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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14 21:15 수정 : 2009.01.30 13:50

김석환(47·왼쪽) 세르게이 수티린(56·오른쪽)

[2009 특별기획]
‘대전환’의 시대

세계 석학과의 세번째 대담에서는 러시아 쪽의 시각을 담아봤다. 전례없는 경제위기를 계기로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균열이 나타나고 있는 지금, 패권국가로 재도약하려는 야망을 내비치고 있는 러시아의 행보는 또다른 관심거리다. 이번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국제질서는 어떤 모습을 띨 것인지 등의 주제와 관련해, 러시아 쪽의 목소리를 들려줄 주인공은 세르게이 수티린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다. 수티린 교수는 국제무역질서와 동아시아 개발경제, 러시아의 대외정책 등에 정통한 학자로 꼽힌다. 수티린 교수와의 대담은 김석환 산업연구원 초청연구위원이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 모두 3차례에 걸쳐 이메일과 메신저, 전화통화를 통해 진행했다.

금융·경제위기 표현은
‘무엇’에 초점 맞추는 것
자본주의 위기는 ‘왜’ 중점

김석환 초청연구위원(이하 김)=세계경제가 아주 심각한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고 이렇다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현재 상태에 대한 진단부터 내려보자. 과연 지금은 정말 ‘위기’인가? 만일 위기라고 한다면 ‘왜’ 위기인가?

수티린 교수(이하 수)=시작부터 어려운 질문이다. 위기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답변도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위기라고 할 때는 현재의 시스템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예정되지 않았던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시스템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내보이는 반응이나 행동 등이 적정한 예상치의 범위를 초과하였을 때를 예로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본 수많은 사례에 따르면, 이럴 경우 시스템을 이루는 구성원들에는 아주 커다란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 기존 시스템의 보편적인 활동이 일정한 충격을 받게 되면 기존 시스템이 새롭게 재편되거나, 또는 아예 붕괴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게 바로 위기다.

=질문을 조금 바꿔 물어보고 싶다. 현재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금융위기’라고도 하고, ‘경제위기’라고도 말한다. 아예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 위기 때는 기존 시스템이 새롭게 재편되거나 혹은 붕괴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현재 상황은 이 가운데 어떤 단계라고 말할 수 있나?

=당신이 언급한 세 단어가 서로 비슷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강조하는 부분과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우선 ‘금융위기’라는 표현은 다양한 형태의 금융활동으로 이뤄진,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국가경제의 하위 시스템에서 발생한 위기를 일컫는다. 과거 우리가 경험했던 많은 경제위기 가운데 상당수는 금융부문에서부터 출발했다. 현재 진행되는 모습도 금융위기로부터 시작되는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는 당연히 금융위기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경제위기’라는 단어로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 한다면, 첫째, 금융시스템을 포함한 국가경제 시스템 전체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거나, 둘째, 금융부문과 대립하는 의미에서 실물부문, 즉 산업생산이나, 농업, 건설 등 경제의 각 부문에 위기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두 가지일 것이다. 현재 상황은 역시 둘 다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현재 상황을 가리켜 ‘경제위기’라는 단어를 쓴다면 그 이유는 현재 우리가 맞닦뜨리고 있는 상황이 단순히 금융부문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경제 전체 시스템과 실물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쳐 위기국면이 더욱 확장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위기’라는 표현을 보자. 내가 보기에 ‘금융위기’나 ‘경제위기’라는 표현이 ‘무엇’이 발생했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자본주의 위기’는 ‘왜’ 그것이 발생했는가, 또 우리는 과연 미래에 비슷한 위기를 피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 좀더 무게를 두는 질문이다. 어느 쪽에 정확한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세 가지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당신의 어법을 따를 때, 이번 위기는 왜 발생했나? 말그대로, 자본주의의 탐욕이 가져온 결과인가?

