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
[‘대전환’의 시대] 제2부 대전환을 읽는 열쇳말 7회 21세기 그랜드딜
이정우 교수에게 들어본 ‘대타협의 길’
“수출주도형 한국경제가 살려면 노동자·사용자·정부 3자가 임금인상 억제와 고용안정, 노동자 경영참여라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경제위기를 지속적으로 극복해온 북유럽형 자본주의로 가야한다.”
참여정부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시장만능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시점에서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이렇게 제시했다. 이 교수는 또 “정부가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사용자가 먼저 양보를 해서, 노동자의 양보를 끌어내는 노력을 해야한다”면서 “앞으로는 노사정과 함께 비정규직·자영업자·도시빈민·여성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시민사회까지 포함해서 한 차원 더 높은 사회적 대타협의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은 노동자 보호하고노조는 임금인상 자제
북유럽형 대타협 배워야 정부의 공정한 중재 통해
시민사회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타협의 틀 마련을 이 교수는 빈곤과 양극화, 소득분배 같은 주제를 연구해온 국내 대표적인 진보·개혁 성향의 학자다.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으며 부동산대책이나 금산분리 등 주요 현안에서 개혁적 목소리를 냈고, 참여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강행도 비판했다. -세계경제가 대공황 이후 최대위기를 맞고 있다. 이를 계기로 지난 30년간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시장 자율를 추구한 시장만능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했다. 대신 각국 정부는 수조달러의 자금을 쏟아 부어 은행 국유화에 나서고, 금융규제를 강화하는 등 해법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모색이 활발한데,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자본주의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장만능주의인데 이번 위기로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한국은 시장만능주의와 관치가 겹친 경우다. 둘째는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 같은 유럽형이다. 복지수준은 북유럽보다 떨어지는데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낮아 실업률이 높은 게 특징이다. 세번째는 북유럽형으로 우리나라가 가야할 방향이다. 이들은 병원·학교·보육 등을 시장 대신 국가가 보장하는 ‘탈 상품화’가 특징이다. 이를 위해 소득의 절반 정도를 세금으로 낸다. 반면 기업활동은 가능한 자유롭게 허용한다. 덴마크에서는 일자리를 보호하지 말고 노동자를 보호하라는 말이 있다, 일자리 수요가 없을 때는 노동자를 과감히 해고하고, 대신 국가가 고용센터를 통해 노동자를 위한 재교육과 재배치를 적극적으로 한다. -지금처럼 기존 체제 대신 완전히 새 체제를 만드는 ‘대전환’의 시대에는 사회구성원 간의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당장 이명박 정부는 금산분리 완화로 대표되는 규제완화를 추구하는데, 야당이나 진보적 학계·시민단체·노동계에서는 국제 흐름과 거꾸로 간다며 강력 반대하고 있다. 구조조정을 둘러싼 노사대립도 더욱 격화될 조짐이다. 위기시 분열은 더 큰 위기를 낳을 수 있다.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사회협약 체제가 위기극복을 위한 유효한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위기 돌파에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수출주도형 경제여서 과도한 임금인상을 감내하기 힘들다. 임금인상을 억제하려면 노사정과 시민사회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 낼 큰 틀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대타협이 발달한 북유럽 국가들도 수출비중이 40% 이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수출비중이 10%에 불과한 내수중심 국가다. 이들은 임금인상이 내수 진작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사회적 대타협이 우리만큼 절실하지 않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미일의 영향권에 있지만, 우리가 살 길은 북유럽 국가들이 추진한 사회적 대타협에 있다. -최근 쌍용차 노사갈등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노조가 대규모 정리해고에 항의해 점거농성을 벌이자, 사용자는 직장폐쇄로 맞섰다. 경영정상화와 고용안정이라는 목표에는 노사가 이견이 없을 텐데, 현실은 공멸로 치닫는 모습이다. 노사 대타협을 통해 위기극복이 가능할까? =쌍용차는 정리해고 대상 직원들을 휴대폰이나 우편으로 일방적으로 통보했다고 한다. 농성직원들과 가족들의 처절한 모습을 보면서, 80년대 미국이 생각 난다, 당시 미국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그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황폐화됐는데, 새턴과 누미 등 두 자동차회사는 해고 대신 임금삭감을 통해 노사가 함께 위기돌파를 시도했고, 결국 고성과작업장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쌍용차도 구조조정과 감원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낮은 길(low-road)이다. 