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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1.18 21:44 수정 : 2009.11.21 14:18

나주읍성의 동문인 동점문. 최근 복원한 것이다.

[매거진 esc] esc 워킹맵 14. ‘천년 목사 고을’ 나주 읍성터 안팎
전남 나주읍성 동문에서 남문과 도심 골목 거쳐 서문터 밖 향교까지 5㎞

나주는 백여년 전까지 전라도의 중심 도시였다. 전주와 함께 호남지역의 행정·군사·지리적 거점 구실을 했다. 전라도란 명칭이 전주·나주에서 나왔다. 고려 초부터 조선 말까지 912년간 300여명의 목사(수령)가 거쳐간 ‘천년 목사 고을’이다. 나주배도 좋고 곰탕도 맛있지만, 유서 깊은 이 도시의 골목을 기웃거리는 맛도 진진하다. 나주읍성 동문 밖에서 시작해 남문과 도심 골목을 거쳐 서문터 밖 향교까지 걷는다.

서울 닮은 지세 덕에 ‘소경’이라 불려

나주 남내동 박경중 가옥의 안채 뒤뜰. 풍수설에 따라 네모난 대형 돌확(확독)을 갖다놨다. 안채는 관아로 쓸 것을 예상하고 지은 대형 한옥이다.

나주 시내를 감싸고 에돌며 호남의 젖줄 영산강이 흐르고, 옛 나주읍성 안쪽으론 나주천이 가로지른다. 나주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영산강과 몸을 섞는 하류 쪽에 읍성의 동문인 동점문(東漸門)이 있다. 동점문은 옹성이 설치된 2층 문루다. 과거 영산강 뱃길도, 한양에서 오는 육로도 동문으로 이어졌다. 고려 말 정도전이 ‘친명 정책’을 주장하다 나주 회진현(현재 다시면 일대)으로 귀양 올 때도 이 문을 지났다. 문루 2층에 그가 당시 문루에 올라 읽었다는 ‘유부노서’(나주 원로들에게 이르는 글)를 편액으로 만들어 걸었다. ‘동점문 복원기’와 현판 글씨는 도올 김용옥씨가 쓴 것이다.

동문 밖 북쪽 길가엔 높이 11m의 돌기둥 ‘동문 밖 석당간’(보물 49호)이 있다. 나주가 풍수상 배의 형국이어서 돛대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절 앞에 세웠던 당간을 닮아 ‘석당간’으로 일컬어지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옛 지도엔 석장(石檣·돌돛대)으로 표시돼 있다. 본디 성 밖에 석장을, 성 안쪽(동문 옆)에 목장(木檣)을 세웠다고 하나 목장은 없어졌다. ‘동문 밖 석장’은 현재 보수공사중이다.

나주천 건너(죽림교) 물길 옆 돌계단을 올라 남산시민공원으로 오른다. 돌계단에 쌓이고 날리는 늦가을 낙엽들이 걷는 맛을 더해준다. 남산 정상엔 최고정이라 불리는 시멘트 팔각정이 있다. 오래전에 최고정이란 나무정자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엔 신사가 세워졌던 곳이다. 여기서 동문 쪽을 내려다보면 멀리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 줄기가 눈에 잡힌다. 금성은 나주의 옛 이름이다. 나주시청 학예연구사 윤지향씨는 “나주는 서울의 지세를 닮아 예부터 ‘소경’(작은 서울)으로 불렸다”고 말했다. ‘물 아래(영산강 이남 지역)’ 주민들은 나주를 둘러보며 ‘한양 구경’을 한 것으로 위안 삼았다고 한다.

최고정에서 내려서면 나주 시내 금성관 앞에 있던 것을 옮겨다 지은 내삼문(또는 망화루) 건물이 있다. 한말 일제에 항거하다 순절한 두 의병장 김태원 선생, 조정인 선생의 기념비를 보고 나주중학교 지나 남문(남고문·南顧門) 밖 골목으로 들어선다. 주민들이 ‘남 밖에’라 이르는 남외동 거리 끝 죽림동에 옛 나주역사가 있다. 나주역은 마네킹 역무원들이 지킨다. 나주역사는 1913년 호남선 개통 때 지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3·1 운동, 6·10 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꼽는 11·3 학생독립운동(1929년)의 진원지가 이곳이다. 일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하고 한국 남학생이 이를 꾸짖으면서 광주로 통학하던 한·일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시작됐다. 역사 옆에 이를 기리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세웠다. 월요일 휴관.


나주역 주변 거리는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낡아가는 일식 주택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구세군교회 지나 나주초등학교 옆 네거리 한쪽에 빈터가 있다. 구한말 단발령 반대 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나주의 전 향리 정석진(당시 해남 군수) 등이 참수된 곳이다. 나주는 단발령 저항운동 근거지로 지목돼 이듬해 나주 관찰부는 폐지되고 광주로 옮겨간다. ‘천년 목사 고을’은 이때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907년 개교한 나주초등학교 터는 전라지역 12개 군·현의 병마를 지휘관할하던 전라우영이 있던 자리다.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동학혁명군들이 잡혀와 이곳에서 처형됐다. 나주초등학교 앞 비좁은 골목 안쪽엔 독립운동가 조정인 선생 고택이 있다. 다시 남문 앞으로 나가 ‘5·18 항쟁 나주 시민군 집결지’ 표지석을 보고, 길 건너 일제강점기 경찰서 쪽으로 걷는다. 다시 옛 성곽 터를 따라가는 길이다. 일제는 성곽을 허물고 경찰서 건물을 지었다.

