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11월28일 네덜란드 노·사·정 대표들이 노동재단에서 이듬해 임금인상률을 2.5% 이하로 억제하되 세금감면과 고용지원금을 유지하는 내용의 합의안에 서명하고 있다. 네덜란드 사회경제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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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의 시대] 제2부 대전환을 읽는 열쇳말
7회 21세기 그랜드딜
<한겨레>가 연초부터 진행한 ‘대전환의 시대’ 기획의 마지막 순서는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대타협’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으로 꾸며봤다. 전세계를 몰아친 금융위기는 시장만능주의로 대변되는 사회운영 원리가 전체 사회계층을 한 데 아우르는 새로운 사회체제로 서둘러 자리바꿈해야 할 필요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른바 사회적 대타협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대타협을 통해 성공적인 위기 돌파구를 찾은 여러 나라의 경험을 주목해야 할 때이다.
‘사회의 반격.’
얼마 전 출간된 <뉴딜, 세 편의 드라마>의 지은이 볼프강 쉬벨부시는 지난 1930년대 미국과 유럽 대륙에 나란히 등장한 뉴딜과 파시즘, 나치즘 사이엔 눈에 띄는 공통분모가 자리잡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대공황에 이르러 마침내 그 파국적인 결말에 이른 ‘시장의 독주’ 시대를 몰아내는 사회의 반격이 그 주인공이다. 반격의 뼈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자랑했던 시장의 자리에, 다양한 가치를 한데 아우르는 ‘사회’가 비집고 들어서는 것이다.
시장만능 자본주의 위기경제대책만으론 해결 안돼
다시 힘받는 ‘사회의 반격’ 전세계에 몰아친 유례없는 ‘금융위기’에서 또다시 사회의 반격을 알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번 위기가 안겨준 교훈은 시장만능주의 형태로 운영돼왔던 그간의 자본주의 체제의 실험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라며 “시장을 넘어서는 ‘사회적 경제’의 틀을 갖춰 나가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 역사상 몇 차례 나타났던 사회의 반격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타협’(빅딜)으로 제 꼴을 갖춰 나갔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는 극소수 계층의 성공만을 보장하던 시장만능주의의 외투를 벗고 자본과 노동 모두를 끌어안는 대타협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온 사례들이 많다. 강미화 울산대 교수(사회학)는 “서구 사회에서 등장했던 대타협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자칫 기존 시스템의 붕괴에 이를지도 모를 커다란 위기 앞에서 그 사회가 내린 합리적 선택인 경우가 많았다”며, “유례없는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도 최소한 다시 한번 대타협을 통해 탈출구를 찾아볼 만한 조건은 갖춰졌다”고 말했다. 대타협이란 경제가 안정적일 때보다는 어려울 때일수록, 달리 말해 위기의 반전 카드로서 오히려 제 빛을 냈다는 얘기다. 홍기빈 연구위원도 “자본주의 경제는 어림잡아 40년에 한 번꼴로 커다란 위기에 맞닥뜨려왔다”며,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위기상황도 단지 정부의 일시적인 경제대책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사회 전체 운영의 틀을 바꾸는 특단의 카드가 필요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위기 이후 각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새의 대타협을 이뤄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아직 이렇다 할 ‘정답노트’가 없다. 특히 각국 경제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시장에 밀접하게 통합됐고 시장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전면에 나서는 형태로는 경쟁력과 사회통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장시복 경상대 사회과학원 연구교수는 “이번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알리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과거 케인스주의식의 사회모델 역시 이미 실패로 판가름난 상태”라며, “이번 위기는 신자유주의는 물론 케인스주의까지도 시험대에 올려놓은 것으로, 지난 세기 서구 사회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던 형태의 케인스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일자리에서 복지 확대로
“의제 젋혀야” 목소리 커져
정부·기업 의식변화 절실 이와 관련해선 이른바 새로운 ‘복지동맹’의 가능성에 좀더 주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강미화 교수는 “이미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계층의 중요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자 등 다양한 형태로 복지 소외계층의 기반이 넓어지고 있는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며, “단지 일자리를 지키거나 늘리는 식의 전통적인 타협보다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약자의 복지 기반을 넓히는, 보다 넓은 ‘빅딜’을 찾아야 할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복지로부터의 소외를 피부로 느끼고 복지의 확대를 주도적으로 요구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커질 때, 복지를 의제로 한 대타협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갑갑하다. 무엇보다 정부나 사용자로 하여금 진정한 대타협의 마당에 나오도록 강제하는 사회적 압력 요인이 낮다는 점이 제일 커다란 문제다. 오건호 연구실장은 “대타협이란 기본적으로 경제적 모델이 아니라 정치적 모델”이라고 전제한 뒤, “타협이란 기존의 방식이 유지될 경우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도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는 기득권 계층의 문제의식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인데, 현재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기득권 계층이 이런 식의 판단을 하지도,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진보진영의 영향력도 크게 부족하다”고 말했다. 한 국책연구원 연구위원도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사용자나 기득권 계층이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를 위기 돌파의 희생양 정도로 생각하는 수준 아니냐”며, “이런 상황에서는 과거 서구사회가 보여줬던 타협을 통한 상생의 ‘하이-로드’(높은 길)는 짧은 시간 내에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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