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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05 17:00 수정 : 2008.12.05 17:07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⑧ 촛불과 민주주의
대선·총선 이미 지나 기댈 곳은 ‘거리정치’뿐
4년은 위기이자 ‘기회’…지금부터 준비해야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놓고 또 다시 이념논쟁이 불붙고 있습니다. 최근 교육과학부, 국방부, 통일부 등이 “역사 교과서가 좌향좌돼 있다”며 잇따라 교과서 수정 의견을 냈고, 한나라당 등 정치권도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사연구회와 한국역사교육학회 등 관련 학회와 일선 교사들은 “역사는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가 전공인 한홍구 교수가 지난 10월13일부터 시작한 ‘대한민국사 특강’이 여덟번째 ‘촛불과 민주주의’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편집자주


■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순서


1.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
2. 돌아온 간첩, 그 황당함에 대하여
3. 대한민국은 공사 중: 토목 국가와 ‘경제성장’
4. 헌법정신과 민영화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묻는다
5. 괴담의 사회사 - 여고괴담에서 광우병 괴담, 독도괴담까지
6. 경찰폭력의 역사 - 일본 순사에서 백골단 부활까지
7. 경쟁 만능의 비극 - 잃어버린 교육을 찾아서
8. 촛불과 민주주의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⑧ 촛불과 민주주의

한국현대사의 예측불가능성
누가 지난 봄, 여름의 촛불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역사는 원래 그렇듯 예측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이 땅의 지식인들이 그 역사의 힘을 예측할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촛불 이전의 상황은 너무나 암울했다.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상황에서 정치권의 정치공학자들은 선거가 임박하게 되면 5퍼센트 이내에서 승부가 판가름날 것이라며 계산기만 두들겼다. 진보진영은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언어로 논쟁을 벌였다.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속수무책. 상황은 흘렀고, 결과는 참담했다.

그런데 그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지 채 3개월이 안 됐는데 촛불이 켜졌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한국현대사를 살펴보면, 한국의 대중들은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다시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7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전쟁 당시 열 살짜리 꼬마들이 스무 살 대학생이 되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79년 부마 항쟁도 유신이 선포된 지 7년 만에 일어났다. 광주의 피바람을 겪고, 87년 6월 항쟁을 이뤄낸 것도 꼭 7년 만의 일이었다. 대중들은 늘 다시 일어났다. 길어야 10년이었다.

독수리 오형제 vs 민주화운동 세대들
이번엔 소녀들이 가장 먼저 촛불을 들었다. 한때 이 한 몸 다 바쳐 나라와 지구를 구하겠다던 어른들이 있었다. 이른바 독수리 오형제 세대, 70,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세대다. 이들은 단군 이래 최고로 책을 많이 읽은 세대라는 말이 있듯이,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머리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본 경험이 없었다. 당연히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이 무뎠다. 5월 초, 광장에 모여들었던 촛불 소녀들에게 민주주의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체화된 것’이었다. 이들이 내건 대표적인 구호가 “내가 먹을 것을 왜 니가 정하냐?”였다. 핵심은 “왜 니가 정하냐?”는 것. 그들은 먹을거리에 대한 자기 권리, 먹을거리에 대한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민주화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아이들이 출현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민주화운동 40년, (제대로 운영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 정부 10년의 결실이었다.

왜 한국에선 거리 정치가 반복되나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에서 거리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2002년 미선·효순 사망, 2004년 대통령 탄핵, 그리고 올해 다시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왜 한국에서 거리의 정치가 반복되는 것일까? 제도정치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의정치라면 각 계층의 의견을 대변하는 사람들로 의회가 구성되야 하는데, 우리 정치의 구조는 그러하지 못하다. 수 백만 농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있나? 농촌 지역 출신 의원은 있지만,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농민이 아니라 농촌 지역 토호다. 980만 비정규직 노동자, 백수들, 대학생들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있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는 인구 비례로 따져 너무나 소수인 지역 토호들, 토건업자들에 의해 과잉 대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려면 다른 곳에서 판을 벌일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사람들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 거대한 저항이 3개월씩이나 지속된 것일까? 87년 6월 항쟁 당시 사람들이 내건 구호는 오직 하나,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였다. 집권세력이 무릎을 꿇고, ‘직선제’ 요구를 들어주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미선·효순 사망과 탄행정국 땐, 대선과 총선에 코 앞에 있었다. 표로 심판할 기회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거리에서 물러섰다. 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대선을 치른 지 6개월, 총선을 지른 지 겨우 한 달 반이 지났을 뿐이었다. 계속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내는 일 말고는 기댈 게 없었다.

촛불, 그 후…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합법적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 집권한 정권이었다. 시민들은 촛불을 통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슴 벅찬 기쁨과 가능성을 느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의 힘을 무너뜨리는 자기모순을 범할 순 없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보수층을 결집하고 새로운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통치 전략을 급격히 수정했다. 역대 수구 정권을 지탱한 것이 공안기관에 의한 공포 정치였음을 그들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촛불이 잦아들자마자 검·경이 합동으로 움직였다. 검찰은 조중동 불매운동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경찰은 유모차 부대 엄마들을 ‘아동학대죄’라는 이름으로 조사했다. (역사전공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유모차 끌고 나온 젊은 엄마들을 붙잡아 조사한 놈들, 이 자들의 이름을 반드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정부는 국정원 권한을 강화하는 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방송장악 시도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연주 사장을 내칠 때, 그저 줄 서 있는 사람들 자리 만들어주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언론을 장악하고 공안기관의 힘을 빌려서야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경제위기가 몰아치고 있다. 강도와 여파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의 결과가 어땠나?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했다. 히틀러는 쿠테타로 집권한 것이 아니었다. 독일 국민들이 직접 뽑아줬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민주주의를 역진하고 있는 지금의 기세로 봐서 어쩌면 20~30년 뒤로 후퇴한 파시즘 정권이나 그에 준하는 수구 정권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4년은 커다란 위기이자 기회이다. 우리는 이번에 민주주의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만히 앉아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크게 깨달았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우선 각자가 기대하고 있는 정책과 원칙이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적합한지, 지금부터 힘을 모아 나가야 한다. 오늘로 여덟 번의 강의를 마친다.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끝>

정리 박상준 <한겨레출판> 편집부 인문팀장 laughter@hanibook.co.kr
영상 은지희 피디 eu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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