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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23 18:01 수정 : 2009.03.23 19:39

‘엘긴 마블스’ 중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박공 군상, 기원전 447~432년 무렵, 대리석, 영국박물관.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체를 실제와 똑같은 형태로 재현해낸다. 그 성과물 가운데서도 최고의 성취를 보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게 이 작품이다.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3] 엘긴 마블스와 미술품 약탈

당시 튀르크 대사 엘긴이 뜯어내
화려한 변명으로 아직 반환 안해
나폴레옹·히틀러 땐 체계적 약탈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진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서양미술사의 걸작이다. 이 작품의 높은 위상은 소장처인 영국박물관이 따로 널찍한 공간(더빈 갤러리)을 배정해 잘 모셔 놓은 데서 알 수 있다. 사실적인 묘사와 고전적인 규범미가 돋보여 서양미술의 핵심적인 특징을 완벽하게 드러낸 고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 명작이 지금껏 소란스런 약탈 논란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이 그리스에서 영국으로 오게 된 사연은 이렇다. 1799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영국 대사로 부임한 제7대 엘긴 백작 토머스 브루스는 당시 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의 파르테논 조각상들에 대해 조사했다. 엘긴은 튀르크 당국의 허가를 얻어 신전을 스케치하고 실측했는데, 엘긴에 따르면 이 허가에는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을 일부 떼어 영국으로 가져가도 좋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이런 공문을 철저히 보관하는 튀르크의 관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당 문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의회가 영국박물관을 위해 이 작품을 구입할지 논의를 시작했을 때 엘긴은 의회에 이 문서의 영역본을 제출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원문이 없는 상태여서 번역본의 신빙성은 아직도 안갯속이다.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1634, 유화, 158×117cm, 에르미타슈 박물관. 명암 대비의 극적인 표현이 예수의 희생에 숭고함을 더한다.
작품취득의 법적 근거에 대한 시비와는 별개로, 당시 영국 내에서는 엘긴의 행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문화재는 현장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게 원칙인데, 멋대로 분리한 것 자체가 야만적인 약탈 행위라는 것이다. 시인 바이런, 정치가 존 뉴포트 등이 이 비난 대열에 앞장섰다.


여러 논란이 있었음에도 영국박물관은 1816년 3만5천파운드에 이 작품을 구입했다. 엘긴의 이름을 따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로 불리는 이 조각들은 모두 17개의 환조와 15개의 메토프(사각형의 부조 장식), 75m 길이의 프리즈(띠 부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가 이 조각들에 대한 환수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아크로폴리스 유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튀르크의 압제 시절 그리스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약탈된 예술품이니 본디 있던 자리로 되돌려놓는 게 당연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 호소에 부응해 바티칸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박물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 등에서는 소장하고 있던 관련 유물들을 모두 그리스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영국박물관은 핵심 미술품인 ‘엘긴 마블스’를 반환하지 않고 있다. 박물관 쪽에서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영국박물관법’이 후손을 위해 소장품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약탈 문화재의 반환과 같은 ‘도덕적 의무’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조항이다. 그리고 본디 있던 파르테논 조각의 절반 이상이 다 망실된 마당에 ‘엘긴 마블스’를 돌려준다 해도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또 아테네의 공해 등으로 인해 신전에 설치하는 것이 무망해 결국 인근 박물관에 수장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면 런던에서 아테네로 수장처를 옮기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이 일이 중요한 전례가 되어 전세계의 주요 박물관에서 소장품을 다 출신 국가로 반환하게 된다면 이 박물관들은 텅 비어 버릴 것이다. 이는 이들이 현재 세계의 문화유산 센터로 기능하는 것을 고려할 때 관리와 연구, 교육, 전시 모든 분야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라파엘로, <시스틴 마돈나>, 1513년께, 유화, 265×196cm, 드레스덴 회화 미술관. 천진난만한 아기 천사상으로 유명한 작품. 2차대전 때 러시아에 의해 약탈되었다가 1955년 반환되었다.
그리스나 이와 유사한 사례를 겪은 피해국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이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처럼 가해자 중심의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합리화를 엘긴의 이름을 따 ‘엘긴의 변명’(Elgin Excuse)이라고 부르는데, 어쨌거나 이런 합리화는 지금도 문화재 반환 시비가 있는 모든 곳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미술품과 문화재의 약탈이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해 벌인 것 외에 제국주의 열강이 다투던 시절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도 빈번히 일어나 그들 사이에서조차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가 패자로부터 전리품을 약탈해 오는 것은 예로부터 부지기수로 자행됐던 일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약탈이 단순한 약탈에 그치지 않고 문화재와 예술품에 대한 애호를 토대로 체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되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나폴레옹은 미술품 약탈을 처음으로 제도화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약탈에 몰두했는지 이탈리아에 쳐들어갔을 때는 그 스스로 “토리노와 나폴리의 일부 명품을 제외하고는 전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물건이 이제 다 우리 차지가 될 것”이라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약탈한 미술품은 루브르를 채우고도 넘쳐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밀라노의 브레라 갤러리,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을 세우는 뼈대로 사용됐다.

물론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약탈품의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프랑스에 남은 것도 꽤 많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손이 바뀌느라 나중에는 약탈품임이 분명해도 반환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렘브란트의 대표적인 걸작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는 나폴레옹의 장군 라그랑주가 독일의 헤센카셀 제후로부터 약탈해 온 것으로, 조제핀이 소장했다가 나중에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팔려나갔다. 1918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뒤 독일 쪽 협상가들이 러시아에 이 작품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나폴레옹을 약탈 전략의 스승으로 삼았다. 전담 조직을 설치하고 체계적인 약탈에 나섰는데, 특히 동유럽 국가들과 러시아에서 극심하게 이뤄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궁전, 미술관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요즘 시가로 2억5천만달러로 추정되는, 예카테리나궁의 호화로운 호박방이 통째로 뜯긴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이 보물의 소재는 지금껏 미스터리다. 러시아 역시 전쟁 말기와 종전 직후에 독일에 광범위한 보복적 약탈을 자행해 무려 250만점의 미술품과 1천만권의 책, 문서를 가져갔다. 이 가운데는 구텐베르크 성경도 있었다. 미술품의 경우 100만점이 아직 독일로 반환되지 않고 있는데, 반환에 대한 러시아 우파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이와 관련해 지난 3일 러시아와 독일의 미술사학자 120여명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양국 정부에 약탈된 미술품의 소재 추적과 자료 접근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들의 노력이 과연 얼마나 성과를 낼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이런 캠페인은 여론을 점진적으로나마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2002년 영국에서 이뤄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40%의 영국인이 ‘엘긴 마블스’의 그리스 반환에 찬성했다(반대 16%). 반환을 위해 끝없이 여론을 환기시켜온 문화예술인들의 열정과 수고가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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