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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28 21:36 수정 : 2009.01.21 11:26

문정인 연세대 정외과 교수

문정인칼럼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대북 인권특사를 지낸 제이 레프코위츠가 12월23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에 ‘북한 인권에 정면으로 맞서라’는 제하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정책제언 성격을 띠고 있는 이 기고문에서 그는 북한의 인권 문제를 북핵, 경제적 지원 등과 연계시켜 포괄적으로 강도 높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헬싱키 프로세스를 북한에 적용할 것을 강력히 제의하고 나섰다.

북한의 인권개선 시급성에 대해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헬싱키 프로세스에 대한 레프코위츠의 아전인수식 왜곡에 있다.

‘헬싱키 프로세스’는 나토와 바르샤바 동맹 35개 회원국들이 유럽의 안보협력을 위해 1975년에 체결한 헬싱키 협약(Helsinki Final Act)을 이행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협약은 유럽 안보협력을 위한 10개의 원칙과 3개 부분의 신뢰구축 조처들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레프코위츠 주장과 달리 이 과정에서 인권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았다. 헬싱키 협약의 10개 원칙에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 원칙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주권 존중, 무력 불사용, 영토주권의 보장, 분쟁의 평화적 해결, 내정 불간섭, 그리고 국제법 준수 원칙 등에 더 큰 비중이 주어졌다.

이 협약의 핵심부분은 군사 분야의 신뢰구축 조처, 경제, 과학기술 그리고 환경 분야에서 교류협력, 그리고 인도주의 교류 등 세 개의 바스켓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세 번째 인도주의 바스켓에서 인권개선 조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인적·정보·문화·교육 분야의 교류, 협력만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헬싱키 프로세스는 당시 소련과 동유럽이 느끼는 인권문제에 대한 민감성을 반영해 조심스런 접근을 했고 내정불간섭 원칙을 포함함으로써 인권 원칙과의 균형을 잡았던 것이다.

헬싱키 프로세스에서 인권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동유럽 붕괴 이후인 90년부터다. 89년 출범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1990년 ‘코펜하겐 문건’의 채택을 통해 동유럽의 인권 및 민주주의 증진을 핵심 의제로 설정하고, 그 집행기구로 ‘민주제도 및 인권국’을 신설하는 등 이 분야에 대한 적극적 행보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헬싱키 프로세스는 냉전기간 중에는 두 진영 간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개방·개혁을 위한 경제·사회·문화·인적 교류의 활성화 등 인권개선의 환경 조성에 역점을 두었고, 냉전해체 이후에야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북한 인권의 개선을 위해서는 레프코위츠의 강성 처방보다는 ‘헬싱키 프로세스’의 단계적 접근이 시간은 걸리지만 더욱 효과적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북의 주권과 영토, 무력 불사용, 내정 불간섭 원칙 등을 양자 또는 다자 형식으로 보장해 북한을 안심시켜야 한다. 그리고 조건 없는 경제·과학기술·환경·사회 문화적 교류 협력의 활성화를 통해 북의 자발적 변화를 모색하는 동시에, 북의 내부적 여건이 성숙되기 전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압력 행사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북한 같은 사회에서 인권에 대한 전방위 압박은 실효성이 적을 뿐 아니라 체제전환의 흡수통일론으로 공격을 받음으로써 군사적 신뢰구축과 평화공존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이 점 유념하며 오바마 행정부도 레프코위츠식이 아니라 유럽식 헬싱키 프로세스를 북한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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