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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07 19:34 수정 : 2013.01.07 19:34

백승종 역사가

그는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는 농부였다. 논밭에만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사랑을 심고 키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무살도 되기 전에 사랑방을 농민야학으로 바꿨다. “농민은 못난 사람이 아니다. 못난 사람은 농민이 아니다. 못난 사람이 아닌 농민이다.” 또 이렇게도 외쳤다. “농민은 양반이 아니다. 양반은 농민이 아니다. 양반 아닌 농민이다.”(윤봉길의 ‘농민독본’) 농민은 권력을 휘두르는 양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난 사람은 더더욱 아니란 것이다. 새 양반으로 등장한 조선총독의 졸개들이 윤봉길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향 산천에서 쫓겨난 그의 눈에 새로운 농민의 모습이 들어왔다. 노동으로 생명을 기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농민이었다. 공장노동자들도 그에게는 농민과 다름없었다. 그는 기꺼이 노동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갈 때도 윤봉길은 모자 제조공장의 노동자였다. 그곳에도 못된 새 양반, 즉 탐욕스런 공장주가 버티고 있었다. ‘노동자는 공장주가 아니다. 그렇다고 못난 사람은 절대 아니다.’ 윤봉길은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해 파업을 주도했고 결국 해고를 당했다.

윤봉길은 누구보다 생명과 평화를 사랑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일터에서 쫓겨나기만 했다. 그를 거듭해서 궁지로 내몬 것은 불의한 권력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을 잡아먹는 제국주의 체제였다. 그리하여 윤봉길은 제국주의의 기둥에 직접 도끼질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 나타나자 저들의 전승축하 행사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1932)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맹세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내 농사만 잘되면 다른 사람의 농사는 망해도 그만인가요. 내 한 몸이 살기 위해서라도 미약한 우리가 굳게 단결해야 합니다. 시베리아 평원의 야생마도 이리에게 당하지 않으려 무리를 짓습니다.’ 의사의 이름을 팔아먹으려는 자들은 귀가 있느냐.

백승종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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