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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5.24 22:01 수정 : 2009.05.24 22:01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문정인칼럼

중국 베이징에서 국제회의 참석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일정을 중단하고 바로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과 연을 맺은 이래 그와 가졌던 수많은 공·사석의 외교안보 현안 토론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더욱 그랬다.

2차 북핵 위기와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 결정을 둘러싸고 고뇌하던 지도자 노무현의 모습, 일부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분서주의 행보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을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시키고 반가워하던 그의 환한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10·4 정상선언을 성사시킨 후 감회에 젖던 노 전 대통령, 그는 분명히 성공한 외교 대통령이었다.

그는 외교안보의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타고난 전략가였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협력과 통합의 동북아라는 큰 그림 속에서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유럽 통합 모델을 면밀하게 비교검토하고 다자협력을 기본 축으로 하는 동북아 공동체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는 세력균형 결정론이라는 냉전적 사고를 뛰어넘어 한국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발상이었다.

북한과 주변 4강에 대한 정책도 이런 대전략 아래 세워졌다. 미국과 일본에서 이탈하여 중국에 편승하는 섣부른 정책으로 매도되었던 균형자론도 이 대전략의 큰 틀에서 만들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이 군사력과 같은 물리력에 의한 경성 균형자(hard balancer)가 될 수는 없지만 역내 국가 모두와 선린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자협력을 주도하는 연성 균형자(soft balancer) 구실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미래를 보고 여는 정책적 포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결코 반미친북을 표방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한-미 동맹을 단기적으로 우리의 생존을 담보해주는 필수적 전략 자산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이라크 파병, 용산기지 평택 이전,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 등 중요한 한-미 현안들을 과감히 해결했던 것이다. 미국이 노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한-미 동맹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영속적 평화를 가져오기는 힘들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동맹은 본질적으로 공동의 적과 위협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안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미 동맹의 기조하에 유럽과 같은 다자안보협력체제를 동북아에도 구축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임기 내내 악몽처럼 노 전 대통령을 괴롭혔던 2차 북핵 위기만 해도 그렇다. 그의 예지, 담력, 그리고 결단이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군사적 충돌이라는 재앙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북에 대해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 6자회담을 통한 협상타결 방안을 도출했고,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로 6자회담이 파국의 위기에 몰리자 정상회담의 의전 관행을 깨면서까지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압박해 사태의 반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2006년 10월 북의 핵실험 직후 대북 제재방안을 논의하러 방한했던 당시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미국 책임론으로 응수해 부시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유도하기도 했다. 승부사의 기질로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떠나간 후에 그의 외교적 업적이 더 커 보인다. 왜 그럴까. 지난 정부의 외교 구상을 전면 부정하고 큰 그림 없이 즉흥적 임기응변 외교로 일관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무모한 대결을 통해 우리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현 정부의 암울한 행보 때문이 아닐까.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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