금성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걷는다. 나주천 물길이 한 굽이 휘도는 옛 상나무골(뽕나무골)에 전통 한옥 박경중 가옥(도 문화재자료)이 있다. 1914년 지은 안채의 방과 대청마루, 부엌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부엌에선 지금도 장작불을 때 온돌방을 데운다. 부뚜막 위엔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는, 조왕신(부엌신)을 위해 냉수를 떠 바치는 조왕중발이 놓여 있다. 흥미로운 건 안채 뒤쪽 봉당에 놓인 거대한 수조(돌확·확독)다. 집터의 기운이 너무 세서 자손이 귀하고 독자가 이어지자, 이를 누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주인 박경중(63)씨가 말했다. “요것이 그랑게 나으 4대조 재짜 규짜 어른께서 안채를 새로 짓고 상량도 갈면서, 금성산 채석장서 맹길어 갖다 놓은 확독이여.” 확독을 갖다 놓은 뒤로 2대 독자이던 4대조 어른은 6명의 손자를 봤다고 한다. 뒤뜰에 1884년 지은 세칸짜리 초가도 참 아름답다.

나주천 남내교 건너 1번국도로 나선다. 성안에서 가장 반듯하고 길었다는 진고샅(긴 골목), 일제강점기 최대 번화가였던 본정통 골목, 이름난 나주곰탕집이 몰린 곰탕골목들을 좌우로 보면서 망화루 통해 금성관으로 들게 된다. 금성관은 고려~조선시대 전국 주요 거점도시에 짓고 왕을 상징하는 전패·궐패를 모셨던 지방궁궐의 하나다. 안마당 한쪽엔 불망비·선정비·기념비들을 한데 모아 놓았다.

망화루를 나와 미향곰탕 옆 ‘연애고샅’으로 든다. 연인이 거닐기 좋다는 비좁은 골목길이다. 금성관 뒷길은 옛날 곡식창고가 있었다는 사창거리다. 400살 난 당산나무(느티나무)가 있어 주민들은 당산거리라고도 한다. 사매기떡방앗간 앞길이 사매기길이다. 고려 현종이 거란족 2차 침입 때(1011년) 피난 와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건넜다는 사마교에서 유래한 길이다.

나주의 막노동꾼에서부터 문화예술인까지, 학생에서부터 은퇴한 어르신들까지 남녀노소가 밤낮으로 즐겨 찾아 잔을 기울인다는 수미소주방을 지나 정수루로 간다. 정수루는 나주관아로 드는 정문이다. 70~80년대까지 각종 공연과 콩쿠르가 누 위에서 진행되고 관객들은 주변에 앉고 서서 감상했다고 한다. 나주목문화원 옆에 나주목사가 거처하던 목사 내아(금학헌)가 있다. 내아는 여행객들에게 숙소로도 제공된다. 내아 돌담을 비집고 솟은 500년 넘은 팽나무 자태가 그림 같다. 내아 정문 맞은편엔 동헌이 있었다.

나주 남산시민공원 최고정 밑 남산공원 사적비 옆에 놓인 용무늬 이수(비석 머릿돌). 홈에 솔잎이 쌓여 두 마리의 용이 돋보인다.

무너진 성곽 복원 옛 정취 없앨라

내아 옆길을 돌아 서문길을 따라 나주향교 쪽으로 가면 나주읍성의 옛 성벽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무너지다 남은 성벽 아랫부분이 수십m가량 남아 있다. 이나마 흔적이 남아 있는 건 무너진 성곽 안팎과 성 위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무허가 주택들 덕분이다. 나주시는 일부 성곽을 본모습대로 복원할 예정이라지만, 번듯하게 단장될 성벽보다는 무너진 채로 낡아가는 지금 모습이 훨씬 아름답고 가치 있고 정취도 있어 보인다. 서문 밖엔 나주향교(16)가 있다. 향교 하마비 앞에서 우산을 접고 걷기를 마쳤다. 종일 따르던 빗줄기도, 바람도 잠잠해졌다. 동문에서 향교까지 5㎞ 남짓.

지도 그래픽 디자인 멋짓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워킹 쪽지

⊙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 타고 함평분기점에서 광주 쪽으로 가다 동함평나들목에서 나가 1번 국도 타고 나주로 간다. 서울 용산역에서 나주역까지 하루 7차례 열차가 운행한다. 용산역에서 나주역까지 하루 4차례 고속열차도 운행한다.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나주터미널까지 고속버스가 하루 6차례 다닌다.

⊙ 먹을거리는 우선 나주곰탕이 유명하다. 소뼈를 곤 뒤 다시 양지·사태를 함께 고아내는 국물 맛이 진하다. 금성관 앞 매일시장 부근에 오랫동안 곰탕을 끓여온 집들이 있다. 남평곰탕 (061)334-4682, 노안곰탕 (061)333-2053. 1인분 7000원. 나주 전통 비빔밥집도 있다. 청옥 (061)331-9391. 고추장이 아닌 고춧가루를 써서 주방에서 밥을 비벼 나오는 게 특징. 28년 동안 연탄구이 돼지불고기를 해온 동신대 후문 쪽 도로변 송현불고기(1인분 7000원), 나주 술꾼들이 모인다는 사매기길 부근의 25년 된 주막 수민소주방(고추튀김 5000원)도 있다. 나주목사 내아 (061)330-8542.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061)330-7892.

나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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