시야를 넓혀서, 노사공동체를 이뤄 경쟁력을 높이는 높은 길(high-road)로 가야한다, -최장집 교수가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국사회의 과제에 관한 글에서‘이제 민주주의에 반해서는 정치사회 안정이나 정권유지, 정책추진, 경제발전이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권력이 일방적으로 방향을 제시하면 그것이 곧 사회적 합의가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발달하면 사회구성원들 간에 양보·타협을 통한 합의과정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걱정한다. =독재사회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면 국민들이 따라오지 않는다, 신장투석으로 피를 바꾸듯이, 현 정부가 철학과 틀을 다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로서 역할을 못하고, 생불여사 신세가 될 수 밖에 없다. -사회적 대타협모델로는 단연 네덜란드가 꼽힌다. 네덜란드는 1982년 바세나르협약을 통해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사용자와 정부는 고용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대타협을 이뤄 위기극복에 성공했다. 참여정부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재임시 우리도 경제위기를 돌파하려면 네덜란드모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네덜란드는 70년대 북해가스전이 개발됐는데, 이것이 통화 강세→수출 타격→성장률 둔화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경제에 해가 됐다. 자원의 발견이 오히려 경제를 해치는 현상을 가리켜 ‘네덜란드병’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다. 당시 실업률은 10%를 훨씬 넘고, 청년실업률은 20%에 달했다. 성장률도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 때 노사 대표가 헤이그 인근의 바세나르에서 며칠간 대화를 통해 담판을 지었다. 당시 노조 대표였던 빔콕(나중에 수상이 됨)은 정부의 임금동결 의지가 확고한 것을 눈치채고, 노조가 임금동결을 받아들이는 대신 재계의 양보를 받아내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나온 것이 임금동결-일자리늘리기의 합의다. 당시 네덜란드 노조 간부들은 빔콕을 배신자라고 공격했지만, 총회에서 평조합원들은 지지를 보냈다. 결국 네덜란드는 실업률이 절반 이하로 낮아지고 성장률도 높아지며 위기를 극복했다. 우리나라 노사는 절대 양보를 하지 않는데, 통 크게, 과감히 던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당시 보수진영은 네덜란드모델은 이미 실패했다고 반대했다. 지난달 네덜란드 취재를 갔을 때 노사정 대화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노동재단(FOL)의 야니 모런 사무총장을 만나 그 얘기를 했더니, 펄쩍 뛰더라. =네덜란드모델은 실패하지 않았다. 80년대 성과가 가장 컸지만, 이후에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사회적협약을 이어가고 있다. 네덜란드에 ‘협의없는 합의보다, 합의없는 협의가 낫다’는 격언이 있다.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재계가 네덜란드모델을 반대하는 이유 중에는 경영참여 문제가 있다. 노조의 경영참여가 사용자의 경영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는 ‘사용자의 지혜는 노동자의 모자 아래에 있다”는 속담이 있다. 사용자가 노동자들의 지혜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는 뜻인데. =암스텔담 상의 회장이 참여정부 초기 방한했을 때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적극 옹호한다’고 말한 게 기억난다, 이후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은퇴한 기업인 출신 교포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노동자 대표를 회사 감사로 앉혀서 경영참여를 시켜야 경영 투명성이 높아진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한국 기업인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기업인이 네덜란드에 투자하려다가 경영참여 문제 때문에 망설이는데, 이미 현지에 진출해있던 미국 기업인들이 걱정 말라고 권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재계라고 모두 보수적인 게 아니다. 다른 나라의 재계인사들은 개방성·진취성이 돋보인다. 한국 재계의 보수성은 세계 표준과 거리가 멀다. -노사정 합의를 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린다. 때로는 합의에 실패할 때도 있다. 이를 두고 개혁이 시급한 상황에서 실효성이 없는 모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간디가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무의미하다”는 말을 했다. -네덜란드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도 있을 텐데. =3가지 장애요인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인구가 많아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점이다, 네덜란드 인구는 1600만명으로 우리나라의 3분의 1정도다, 두번째는 노조의 취약성이다. 재계는 노조가 강하다고 불만이지만, 진실은 그 반대다. 노조가 약하면 오히려 대화보다 파업 등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네덜란드 경총 관계자가 “(대타협을 위해서는) 강한 상대가 필요하다”고 말한 게 기억난다. 노사간 힘이 불균형을 이루면 대화가 어렵다. 다행히 한국은 시민사회가 발달돼있어 약한 노조를 보완할 수 있다. 세번째는 국민 기질이다. 우리 국민들은 격정적, 전투적이다. 