사회체제를 정의하는데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앞으로 인기 끌지 못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떠한 사회경제체제라 하더라도 산업활동, 예금과 투자, 생산과 소비 등 특정한 나라의 거시경제영역은 꾸준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사회경제체제의 한 역사적 형태인 자본주의는 특히 시장경제의 주요한 도구인 상업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이익을 추구하는 수많은 독립된 경제주체를 빼놓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데다, 시장경제의 특징인 불균형이라는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주의라 하더라고 시장의 범위는 항상 일정하게 제한되기 마련이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규제가 존재하는 서유럽이나 일부 동아시아 나라들에서조차 시장의 불균형을 완전히 해소하는 확실한 대안을 찾기는 힘들다. 게다가 지난 20~30년 동안 세계화라는 흐름이 주도적으로 자리잡으면서 특정 국민경제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기업들은 국경을 넘어 세계의 구석구석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고 민간부문이 지배하는 전지구적인 거대 네트워크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세계경제 시스템의 복잡성이 훨씬 심해지면서, 세계경제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정밀한 규제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현재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위기는 이러한 불균형의 세계적 확산에 걸맞는 정밀한 규제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신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세계경제의 패권이나 주도권 변화를 점치는 목소리도 많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미국식 세계화’, 즉 미국이 일방적으로 독주하는 세계체제가 종식되고 그 자리에 무언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분명하게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중립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립적이지 않다는 말은 자본주의란 단어에는 불가피하게 일정한 가치판단이 담겨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구상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매우 부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과거 인류 역사에서 몇몇 나라들이 공식 국호에까지 사용했던 ‘사회주의’의 단순한 반대개념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 등처럼 여러 나라들이 자기나라의 이름에까지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자본주의는 어땠나? 전혀 그런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미국자본주의합중국’, ‘자본주의독일공화국연방’… 이런 나라이름이 존재한 적도 없고 그렇게 될 기회도 없었다.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갖는 부정적인 인식에 관련해선, 심지어 자유시장경제의 신봉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사람조차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시장경제의 적들에 의해 탄생했고, 자본가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시스템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져다주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여러 사정들로 인해, 개인적으로는 어떤 사회체제나 패권질서를 정의하는 데 있어 자본주의라는 용어 그 자체가 큰 인기를 끌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국가-NGO-국제기구 ‘규제 네트워크’ 필요

‘네트워크 모델’ 성공하려면
위계질서·권력 허용 말고
반대자도 참여 보장해야

=자본주의라는 단어에 대한 가치판단 문제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이번 위기를 통해 무언가 커다란 변화의 기운이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새로운’이라는 단어 역시 적절한 형용사가 아니다. 새로운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수정된’ 시스템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역사는 지난 200년 동안 크고 작은 경제위기와 늘 함께 해왔다. 여러차례의 위기를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는 19세기 초반부터 몇차례의 ‘변형’(transformation)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근본을 바꾸지는 못했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요약하자면,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움’을 추구한다면 시스템의 근본 자체를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 ‘자본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고수하는 한, 그 본질은 계속 유지될 것이며 언뜻 보이는 ‘새로움’이란 것도 실은 대단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띨 것으로 보나? 어쨌든 어느 정도의 변화는 불가피한 것 아닌가? 시야를 조금 좁히더라도, 당장 기존의 국제통화질서는 크게 흔들리고 있고 무역질서도 변화를 겪고 있다.

=이번 위기는 국내 차원은 물론이려니와 지역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의 광범위한 규제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관건은 이런 시스템을 어떻게 합리적이고 지속가능하며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이 과정에서 아마도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강력한 도전을 맞게될 것이다. 당장 주권 국가는 국제적인 규제시스템이 자국의 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우려 가운데 상당 부분 정당한 것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 지역단위 차원의 규제냐, 세계적 차원의 규제냐를 놓고서도 분쟁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 사례는 수두룩하다. 지난 10년 동안 급격하게 늘어난 수많은 지역무역협정(RTAs)들은 세계무역기구(WTO)의 보편적인 규제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 지역무역협정이란 모든 회원국들은 동등하게 대우하지만, 비회원국, 즉 ‘아웃사이더’에 대해서는 차별적일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럼에도, 세계적 차원의 포괄적인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고 강화되어야 한다. 이번 위기가 가져다준 중요한 교훈이다.

