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1.28 20:45
수정 : 2009.02.16 16:00
스포츠는 산소같은 구실을 한다. 그러나 스포츠에 대한 시선은 때론 부정적이기도 하다. 승리와 영광의 뒤안길에는 폭력·억압과 같은 반인권적 요소들이 똬리틀고 있기도 하다. 명과 암이 교차하는 한국 스포츠 문화, 이젠 선진국 수준으로 한단계 도약할 때이다. 한국 스포츠 문화의 질적 도약을 위한 작지만 알찬 제안들을 체육인들 스스로의 목소리에 담아 십수차례 소개한다.
스포츠맨십을 위하여 이것부터 해보자 ① 김인건 태릉선수촌장
|
김인건 태릉선수촌장
|
나는 중학교 때 농구를 시작했다. 은퇴 후에는 실업과 프로팀 코치, 감독, 단장을 역임했다. 보통 체육인이 걷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길을 걷는 체육인을 보는 일반인의 시선은 양극단으로 갈린다. 운동장이나 경기장에서는 환호와 갈채를 보낸다. 그러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선수는 무식함이나 폭력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이중구조 속에 있는 것이다. 후자의 부정적인 시각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길은 한 가지다. 우리 체육인 스스로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일이다.
이미 대한체육회와 태릉선수촌에서는 ‘존경받는 체육인’을 목표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학생선수는 학업을 위해 오전에는 등교해 수업을 받도록 하고 있다. 훈련 뒤 저녁 시간에는 어학교육을 제공하고, 취미교실을 운영한다. 교양강좌도 실시하고 있다. 지적 튼튼함을 보완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이제 모든 경기단체, 시·도체육회 그리고 일선의 운동부로 점차 파급되고 있다.
나는 ‘운동선수를 제대로 평가해주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선 코치, 감독 선생님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바로, 선수의 이름을 부르자는 것이다. 선수를 부를 때 흔히 “야”, “너”라는 호칭을 쓰곤 한다.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이런 표현이 듣는 선수에게나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일반인들에게 적지 않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나 역시 농구감독 시절에 선수 이름보다는 “야”, “너” 또는 “이 자식이”라고 불렀다. 선수의 인격을 존중해주기보다는 내 편한대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지도자들이 선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본다. 참 좋은 일이다. 선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선수에게 자존감을 불어넣는 첫 단추다.
몇 년 전 아내 이름을 불러주자는 게 유행한 적이 있다. “집사람”, “어이”를 “000씨”라고 부르자는 것이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훈련 중 지도할 때나 경기 중 작전지시 등을 할 때 선수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선수에게 자존감을 부여하고 지도자와 선수간의 친밀감도 더해질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체육인에 대한 좋은 인식 전환의 첫 단추를 꿰는 것이라면 우리 모두 시작해야하지 않겠는가. 김춘수 시인의 <꽃>에 있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시 구절을 생각해본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