하지만 이번 노 전 대통령 조문행렬이나 과거 붉은악마 응원전에서 보여줬듯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통일성과 인내, 희생도 보여준다. 결국 3대 장애요인이 모두 결정적 장애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조만간 네덜란드모델에서 배우기 위해 현지로 조사팀을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네덜란드모델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를 배우겠다고 하니 놀랍기도 한데, 아마도 최근의 식감한 고용위기 때문인 것 같다. 네덜란드는 임금인상 자제 대신 근로시간을 줄이고 파트타이머(시간제근로)를 늘림으로써 일자리를 늘리는데 큰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졌기 때문인데, 현 정부는 근본은 보지 않고 방법만 배우려고 할까봐 걱정이다. 그러면 성과를 거두기 힘들 것 같은데. =보수언론이 참여정부 초기에는 네덜란드모델을 공격하다가, 1~2년 뒤부터는 그 장점을 소개하는 기사를 크게 실은 적이 있다. 현 정부가 답답하니까 네덜란드에서라도 배우자고 하는 것 같은데, 방법 뿐만 아니라 기본철학까지 배워야 한다. 네덜란드모델의 핵심인 ‘노사정 협의-일자리나누기-노동자 경영참여’가 ‘3위 일체’가 되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노사정이 사회협약을 이뤄내기 위해선 여러가지 정치·사회적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타협에 소극적인 경제주체들도 생각을 바꿔야 하고, 이들을 타협으로 이끌어낼 압력과 조정의 메커니즘도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정부가 중요하다. 정부가 중재자로서 앞장서서 노사를 대화로 끌어들여야 한다. 특히 재계를 설득해서 양보하도록 해야 한다. 재계 스스로도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 다음에 노조와 시민단체들이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재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보수적이다.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와 독재시대를 거치며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굴절된 한국 현대사의 산물이다. 한국 관료와 재계, 언론의 극단적인 보수성, 폐쇄성, 편향성이 국가경쟁력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정부나 사용자가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들고 나오는 단골메뉴가 고통분담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전가시킨다고 반발한다. 김영호 유한대 총장은은 ‘고통 분담’ 대신 ‘희생의 교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맞는 얘기다. 그동안 희생해온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바라기 앞서, 정부와 사용자가 먼저 양보를 해야 한다. -참여정부 때도 노사정 대타협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결국 성과는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적극 건의를 하지 그랬나. =건의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지난 2005년 네덜란드모델의 설계자인 빔콕 전 수상이 방한했을 때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도록 권했는데, 불발로 끝났다. 정부에서 일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대목이다 -한국에서 대타협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 중 하나로 재벌체제를 꼽는 이들도 있다. 재벌이 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자신들의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도 한국이 재벌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기 어렵다는 지적을 하던데. =재벌들에게도 사회적 합의가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세금을 늘려 사회보장을 강화하면 노동자들로서도 굳이 임금인상에 목을 맬 이유가 사라진다. 재벌들은 대신 노조의 경영참여를 양보해야 한다. 빔콕 전 수상이 “노사관계는 단순히 일을 해주고, 그 댓가로 돈을 받는 관계만은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지혜나 아이이어를 사용자들이 경청하고 소통하는 것이 바로 경영참여다. 불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영에 도움이 된다, 재벌끼리 합의를 하면 되니까, 재벌체제에서 사회적 합의가 더 쉬울 수도 있다. -사회가 다양화하면서 노동자라는 개념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집단이 늘어나고 있다. 비정규직, 자영업자, 지역빈민 등이 대표적이다. 질적으로 변화된 21세기 자본주의 상황에 걸맞게 노동자를 포함해서 다양한 사회계층을 모두 아우르는 ‘보다 확장된’ 대타협의 틀 내지 사회연대전략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전통적인 노사정 3자에 의한 사회적 대타협모델을 한단계 더 높여서 사회적 약자들과 시민사회까지 포함된 확대된 사회적 대화의 틀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일랜드의 사회적 대타협모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는 노사정 외에도 농민·여성·각종 직능단체 등 다양한 사회계층의 대표자들이 함께 참여해 3년마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다. 글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jskwak@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