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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07 15:45 수정 : 2008.11.07 15:52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④ 헌법정신과 민영화
민영화 아니라 ‘사영화’…DJ 정권때 가장 활발
‘주주이익 극대화’ 바뀌면 최대 피해자는 국민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놓고 또 다시 이념논쟁이 불붙고 있습니다. 최근 교육과학부, 국방부, 통일부 등이 “역사 교과서가 좌향좌돼 있다”며 잇따라 교과서 수정 의견을 냈고, 한나라당 등 정치권도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사연구회와 한국역사교육학회 등 관련 학회와 일선 교사들은 “역사는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근·현대사를 놓고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한겨레> 독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사 특강’을 시작합니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가 전공인 한 교수는 지난 10월13일부터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매주 월요일 특강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출판>에서 강의록과 녹취록을 정리해 영상과 함께 매주 금요일 오후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특강을 1회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을 시작으로 모두 8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순서

1. 역사의 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
2. 돌아온 간첩, 그 황당함에 대하여
3. 대한민국은 공사 중: 토목 국가와 ‘경제성장’
4. 헌법정신과 민영화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묻는다
5. 괴담의 사회사 - 여고괴담에서 광우병 괴담, 독도괴담까지
6. 경찰폭력의 역사 - 일본 순사에서 백골단 부활까지
7. 경쟁 만능의 비극 - 잃어버린 교육을 찾아서
8. 촛불과 민주주의


[한홍구의 역사특강④] 헌법정신과 민영화-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묻는다

민영화가 아니라 사영화가 맞다
오늘 네 번째 강의 주제는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90년대 이후 역대 정권의 집권 초기마다 나오는 단골 메뉴가 ‘민영화’ 얘기다. 우선 먼저 용어부터 바로 잡고 시작하자. ‘공(公)’의 반대말은 ‘민(民)’이 아니라 ‘사(私)’이다. 그러니 정확하게는 ‘사영화’라고 쓰는 것이 맞는데, 언제부터인가 민영화라고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촛불 집회 당시 민영화 시도가 막히자,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 선진화’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도대체 ‘선진’의 잣대는 뭔가?

우파들이 만든 제헌 헌법 속 급진적 공공 정신
공기업 민영화는 국가의 공공서비스를 책임지고 있는 공적 기업을 민간 대자본에 팔아 큰 이윤 획득의 기회를 제공하는 ‘친재벌 정책’의 결정판이다. 이명박 정부는 왜 그리 민영화에 집착하는 것일까? 본래 우리나라는 재화의 공공성에 대한 개념이 강한 나라다. 『주례』에 입각한 유교 국가 조선이 그러했고, 현 헌법과 뿌리가 맞닿아 있는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조소앙)이나 제헌헌법(유진오)을 살펴보면 지금의 시각으로는 엄청나게 급진적인 토지개혁과 재화, 기반 시설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조항이 담겨 있다.

제헌 헌법 제86조 :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
제헌 헌법 제87조 :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이 제헌 헌법을 만든 이들은 우파들이었다. 이 헌법에 따라 1950년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는데, 당대 최대 지주였던 김성수조차 이 농지개혁을 반대하지 않았을 정도로 토지나 중요 산업 시설을 공영화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왜 한국에는 공기업이 많았나?
국가별로 공기업의 비중은 저마다 다르다. 영국의 경우 2차 대전 후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전시통제하의 기업들을 대거 국유화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경우도 나치 협력 집단의 재산을 국가가 몰수해 국유화했다. 미국은 자영업자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공기업의 비중이 유럽과 비교해 상당히 낮다.

한국에 공기업이 많은 편인데 역시 그 뿌리는 해방 후 적산(귀속재산)의 처리 문제와 관련이 있다. 또한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식민지 공업화가 대규모로 이루어졌고, 다른 나라에 비해 적산의 규모가 컸다.

공기업 민영화가 가장 활발했던 시절은 DJ 정권 초기이다. 국가 부도 국면에서 많은 공기업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 포항제철, 한국통신, 한국담배인삼공사, 한국중공업 등 8개 공기업이 완전 민영화되고, 한국전력, 가스공사, 지역난방공사 등이 부분적으로 민영화되었다. 공기업의 67개 자회사도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공기업 민영화의 명분으로 삼는 전략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다.

진짜 효율성 때문에 민영화를 주장하나?
외환 위기 이후 정부와 언론의 민영화 당위론 속에서 “공기업은 비효율적이고, 따라서 민영화해야 한다”고 수동적으로 민영화를 지지해오던 국민들의 기류가 달라지고 있다. 공공요금과 민생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쇠고기 문제와 대운하, 공공 분야의 민영화 문제가 맞물려 있는 것임을 파악한 것이다. 정부는 민영화 안하겠다고 꼬리를 내렸지만, 공기업의 무사안일과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언론플레이를 멈추지 않고 있으며, ‘선진화’라는 레토릭으로 우회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정말 공기업의 경영 방식이 비효율적이어서 민영화를 시도하는 것일까? 민영화 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개혁하는 방식은 없는 것일까? 과연 민영화 하면 효율성이 증대될까? 시장 자체가 완전 경쟁 체제라면 경쟁이 효율성을 가져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영화가 거론되는 많은 기업들이 시장 내에서 독점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공기업의 목표는 ‘국가 기간 시설의 안정적 관리’이다. 민영화되는 순간 그 목표는 ‘주주 이익의 극대화’로 바뀐다. 결국 누가 손해를 보는가? 고스란히 국민이 그 짐을 떠맡게 된다.

