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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27 17:51 수정 : 2009.04.27 17:51

마그리트, <골콘다>, 1953, 유화, 81x100cm, 휴스턴 메닐 컬렉션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8] 마그리트와 데페이즈망

전혀 엉뚱한 결합…자유로움과 상상의 무한지대
파괴함으로써 창조하는 새로움…산업에도 응용

‘낯선 그림’의 대명사 르네 마그리트가 근래 우리 대중들에게 아주 친숙한 미술가로 자리 잡았다. 그 계기는 2005~07년 신세계 백화점 본점 리모델링 당시 그의 <골콘다>가 커다란 가림막 그림으로 사용된 것과 2007년 ‘르네 마그리트 전’이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려 많은 관람객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의 주된 창작 기법인 데페이즈망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특히 창의력과 상상력이 시장과 교육계의 화두가 되어버린 요즘, 데페이즈망은 이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고 잠재력을 개발해주는 의미 있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린이 미술교육에 적극 활용되고 있고, 비즈니스맨을 위한 창의력 교육에도 심심찮게 도움을 주고 있다.

데페이즈망(depaysement)은 우리말로 흔히 ‘전치’(轉置)로 번역된다. 특정한 대상을 상식의 맥락에서 떼어내 이질적인 상황에 배치함으로써 기이하고 낯선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말한다.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로트레아몽의 시에 “재봉틀과 양산이 해부대에서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전형적인 데페이즈망의 표현법이다. 해부대 위에 재봉틀과 양산이 놓여 있다는 게 통념에 맞지 않지만, 바로 그 기이함이 시적·예술적 상상을 낳아 논리와 합리 너머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마그리트, <기억>, 1948, 유화, 59x49cm, 벨기에 프랑스 공동체 문화유산
위에 언급한 <골콘다>를 통해 데페이즈망의 맛을 좀더 깊이 음미해 보자. 작품은 파란 하늘과 집들을 배경으로 검은 옷과 모자를 쓴 남자들이 부유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비처럼 하늘에서 쏟아진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간에 이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일단 화가는 이 그림에서 중력을 제거해버렸다. 거리를 걷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공중에 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으로 포진해 있다. 기계적인 배치다. 빗방울이 떨어져도 이렇듯 기하학적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 이처럼 현실의 법칙을 벗어나 있지만, 그 비상식적 조합이 볼수록 매력적이다. 기이하고 낯설다는 느낌이 보는 이에게 숨겨진 미스터리와 신비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동했다는 뜻이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이상 이 허구의 이미지는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의 힘이 되어버린다.

데페이즈망은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현실로부터 쉽게 일탈해 무한한 자유와 상상의 공간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런 점에서 데페이즈망은 현실에 대한 일종의 파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법칙과 논리를 간단히 무장해제해 버리는 파괴의 형식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 이 형식의 다양성이다.


파괴라는 말은 그 말의 강한 인상으로 인해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창조의 형식만큼 파괴의 형식도 다양하다. 흔히 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한다. 이때 파괴는 단순히 창조를 위한 전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파괴의 형식이 창조의 형식을 규정하고 파괴의 결이 창조의 결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파괴는 무차별적인 그 무엇이 아니며, 창조가 파괴로부터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것도 아니다. 파괴되는 순간, 창조의 방향은 이미 결정이 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파괴의 형식으로서 데페이즈망은 매우 다양한 색깔을 보여준다. 데페이즈망이 보여주는 파괴는 다채롭고 무한하다. 그 말은 데페이즈망으로 인한 창조의 형식 또한 다채롭고 무한하다는 뜻이 된다. 프랑스의 미술사가 사란 알렉상드리앙은 마그리트의 그림에 나타난 데페이즈망의 형식을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기, 보완적인 사물을 조합하기,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기, 미지의 차원을 열어 보이기, 생명체를 사물화하기, 해부학적 왜곡 등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미술가이자 비평가인 수지 개블릭은 사물을 원래의 맥락으로부터 떼어놓는 고립, 불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변형,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합성, 스케일과 위치의 부조화, 우연한 만남, 동음이의어적인 이중 이미지, 역설, 시공에 관한 경험을 왜곡한 이중 시점 등을 마그리트가 구사한 대표적인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꼽는다. 파괴의 형식에 관한 언급들이지만, 그것이 곧 창조의 형식에 관한 언급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마그리트, <레슬러의 무덤>, 1961, 유화, 89x117cm, 개인 소장
위에 언급된 기법 가운데서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기’가 적용된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자. <레슬러의 무덤>은 장미 한 송이가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그려진 그림이다. 오로지 꽃의 크기만 변화시켰을 뿐이지만 평범한 일상이 낯선 상황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이 일상의 파괴는 그러나 공간 안에 새롭고 신비한 기운을 가득 불러온다.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미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말을 걸어올 것 같다. 저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본다면 더 불가사의하고 낯선 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의 새로운 탐험은 시작되고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일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모험에 나서는 이런 데페이즈망적 시도는 예술을 넘어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곧잘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크리넥스 사업에 집중한 킴벌리 클라크 사의 시도가 그런 것이다. 킴벌리 클라크의 가장 큰 수익원은 원래 제지 사업이었다. 크리넥스 같은 위생용품은 매출에서 극히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1년 시이오 다윈 스미스는 회사의 장래가 아직은 미미한 크리넥스에 있다고 보고 이에 집중하기 위해 핵심 사업 부문들을 과감히 처분해버렸다. 이 ‘파괴’에 놀라 주가가 급락하고 애널리스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킴벌리 클라크의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기’는 결국 큰 사업적 성공으로 판명됐다. 파괴의 형식은 이렇듯 창조의 형식인 것이다.

‘보완적인 사물을 조합하기’ 혹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합성’과 같은 결합의 형식도 마그리트가 즐겨 사용한 파괴와 창조의 형식이다. <기억>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창턱 위에 석고 두상과 나뭇잎, 방울 형태의 구가 놓여 있는 그림이다. 특이한 것은 석고상의 관자놀이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린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쳐 피를 흘리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제아무리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도 사람이 아닌 조각상이 피를 흘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각과 피의 그 결합이 낯설기에 이 그림 또한 일상의 질서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해체를 통해 상상의 무한지대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휴대용전화기에 컴퓨터 기능을 더한 스마트폰이나 서커스에 음악·무용·미술과 같은 예술을 결합한 시르크 드 솔레유의 공연 등 각종 컨버전스 상품에서 우리는 이런 데페이즈망적 결합과 합성의 산업적 성취를 본다. 그런 점에서 기이하고 낯선 장면을 연출하는 데페이즈망은 우리의 일상에서 더는 기이하고 낯설기만 한 문화적 현상이 아니다. 데페이즈망은 문화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넘어 중요한 창조의 수단으로 우리의 일상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낯설기만 했던 마그리트의 예술이 갈수록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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