장과 강화읍사무소 일대)은 조선시대 군영인 진무영 자리다. 장터(현 주차장)에, 군사훈련장(교장)을 서문 옆(외교장)으로 옮기기 전까지 연병장과 사열대 건물인 열무당이 있었다. 현 은혜교회가 열무당 자리다. 용흥궁공원 언덕 위 옛 성공회 강화성당⑤으로 오른다. 1900년 건립된 건물로, 겉모습은 한옥으로,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꾸민 예배당이다. 2층 형식이지만 내부는 트여 있다. 돌계단 위 대문이나 종각, 성전 네 기둥에 걸린 한문 주련이 영락없는 산사의 모습이다. 건물 뒤쪽 사제관을 보고 뒷문으로 나가 다시 용흥궁공원으로 내려간다.
심도직물 공장 터에 남은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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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 남문 앞의 강화유수 민진원 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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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고 또 불타고 약탈당하고…나무들은 알고 있다
강화천주교회 지나 북산(송악산) 자락 고려궁터⑥로 걷는다. 고려 고종이 1232년 몽고 침략에 대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뒤 지은 궁궐 터다. 39년간 고려의 수도였으나, 개경 환도 때 몽고의 요구로 궁궐과 성을 허물어야 했다. 조선 인조 때도 이곳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불탔고, 그 뒤 강화유수부 관아 건물이 들어섰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 침탈로 다시 불탔다.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 복원된 외규장각 등이 있다. 프랑스에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가 바로 이곳 외규장각에 있던 고서들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것이다. 약탈 현장을 지켜봤을 400살 난 회화나무가 궁터 한쪽에 서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동헌은 군청으로, 이방청은 등기소로 쓰였다. 궁터 밖에서, 궁에서 길어다 먹었다는 오래된 우물 왕자정과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 수령 700년의 ‘고려적’ 은행나무⑦를 만난다. 이남식씨는 “어렸을 때 은행나무 앞쪽에 뎅구알(대포알) 창고를 본 기억이 난다”며 “이방청 앞쪽으론 대문이 세 개나 있었고, 주변엔 초가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말했다. 태극무늬가 그려진 북관제묘⑧(1892년 건립) 외삼문은 닫혀 있다. 강화읍엔 관우·유비·장비를 모신 3개의 관제묘(동·서·남)가 남아 있다. 주민들에게 ‘관제묘’를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가 많다. ‘북간암뫼’(북관운묘), ‘남간암뫼’(남관운묘)가 어디냐고 물어야 알아챈다. 소리나는 대로 변한 이름이 굳어진 탓이다. 옛 한옥집들이 남아 있는 골목을 지나 강화여고 옆 강화향교⑨로 간다. 고려 때 처음 세워진 뒤 옮겨다니다 조선 영조 때 현 위치에 자리잡았다. 경내 담 옆의 강화유수기적비·하마비를 보고 있는데, 담 너머에서 까르르르 봄꽃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봄볕 안고 재잘대며 내달리는 강화여중·고 학생들이다. 향교길 내려와 무너져가고 있는 옛 성일직물 공장 건물 지나 서문을 향해 걷는다. 서문안길⑩로 들어서니 담벽도 지붕도 몸을 낮춘 오래된 집들이 손바닥만한 창들을 달고 이어진다. 40년 넘게 서문안길에서 살았다는 이의순(75) 할머니가 40년간 쌓인 불만을 또박또박 털어놓으셨다. “쟤가 서문이거던요. 여기가 옛날엔 아주 큰길이었대여. 인저 개발이 안 되니까는 망쪼가 붙었잖어. 짓는 허가두 안 내주구, 허물어져두 곤치는 허가두 안 내줘여. 헐린대는데, 헐린다구 한 지가 사십년은 됐으니깐 뭐.” 강화산성 내성의 서문(첨화루)⑪은 1977년 복원한 문이지만, 옛빛이 서린 성벽과 우거진 나무들로 제법 묵은 맛이 느껴진다. 동락천에 걸린 세칸 홍예문(석수문)⑫과 연무당 옛터⑬를 만난다. 연무당은, 웃장판터에 있던 열무당과 같이 군사훈련장 사열대 구실을 하던 건물이다. 연무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187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장소다. 건물은 흔적 없고 터를 알리는 빗돌만 서 있다.
조선 철종 임금이 즉위하기 전 19살까지 살았던 터에 지은 용흥궁 앞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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