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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30 18:01 수정 : 2009.03.30 18:01

아틀리에의 앤디 워홀(가운데). 워홀은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장을 뜻하는 팩토리로 불렀다. “기계가 되고 싶다”고 외쳤던 워홀의 미학적 의지가 반영된 이름이다.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4] 화가의 아틀리에

중세 이전에는 건축현장이 곧 작업장
이후 차츰 독립…실기 교육도량 겸해

“찌는 듯한 더위에 숨이 막히지만 아직 선풍기를 장만하지 않았다. 창신동 단칸방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그림을 그릴 때, 러닝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물에 빠진 듯한 그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지금껏, 아니 내가 눈감을 때까지 선풍기를 사지 않을 것이다.”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이 쓴 글이다. 아틀리에가 따로 없어 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림을 그린 박수근. 그 남편을 기억하는 아내는 죽을 때까지 선풍기를 사지 않았다. 그런 애환 속에서 탄생한 게 국민화가 박수근의 걸작이니 참으로 그의 작업공간은 ‘예수의 마구간’ 같은 곳이었다 하겠다.

아틀리에. 미술가가 작업하는 공간을 일컫는 프랑스 말이다. 영어로는 스튜디오로 불리는 이 공간에서 인류가 자랑하는 수많은 명화들이 탄생했다. 말 그대로 창작의 산실이나, 일반인들로서는 좀체 발을 들여놓기 쉽지 않은 비밀스런 공간이기도 하다. 그 공간을 둘러보자.

미술가의 일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손노동에서 시작하니 미술가가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노동의 공간은 존재했다. 그러나 미술작업이 단순히 노동으로 인식되는 한 그 공간이 특별히 다른 노동의 공간과 구별될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예술 장르가 분화되기 전, 예술가들의 작업은 직종간 협업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그림 기술자’ 혹은 ‘조각 기술자’가 내내 자신만의 공간에서 깊은 사색을 하며 홀로 작업한다는 것은 극히 생소한 일이었다.

유럽의 경우 중세 로마네스크 시대(10세기 중반~12세기 말)에는 그림 주문이라는 게 대부분 벽화 주문이었고, 조각 역시 건축물에 부속된 것이었기에 건축 현장이 바로 미술가들의 작업공간이었다. 물론 채색필사본 제작이나 금세공 같은 일은 건축과 관계없는 것이었으나, 이것도 수도원 산하 작업장에서 수도사의 감독 아래 행해지는 경우가 많아 작업 과정이 그다지 독립적이거나 주체적이지 않았다.

예술가의 작업공간이 건축 현장이나 수도원으로부터 점차 분리되어 독립공간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은 고딕 시대(12세기 말~15세기 중반)에 들어와서다. 조각가들은 예전처럼 건축물에 미리 설치된 돌에 조각을 하지 않고 공사장 곁에 따로 차려진 공간에서 작업한 뒤 완성작을 건물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나무판에 그려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패널화가 대두되고 그로 인해 벽화 수요가 줄어들자 화가들 또한 건축 현장으로부터 분리된 작업공간에서 작업하게 되었다.



베르메르, <화가의 아틀리에>, 1666~67, 유화, 120x100cm, 빈 미술사 미술관
이렇듯독립적인 공간을 소유하게 되면서 미술가들의 주체성과 전문성은 한층 뚜렷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술가가 아직 장인으로 취급받던 시절, 아틀리에는 장인(master)과 장색(journeyman), 도제(apprentice)가 위계적으로 일하는 기술 공방의 성격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 예술가가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신이 범인과 구별되는 창조적인 능력을 더해준 인격체, 곧 천재로 인식되면서 아틀리에는 비로소 기술 공방 수준을 넘어 더 높은 정신적 가치를 지닌 예술품을 생산하는 장소가 되었다.