다음 주 강의 주제는 ‘괴담의 사회사’이다. 한국 사회에는 왜 이렇게 괴담이 많은가? 그 괴담은 어떻게 전파되고, 어떻게 소비되는가? 등의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자.

정리 박상준 <한겨레출판> 편집부 인문팀장 laughter@hanibook.co.kr
영상 박수진 피디 jjinpd@hani.co.kr


* 질의응답

오늘은 수강생 중 한 분께서 지난 강의 끝나고 제게 주신 질문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생각해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되는데, 이야기를 나누어보죠.

Q. 우리의 경우 과거사 청산 문제가 아직까지 완전히 처리되지 않았는데,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4년 동안 나치 지배를 겪은 프랑스는 구악을 한 번에 처리했다고 하고, 북한도 비교적 말끔히 처리했는데요. 반면 대만이나 인도, 필리핀 같은 경우에는 식민지 시절 의료, 학교, 행정 시스템 등 근대화가 이뤄진 것에 대해 식민 모국에 고마워하는 분위기도 있던데요.

A. 과거 청산의 강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식민 통치 기간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3.1 운동 무렵, 혹은 고종 황제 서거 무렵 독립할 수 있었다면, 아마 이완용을 사형에 처했을 거예요. 프랑스가 천 명 정도 나치 부역자를 처형했다고 하는데, 우리도 독립 시기가 빨랐다면 훨씬 센 강도의 과거 청산 작업을 했을 겁니다. 반면 인도의 경우 영국의 통치 기간이 200년이었거든요. 간디나 네루 같은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친영파 제거보다는 ‘자치’의 문제였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독립 운동 진영에서 ‘자치’ 문제를 얘기했다면, 타협파나 친일협력파로 치부되었을 겁니다.

하나 더 살펴볼 것은 독립 후 누가 집권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비독립운동 세력이 해방 후 집권한 나라는 남한과 남베트남뿐이거든요. 남베트남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존재가 사라졌고, 남은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지요. 독립운동 세력이 해방 후 집권했다면 과거 청산 문제를 비교적 손쉽게 처리했겠지요. 우리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과거 청산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그 과정이 바로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과 한국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죠. 일본의 공식 식민지가 두 곳이었는데, 그게 대만과 한국입니다. 대만의 경우에는 이등휘 전 총통이 재직 시절 일본 식민지 시절 대만이 발전한 것에 대해 고맙다라는 발언을 했을 정도로 우리와는 일본에 대한 정서가 다릅니다. 그게 대만 사회의 특성에서 기인한 거라 볼 수 있습니다. 대만에는 통용되는 언어가 대만어, 광동어, 북경어로 세 개입니다. 인구 구성도 본토 고산족, 청나라 시절 대륙에서 내려온 사람들, 국민당 정부와 함께 내려온 사람들로 나뉩니다. 따라서 본토 대만인의 입장에서는 장개석 정부나 일본 정부나 마찬가지 외래 지배 세력이었겠지요. 저항의 강도가 그래서 달랐던 것이죠. 또 일본이 상대적으로 대만에 대해 유화 정책을 쓴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우리나라 보수 세력은 좌파빨갱이들만 과거 청산을 원하는 것처럼 몰고 가는데, 그게 그들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들이 먼저 나서서 과거 청산 문제를 처리하면 국민화합차원에서도 좋을 텐데요. 무엇보다 과거 청산이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21세기적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남미나 동구, 스페인 등에서 과거 청산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우리보다 훨씬 강도가 셉니다. 우리는 정말 얌전하게 과거 청산하자고 하는 겁니다.

Q. 일제 징병에 끌려갔다 살아 돌아오신 저희 부친께서는 “그래도 조선 사람은 내선일체라고 대우를 받았는데, 중국 사람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A. 일제 식민지 시절 ‘대일본제국’은 일본인, 조선인, 만주인, 몽골인, 중국인, 백계러시아인 등으로 구성된 복합민족국가였습니다. 일본은 오족 혁파라고 해서 제국 내 민족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공언했지만 실질적으로 인종적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그중 조선인은 ‘이등 신민’으로 취급되었지요.

그렇다면 중국인들보다 나은 ‘이등 신민’으로 대접 받았다고 좋아할 일이냐, 그게 절대 아닙니다. 전체 위안부 중에서 조선인 출신 위안부가 80퍼센트 이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선인이 ‘이등 신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등 신민 여성들을 전쟁에 끌어낼 수는 없고, 삼등, 사등 신민 여성을 위대한 황군 병사에게 바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일제 시절 이런 식의 인종적 위계 질서가 있었고, 그걸 우리가 어느 정도 내면화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한국인들에게 내면화된 백인보다 못하지만 흑인들보다는 낫다는 의식, 중국인이나 베트남인에 대한 우월 의식이 있잖아요. 그게 ‘이등 신민 의식’의 흔적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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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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