=새로운 규제 시스템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갈등이 불거질 가능성도 지적했다. 이번 위기에 대한 반성과도 관련된 문제일텐데, 앞으로 꼭 필요한 규제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할 것들이 있나?

위기 초기 러시아 당국자
사태 심각성 깨닫지 못해
호황 탓 노동 가치 낮아져

=글쎄, 질문의 의도에 딱 맞는 대답일지는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네트워크’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개별 정부는 국내단체나 비정부기구(NGO), 그리고 다양한 국제기구와 보다 활발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핵심 국제기구였던 세계은행이나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도 근본적인 변신을 꾀해야할 것이다. 학계와 언론, 노동조합, 기타 여러 이해관계자들과의 건설적인 대화도 중요하다. ‘네트워크 모델’의 핵심은 어떠한 위계질서나 권력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모든 참여자들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협력에 나서도록 자극할 것이다. 당연히 특정 규제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참여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토론 과정에서 여러 갈등을 완화시키는 배출구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국내외를 아우르는 이런 네트워크야말로 주권국가와도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국제통화질서와 관련해 ‘신브레턴우즈 시스템’이란 게 등장한다면,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위기 이후,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기까지 여러가지 크고 작은 갈등이 분명히 뒤따를 수 있다. 당장 예상해볼 수 있는 게, 몇몇 패권국가들 사이의 새로운 갈등구조다. 당연히 패권국가로서의 야망을 지닌 러시아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 대목에서 질문의 초점을 조금 바꿔보자. 각국 정부는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을 총동원해 위기 대응에 나서고 있고, 러시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메드베데프(대통령)-푸틴(총리)’팀은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는가?

=해외 전문가들 뿐 아니라 러시아 당국자들도 초기에는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주택담보대출 시장이 그다지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 한동안 고유가가 이어졌다는 점, 또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이 세계 3위 규모인 5900억달러나 된다는 점 등을 들어 이번 위기가 러시아 경제에는 별다는 타격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를 비롯해 모든 고위 공직자들의 생각은 초기의 진단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미 이번 위기가 러시아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줬고, 특히 정부가 적절하게 개입하지 못하고 지금까지처럼 방만한 운영을 계속한다면 엄청난 충격이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에 이른 상태다. 정부 바깥의 비판론자들은 정부가 경기침체 정도를 축소해 알리고 있고 적절한 대응에도 실패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요한 건, 현재 상황을 놓고 낙관적인 견해와 비관적인 견해가 갈린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정부 대책이 국민, 재계, 혹은 관료 가운데 ‘누구’의 이익을 우선하는가이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각종 지원책이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부문에 집중적으로 이뤄지느냐라는 정책적 선택은 사회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당신의 지적대로, 정책의 무게를 어디에 두느냐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그래서 더욱 궁금한 게 있다. 현재 러시아 노동시장 상황은 어떤가? 지금까지 발표된 정부 대책을 살펴봤더니, 실업대책이 재계 지원책보다 훨씬 뒤로 밀리는 듯한 인상이다. 러시아 헌법에 정의된 ‘국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조항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러시아의 전통에서 보자면 매우 의외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는데.

=아마도 현재 상태로서는 이번 위기가 노동시장에 준 충격이 실물부문에 미친 영향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번 위기의 규모와 견줘봤을 때, 대도시 노동시장은 상대적으로 안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러시아 경제가 한동안 호황을 누리면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그 등 대도시에서 심각한 노동부족 사태가 발생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고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지난 15년간 유가와 전략자원 등 상품가격이 급등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노동 인센티브가 낮아진 것도 이유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실들이 경기침체에 따른 부정적 효과를 가려주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 위기 이후 러시아 경제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나? 러시아 경제의 고질적 병폐인 자원의존형 발전전략도 변화를 겪게 될까?