베르메르가 그린 <화가의 아틀리에(회화 예술의 알레고리)>는 17세기 아틀리에의 일상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베르메르는 이 그림을 델프트의 화가 길드를 위해 그렸는데, 그만큼 아틀리에가 얼마나 고귀한 정신 활동을 벌이는 곳인지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미술이 비천한 손기술이 아니라 고도의 창조 활동임을 증명하기 위해 오랜 세월 미술가들은 힘껏 투쟁해왔다. 일찍이 다빈치는 사람들의 편견에 맞서 “회화는 자유학예(liberal arts)의 하나”라고 당당히 선포했다. 베르메르는 자신의 아틀리에 그림을 통해 이제 사람들이 그 진실을 한결 선명히 인식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자세히 살펴보자. 화면 앞쪽의, 등을 돌리고 앉은 이가 화가다. 그는 이젤 위에 캔버스를 올려놓은 뒤 팔받침대에 팔을 대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튜브 물감은 보이지 않는다. 튜브 물감은 1841년 발명되어 1850년대부터 상용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화가가(혹은 제자가) 직접 안료를 갈아 물감을 만들어 썼다. 베르메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가가 시선을 던지는 쪽을 보자. 정물들이 놓인 정물대가 보이고, 그 곁에 월계관을 쓴 모델이 책과 나팔을 들고 있다. 아틀리에에서 그리는 가장 전형적인 장르가 정물과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그림은 한꺼번에 그 두 가지를 다 보여주는 셈이다. 이렇게 화가와 화구, 핵심 장르가 다 그려져 있는 까닭에 이 그림은 ‘화가의 아틀리에’라는 제목 외에 ‘회화 예술의 알레고리’라는 제목도 갖고 있다.

모델이 된 여인을 좀더 주목해 보면, 그녀는 지금 뮤즈 가운데 하나인 클리오로 분장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 뮤즈는 영감을 주는 존재다. 그 가운데서도 클리오는 역사의 뮤즈다. 이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미술 또한 영감, 그것도 역사의 영감을 얻는 매우 차원 높은 정신 활동임을 알게 된다.


가일링, <‘학부회화’ 중 ‘철학’의 밑그림을 그리는 클림트>, 1902년경, 유화, 44x29cm, 개인 소장
아틀리에는 역사적으로 창조 공간 외에 다른 중요한 구실 한 가지를 더 수행했다. 바로 교육 공간으로서의 구실이다. 미술 아카데미와 학교가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한 아틀리에의 교육활동은 이런 교육 시스템이 갖춰진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특히 정물과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기법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교습법이 행해졌는데, 이를 ‘아틀리에 교습법’(Atelier Method)이라고 부른다. 아틀리에 교습법은 화가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대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데생을 중시하는 것은 어디나 같았다. 석고 데생을 통해 인체의 형태와 구조, 명암 처리법 등을 배우는 것도 다 비슷했다.

인체 표현과 관련해 아틀리에는 한동안 여성 누드를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유럽의 미술 아카데미나 학교에서 누드모델 실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이는 전적으로 남성 모델에 한정됐다. 여성 누드모델 실기는 젊은 미혼 학생들에게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이 시기에 여성 누드모델을 그리고 싶은 학생들은 이를 강습하는 화가의 아틀리에에 따로 등록해 배워야 했다. 아틀리에가 지닌 이런 자유스런 분위기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아틀리에는 때로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퇴폐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가일링의<‘학부회화’ 중 ‘철학’의 밑그림을 그리는 클림트>는 이런 판타지를 충실히 뒷받침하는 그림처럼 보인다. 벌거벗은 모델들이 단순히 모델을 설 뿐 아니라 열심히 클림트의 시중을 들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을 주인에게 맡긴 하렘의 하녀 같다. 클림트가 죽고 난 뒤 클림트의 모델들을 중심으로 14건이 넘는 친자 확인 소송이 제기됐다는 기록을 보면 이런 판타지가 나름의 현실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클림트의 예술이 지닌 놀라운 상상력과 집중력이 보여주듯 아틀리에는 본질적으로 창조와 투쟁의 공간이었다. 아틀리에에서 혼신을 다해 치열하고 처절한 투쟁을 벌이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 공간을 진정으로 숭고하고 거룩한 곳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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