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22 19:31
수정 : 2012.10.2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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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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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김종필은 불현듯 ‘국민총화’라는 말을 꺼냈다. 집권당인 공화당의 내분을 끝내고, 국민총화로 박정희의 영도력을 강화하자고 했다. 이로써 김종필은 온 국민의 화합을 뜻하는 이 말을 정치적으로 오염시켰다.
독재자는 이 말을 시간이 갈수록 애용했다. 1975년에는 공식석상에서 최소 100번쯤은 읊어댔을 것이다. 이상하다 싶어 그 뿌리를 캐 보았다. 국민총화라는 정치적 수사가 실은 일제의 유산이었다. 1933년 일제의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국민력(國民力)의 총화’야말로 전승의 밑거름이라고 억지를 썼다. 박정희는 그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었다. 1971년 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박정희는 “국민의 총화와 단결”로 국가안보를 지키자며 국민들을 위협했다.
유신정권은 국민총화를 내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는 음반과 공연을 금지할 때도 국민총화를 핑계로 삼았다. 이 주술적 구호에 도취되고 만 독재자는 국민총화라는 휘호도 남발했다. 1977년 1월1일 그가 쓴 휘호 한 장이 무려 6200만원에 낙찰되기도 해(2004), 뜻있는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유신정권의 퍼스트레이디도 국민총화에 관한 신앙고백을 했다. 그는 국민총화를 위해서, “우리가 이 시점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또 시급한 일은, 무엇보다도 범국민적으로 새마음갖기운동을 벌여 정신순화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1976년 12월17일
) 그는 감히 국민정신의 개조를 다짐했었다. 유신정권이 곧 무너졌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온 국민이 정신순화라는 곤욕을 치를 뻔했다.
‘국민총화’란 구호가 어느새 ‘국민대통합’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민총화의 깃발을 내세우며 무고한 시민을 탄압하던 유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람이 아직 그 사람이고, 낡은 색깔론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서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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