=이번 위기는 러시아 경제의 체질이 ‘혁신’(innovation)에 기초한 경제로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이번 위기는 러시아 경제발전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플러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귀한 얘기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기쁘다.

=고맙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김석환(47) 초청연구위원은 한국외대 러시아어과와 대학원 동구지역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을 7년 동안 두 차례나 지내면서 사회주의권 붕괴의 생생한 현장을 체험했다. 이후 중앙일보 국제부장과 논설위원을 거쳐,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책자문위원, 국무총리 공부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겸임교수와 산업연구원 초청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세르게이 수티린(56) 교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74년 이래 줄곧 같은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같은 대학 국제경제학부장을 함께 맡고 있다.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독일 튜빙겐대학 등 유럽 여러 대학의 초빙교수를 지냈고, 핀란드은행의 초빙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수티린 교수는 지역경제통합과 러시아·북유럽 지역의 경제발전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고, 특히 개혁 이후 러시아의 대외 경제발전 전략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러시아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꼽힌다. 그는 지난해 11월 열린 ‘2008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해 ‘동북아 경제협력과 한·일 초광역권’이라는 주제발표를 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100여편에 이르는 그의 저서와 논문은 주로 세계무역질서와 러시아 경제체제, 동·북유럽 지역경제 등의 주제에 집중돼 있다. 대표적 저서로는 <국제무역기구(WTO)>(2008), <세계경제와 국제경제관계>(2007), <국제무역기구 체제 하의 이행기 경제>(2005) 등이 있다.

정리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 인터뷰 뒤안길

수티린 교수와의 ‘원격’ 대담은 연말연시라는 시간적 제약 탓에 좀처럼 속도감 있게 진행되지 못했다. 태음력(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러시아에서는 지난 7일부터 기나긴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된다는 점도 큰 걸림돌이었다. 무엇보다 연구와 강의, 자문활동 등으로 늘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수티린 교수를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해서 채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러 차례 ‘금융위기’, ‘자본주의 위기’ 따위의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와 같은 커다란 위기 상황을 가져온 원인 자체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조심스레 피력했다. 그가 보기에 이번 위기의 싹은, 1980년대 이후 전지구적 차원에서 ‘시장의 네트워크’는 형성됐으나 그에 걸맞은 ‘규제와 감독의 네트워크’는 만들어내지 못한 데서 자라났다. 시장경제의 특징인 불균형이 위기라는 방식으로 폭발하지 않도록 사전에 적절하게 제어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개별국가-지역-국제사회를 한 축으로, 비정부기구-정부-국제기구를 또다른 축으로 하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일궈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이런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자원·에너지등 전문가
한반도종단철도 관심

이 대목에서 그가 특히 눈여겨보는 것은 적절한 규제와 감독 권한을 둘러싼 주권국가와 국제사회 사이의 갈등 가능성이다. 얼마나 적절한 해법을 찾아내느냐에 따라, 위기 이후 국제질서가 불안정성을 더욱 키우느냐 혹은 안정화의 길로 접어드느냐의 갈림길에 설 수 있다는 게 그의 기본 생각이다.

수티린 교수는 이행기 러시아 경제발전 전략 전문가답게 자원·에너지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지난해 가을 열린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했을 때는 한반도종단철도(TKR)과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사업, 러시아 천연가스 공급사업 등이 한반도와 동북아 정치·경제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뜻을 강하게 밝히기도 했다. 이번 대담에서도 수티린 교수는 지난 10여년간 러시아가 세계경제 무대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데는 자원과 에너지라는 배경이 중요한 구실을 했음을 인정했다. 동시에 수티린 교수는 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 단계에 이르면 이런 자원의존형 발전전략이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이번 위기 극복과정에서 러시아 경제가 한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최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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